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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 연가戀歌

어느 낙관론자의 소박한 바람

이지현

2018-06-01


내게 있어 북한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요원했다. 어떤 나라보다도 가까이 맞붙어 있지만, 나는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저곳’에 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살면서 그나마 북한에 물리적으로 잠시 가까워질 뻔했던 순간이 딱 한 번 있긴 했다. 중학교 때, 선생님 호출로 교무실에 갔더니 뜬금없이 금강산에 가보겠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2005년 당시는 남북 관계의 화해 모드가 조성되면서 금강산 관광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시기였다. 흔치 않은 기회라는 선생님의 회유가 수차례 있었지만, 별 감흥이 없던 나는 그 기회를 다른 이에게 넘기겠노라 대답했다. 오히려 선생님이 잔뜩 몸이 달아 정말 가지 않을 건지 되물었다. 일회성의 금강산 여행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때의 나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평양식 평양냉면을 먹어봤습니까?


한 달쯤 전, 종로의 노상 꼬치구이 가게에서 술을 마시다 KFC할아버지만큼 배가 둥그렇게 부른 외국인 노신사와 합석을 하게 됐다. 애인은 유난히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한국을 찾은 저 노신사에게 맥주 한 잔을 선사하고 싶다”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덕분에 우리는 자연스레 테이블을 붙이고 맥주와 꼬치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알고 보니 노신사는 영국에서 근현대 한국의 사회문화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마침 며칠 전 남북합동 평양공연이 성황리에 끝난 터였고, 남측 공연단이 먹고 이슈가 된 ‘평양냉면’이 문득 떠올랐다. 북한의 사회문화를 연구해온 사람인 만큼 나름 관심이 있겠다 싶어, 근처 을지로의 평양냉면집에 가보라며 추천해줄 요량이었다.


"북한의 평양냉면에 대해 알고 있나요?"

 

을지면옥의 평양냉면

▲ 개인적으로는 국물이 맑고 개운한 을지면옥의 평양냉면을 가장 좋아한다.


이어진 대답에서 나는 그가 직접 평양에 방문해 평양냉면을 맛본 경험이 몇 차례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통’이니 ‘원조’니 하는 걸 맹신하진 않지만, 북한에서 직접 평양냉면을 맛봤다는 그 앞에선 유명한 몇몇 평양냉면집의 이름을 내밀기도 멋쩍게 되었다. 타국의 어느 교수가 직접 평양냉면을 맛보고 경험하는 동안, 남한의 평양냉면 애호가들은 "겨자와 식초를 넣는 건 맛알못(맛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란 말을 정설로 믿어왔고, 이 뿌리 깊은 믿음은 평양의 옥류관을 방문한 남측 공연단의 식탁에서 다대기, 겨자, 식초 3종 세트를 발견함으로써 혼돈의 카오스에 빠진 참이었다. 나는 남북이 지난한 시간 동안 얼마나 단절되어 있었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가지 않았던 금강산 여행을 아쉬워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였을까.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북한의 평양냉면을 먹어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이 이제와 조금 억울했다.

 

가깝고도 먼, 멀고도 가까운


나이 먹는 일을 슬슬 진지하게 신경 쓰게 될 때쯤, 나와 주변 친구들 사이에 몇 가지 변화가 생겨났다. 그중 하나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언제부터인가 부동산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마침 한 친구가 최근 들어 남북 접경 지대의 부동산 시세가 엄청나게 치솟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해당 지역에 부동산 매물을 내놓았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거래를 취소하고 있다더라”는 카더라가 한 차례 술자리를 휩쓸었다. 5월 16일 북한에서 남북 고위급회담의 무기한 연기를 일방적으로 통보한 이후, 남북 관계에 대해 그 어떤 확신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재미있게도 부동산 업자들의 재빠른 움직임이 관계 개선의 낙관적 전망을 드러내는 선명한 지표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26일 오후 3시,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두 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사진 출처: JTBC 뉴스 캡쳐)


남한과 북한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 두 손을 맞잡고 웃는다. 1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평화로운 순간이다. 그러나 남북 관계의 순조로운 진전과 더 나아가 통일의 여부에 대해 단순히 낙관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그렇게 큰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나를 포함한 젊은 층은 통일에 대해 우호적이지만, 더 이상 이를 간절히 원하는 세대는 아니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굳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교류협력을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두 개의 분단국가로 나눠진 이후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남한과 북한이라는 서로 다른 체제 아래 고착화된 사람들의 생활양식부터 말투와 생각까지. 두 국가 사이엔 쉽게 메울 수 없는 크고 깊은 간극이 존재한다.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나온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이 함께 살든 따로 살든 서로 간섭하지 않고 서로 피해를 주지 않고 함께 번영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발언 역시 이러한 현실 인식을 인지한 데서 연유한 것일 테다.

