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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의 나를 만나는 일상여행 탐구

지금 여기에서 여행자 ‘되기’

권혜진

2018-08-22


여행 중 우리가 반했던 첫맛은 바로 첫 숨, 낯선 공기의 맛이었어


TV를 켜면 어느 채널이든지 이국의 먹방 프로는 꼭 있다. 근사한 풍광을 두르고 연예인, 혹은 그 연예인의 아들딸 장모까지 외국에 나가 있는 힘껏 먹고 또 먹고 감탄한다. 우리는 언제나 떠나고 싶다. 여행은 밑 없는 독처럼 채워도 채워도 갈구하게 되는 마녀가 만든 요술 상자 같다. 여행,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매혹하나? 맛있는 요리? 내 나라에 없는 자연풍광? 액티비티 레포츠? 여행의 이유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여행을 떠난 모두가 동시에 겪는 동일한 이 맛이 있다. 바로 공항을 나와서 맡았던 첫 숨, 그 낯선 숨에서 오는 자유의 맛을 피할 길은 없다.


공항을 나와서 맡았던 첫숨


어쩌면 우리는 이 낯섦, 비밀을 간직한 무형의 맛에 취해 여행을 향한 끝없는 연정을 품고 사는지 모른다. 여행에서 우리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나이, 직업적 위치, 집안의 재산 정도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적어도 현실에서보다는 확실히 그렇다.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대다수의 관계는 쿨하다. 이른바 갑과 을이 사라진다. 진상 고객과 마트 계산원으로서의 만남, 상사와 말단직원, 학생 수에 전전긍긍하는 학원 강사와 학부모로서의 관계도 없다.


여행지에서 처음 만났다면, 우리는 명찰과 완장을 벗고 내가 나로서 웃고, 대화를 나누고, 좋은 건 좋다고 말하기 쉽다. 한마디로 ‘날것의 나’로 말하고 행동하고 사유한다.


이것이야말로 많은 이들이 여행을 찬미하게 된 힘일 테지. 그러니 여행은 어떤 물성이라기보단 깊고 미묘한 정신적 작용이라 함이 옳다. 한마디로 일종의 약이다. 숱한 직업적 관계로 정신을 사고파는 현대인들에겐 필수적인 치유약.



’지금 여기’로 떠는 일상여행,

여행이 물성이 아닌 정신작용이라면, 나는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그 약을 처방하리라


당장 떠날 수 없다는 이유는 대개 시간, 돈이 없어서다. 그렇게 여행을 떠나기 어렵다면 나 스스로, 지금 이곳으로, 여행을 소환하리라.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니다. 평범한 어느 주말, 혹은 퇴근 후 저녁, 아니면 일을 하던 중에 아주 잠시라도 우리는 여행자가 될 수 있다. 이 여행 정신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낯설게 보기’ 그리고 ‘가면 벗기’이다.


단 1분, 10분이라도 좋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역할놀이를 잠시 멈추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여행자로서, 타자로서 바라보려는 아주 작은 습관에서부터 일상여행이 시작된다.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대다수의 관계는 쿨하다


바쁜 출근길에 딱 10분. 10분을 투자해 가만히 나만의 찻상에 앉아 차를 마셔보기. 그땐 아직 일어나지 않은 회사 일이나 이미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도 일절 생각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처음엔 쉽지 않겠지만 조금씩 이 잠깐의 배짱을 키워 나가다 보면 그것들이 모여 내 안에 어떤 공간 같은 게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자존감, 여유, 실존과 같은 단어들이 바로 이 공간으로 들어선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티베트의 오랜 속담이 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에너지를 소비하기보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습관이야말로 일상여행을 떠나는데 필요한 첫 번째 황금 여권이다.


