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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더 슬픈 게 맞아

갑작스러운 상실 그 후, 우리가 슬픔을 공부하는 방법

최은우

2019-08-07


늘 그렇게 생각했다. 난 정말 상처투성이라고. 그런 나에게 엄마는 자꾸 물었다. "너는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니?"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가 자기밖에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 눈에는 아픈 내가 보이지 않냐고 되묻고도 싶었다. 엄마는 그래도 어른이니까 어린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오빠를 잃은 엄마와 나의 슬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보다 한 살 많은 연년생 오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건강했던 오빠가 배가 아프다고 하길 몇 주, 그리고 중환자실에 입원한 한 달 뒤였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그때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집에 살던 가족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다. 오빠가 사라진 후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었다. 싸울 때마다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오빠가 진짜로 없어져 버렸다. 


남겨진 우리 가족은 각자의 방에서 슬픔을 견뎠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까만 어둠으로 뒤덮인 베란다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엄마가 저러다 갑자기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견디기 힘든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화장실에서, 내 방에서 몰래 울었다. 내 울음소리를 혹시 누가 들을까 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엄마와 아빠는 많이 싸웠다. 몇 개월 후 그들은 이혼했다. 아빠는 사라져버렸고, 엄마는 나에게 아빠 욕을 했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13살짜리 인생을 뒤흔들었다. 예전의 나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억울해서 울었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또 울었다. 습관처럼. 


아무리 울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슬퍼도 밥은 먹어야 했고, 학교는 가야만 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인사도 해야 했다. 형제가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는 ‘외동’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천천히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지옥 같던 시간도 그럭저럭 적응할 만했다. 눈물을 쏟아내는 빈도도 줄어들었다. 엄마와 단둘이 사는 게 점점 익숙해질수록 죄책감도 함께 찾아왔다. 나,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도 될까? 오빠가 죽은 것도,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것도 이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오빠가 사라진 뒤 17년이 지났다. 


슬픔의 무게로 엄마와 나의 사이에는 벽이 생겨났다.


"너는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니." 어렸을 때는 엄마의 하소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며칠 전에도 똑같은 질문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엄마 혼자만 겪은 일이야? 나도 같이 겪은 일이야. 왜 엄마만 불쌍하다고 생각해?” 엄마는 내 말을 듣고 하소연을 멈췄다. 


은근히 속이 시원했다. 몇 년간 묵어 곪았던 무언가가 비에 씻긴 것처럼 상쾌해졌다.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예전에 자주 했던 상상을 다시 떠올려봤다. 만약에 내게 오빠 말고 또 다른 형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 그렇다면 덜 슬프지 않았을까. 틀림없이 그럴 것 같다. 형제의 죽음과 부모의 이혼을 함께 겪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이 됐겠지. 


그러면 엄마는? 엄마의 경우는 만약이라는 가정조차 불가능했다. 엄마의 슬픔은 누군가와 나눌 수조차 없는 혼자만의 슬픔이었다. 엄마는 자식을 잃었고, 남편과 이혼했다. 나는 형제를 잃었고, 부모가 이혼했다. 내가 틀렸다. 우리는 결코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저자, 신형철은 말한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고.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라고.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라고. 


그렇다. 나는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먹고 살기 바빠 오빠의 생일을 까먹고, 기일도 챙기지 못하지만, 엄마는 아직도 오빠의 생일에 소고기를 넣은 미역국을 끓이는 사람이다. 오빠의 기일이면 절에 가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슬픈 표정을 짓는 사람이다. 죽은 자식의 생일에 17년째 미역국을 끓이는 사람의 슬픔이 얼마만큼 깊을지 나는 죽을 때까지 알 수 없겠지. 그런 엄마에게 엄마 혼자만 겪은 일 아니니까, 이제 그만 울라고 소리친 셈이었다. 엄마는 엄마 말대로 정말 불쌍한 사람이 맞다. 아니, 여전히 슬픈 사람.


책을 읽은 후 깨달았다. 나는 내 슬픔 속에 빠져서 주변의 슬픔은 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옆에 계속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아니, 보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슬픔이 그제야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 미웠던 엄마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사납고 매서웠던 예전의 엄마가 작고 연약한 늙은 엄마로 보이는 것 같았다. 엄마도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말이구나. 엄마도 그때 많이 힘들었겠지. 엄마도 그때는 어렸으니까.


서로의 슬픔을 이해하고 함께 우는 것, 아픔을 극복하고 슬픔을 다루는 방법이다.


작가는 계속 슬픔을 다루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겪는 상처와 고통은 불균형하기 때문에 반드시 한번은 함께 울어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끝내 완전히 동일해질 수 없을 상처와 불균형을 가까스로 맞춰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엄마와 나는 공평하지 못한 슬픔을 겪었다. 엄마는 나보다 더 슬펐고, 나는 가끔 엄마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엄마가 종종 슈퍼에서 오빠가 좋아했던 음료수를 사 오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나는 엄마가 계속 혼잣말만 하도록 내버려 둔 셈이었다.


17년 전,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오빠를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지만, 이제는 엄마와 함께 오빠를 잘 보내줘야 한다. 나는 엄마만큼 슬퍼하지 못하지만, 이제라도 지나온 슬픔에 대해 엄마와 마주 앉아 함께 울어볼 수 있을까. 우리 17년 전에 참 힘들었지. 그땐 우리 둘 다 참 어렸지, 하며. 책을 읽다 밑줄 친 문장을 다시 가만히 곱씹어 본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슬픈 일을 미리 알고 막아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을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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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은우
최은우

왜 나는 불행한지 계속 탐색중입니다. 이미지_ⓒ최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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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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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진 이미지

양**

2019-08-19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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