 

과거 분단 국가였던 동서독이 통일 과정에서 지출한 통일비용은 현재 환율을 기준으로 1조 7000 달러였으며, 동서독 간에는 지역격차와 동독인들의 열등감 문제가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있다. 이보다 오랜 분단 기억을 지닌 우리의 미래가 다를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통일 비용만 볼 게 아니라 분단 비용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진기 강사는 <100분 토론>에서 이를 ‘부작위에 의한 손실’로 설명했다. 가시적으로 계산된 1000조라는 수치가 통일에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막대한 국방비와 남성이라면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2년 동안의 군복무 시간 등 분단 시 영구적으로 지출될 분단 비용에 대해서는 다수의 사람이 둔감하다는 말이다. 대등하게 대립하는 통일 비용과 분단 비용에의 논쟁은 결국 생각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다.


다만 소박하게 바라건대


1차 남북정상회담이 지난 4월 27일 열린 이후 남북철도 관련주가 연일 급등 중이다. 그 배경에는 남과 북을 잇는 철도 사업이 빠른 시일 내에 시행 검토 절차를 밟을 거란 대중의 기대 심리가 담겨 있다. 실제로 중국과 러시아를 통과할 철도 운송은 그동안 불가피했던 해상 운송에 비해 시간과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방학을 이용해 유럽 각국을 기차로 여행하던 유럽 국가 학생들의 낭만 가득한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동경해왔던가! 인터넷 상에서는 이미 부산발 베를린행 유라시아 횡단열차 승차권이 61만 5000원에 거래되고 있다. 물론 2022년 8월 15일이 출발 일자로 설정된 가상의 승차권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실현 가능 시기를 2~3년 정도로 가늠하는 것을 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농담은 아닌 듯하다.


유라시아 횡단열차 승차권 Trans-Eurasia Railroad Ticket (부산→원산→베를린) 2022년 8월 15일 12:00출발 2000열차 6호차 15석 / 615,000원 / 11,971km

▲ 그 승차권 저도 탑승해보겠습니다. 인터넷상에서 공유되고 있는 승차권을 인쇄해 종이 티켓으로 만들어보았다. 유효하지 않은 승차권임을 알지만 기분만은 즐겁다.


무엇보다 십여 년 전 금강산 관광을 추진하던 그때보다 오늘의 북한은 퍽 가깝게 느껴진다. 도보다리에서 행해졌던 두 정상의 독대 장면은 뒤로 펼쳐진 푸른 풀숲의 모습과 지저귀는 새소리가 전부였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이야기하던 모습에선 언어가 지닌 한계를 넘어서는 큰 울림이 있었다. 단순한 퍼포먼스도 정치 공작도 아닌, 새로 맞춰 나가야 할 관계에 대해 진중하게 임하는, 남북의 마음가짐을 자연스레 엿본 기분이었다.


"북미 회담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과연 실현될 것인가. 여기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미국 내에 많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실패했다고 이번에도 실패할 것이라고 미리 비관한다면 역사의 발전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 5월 22일 한미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 답변 中


나는 북측의 진심을 헤아릴 요량도 없거니와, 정치적인 혜안이 밝은 사람도 되지 못한다. 태생이 낙관론자인 나는 그저 오늘 행해지는 작은 변화를 믿을 뿐이다. 다만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언젠가는 북한에 가서 평양냉면을 마음껏 먹고 싶다는 것. 평양냉면의 슴슴하고도 진한 풍미는 이북 고향에 대한 실향민들의 투박한 그리움과 닮아 있다. 분단 세대도 아닌 내가 그 맛을 통해 평양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진 건, 음식이 정서를 공유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인 덕분이다. 조금씩 알게 되면 상대가 궁금해진다. 그게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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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지현
이지현

도시 콘텐츠 전문 기업 '어반플레이' 에디터. 동네를 경험하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동네 매거진 '아는동네' 제작 중. 인생의 모토는 "삶을 음미하며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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