찻상에 앉아 차를 마셔보기


출근길이 어렵다면 주말이나 퇴근길에 떠나는 우리 동네 일상여행도 좋다. 자신이 늘 걷던 동네 길을 반대로 걸어가 본다거나 내려야 할 정류장을 일부러 지나쳐 다다음 정류장에서부터 집까지 걸어와 본다거나. 아님 내친김에 종점까지 가 봐도 좋겠다. 해 질 무렵 자신이 사는 집 옥상에 올라가 도시의 노을을 바라보고 맥주를 마셔 봐도, 곱게 소풍 갈 준비를 해서 옥상이나 베란다를 즐겨 봐도, 여느 여행지 못지않음을 새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타국의 공항에서 처음 맡았던 첫 숨처럼 세상을 낯설게 보려 하는 여행자의 시선만 있다면 말이다. 퇴근 후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평소 안 들리던 꽃집에 들러보는 건 또 어떨까. 평소 무용해 보이던 그 꽃을 소중히 데려와 정성스레 펼친 후 예쁜 컵에 꽂아보니 또 다른 게 보인다. 늘 지나치던 꽃이었는데 이걸 또 자세히 보니 말로만 듣던 피보나치수열과 황금비례가 그곳에 있더라. 대칭미의 극치라던 인도 타지마할의 황금비율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꽃을 소중히 데려와 예쁜컵에 꼿아보니


일상여행, 평범한 일상을 일부로 낯설게 보기를 통해 우리는 언제든 공항을 나선 여행자가 되고 잠시라도 사회에서 입었던 외투와 가면을 벗어 볼 수 있다.


책무로 가득했던 역할을 잠시 멈추는 작은 습관. 이 잠깐의 여행은 우리 삶에 있어 생각보다 더 깊은 처방이 되기도 한다. 살면서 억지로 웃고 비위 맞추다 보면 우리 무의식엔 억압의 기름때가 조금씩 낀다. 욕실 배수구에 머리카락이 끼듯 자동차 엔진에 기름때가 끼듯 말이다. 일상여행은 바로 그 때를 벗기는 목욕이다.



일상여행은 나와 세상에 관한 통찰 명상


하루 5분에서 30분, 세상을 낯설게 보며 여행자로서 꾸준히 살다 보면 자신이 입고 있던 옷에 대한 결과 질에 관해 관찰하기 수월하다. 역할을 잠시 벗어 그 옷을 옷장에 걸다 보면 어떤 옷은 나를 더 강하고 따뜻하게 해주는데 어떤 옷은 나를 조이고 유독 많은 억압의 기름 떼를 쏟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알아채는 것이다. 현재 내 옷 내 상태를. 세상을 살면서 유독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입은 옷의 진피와 가피를 알게 되고 크고 작은 문제의 원인을 알아채 간다.


그러고 보면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일상여행 역시 세상으로부터 도피가 아닌 세상으로 더 건강히 들어가기 위한 잠깐의 거리 두기인지 모른다. 아주 잠시 멈춰 기름 때를 벗기고 내게 맞는 옷이 뭔지 타자로서 나를 바라보는 통찰의 시간. 그 티켓은 누구나의 손에 달렸다. 잠시라도 역할을 내려놓으려는 내 마음과 의지, 일상을 낯설게 보려는 상상력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다.



일상을 여행하는 자아 탐구 실천 편


- 출근 전 10분 티타임: 회사 걱정은 회사에서. 걱정을 끊고 오직 차를 즐기는 단 10분.

- 주말 아침 식사로 맥주 마셔보기: 여행지의 히피 정신이 궁금해질 때 반듯한 일상 비틀기.

- 버스정류장 여행: 버스를 안 타도 정류장에 앉아 오가는 사람 구경하기. 멍 때리기 여행.

- 옥상 홈캉스: 일몰 시간 소풍 도시락을 싸서 내가 사는 집 옥상에 가서 일몰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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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Amy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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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권혜진
권혜진

가끔 글 쓰고 일상을 여행하는 일상여행자, 연금술 수행자, 직업은 짜이왈라. 제주에서 ‘바라나시책골목’이라는 시골집 북카페를 운영하며 책 읽고 짜이티를 끓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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