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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여기서 행복할 것

인문쟁이 김주은

2017-03-20


오전 9시 30분,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같은 아침 시간입니다. 글을 쓰고 있는 이곳은 핀란드 헬싱키입니다. 헬싱키 겨울의 낮 시간은 참 짧습니다. 10시가 넘어야 해가 뜨고 오후 3시쯤이면 뉘엿뉘엿 날이 저물기 시작합니다. 이곳 겨울은 화창하게 맑은 날이 드물어서 환하게 해가 떠 있는 시간은 체감상 6시간이 채 되지 않습니다. 여행을 떠나 온 지 보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짧은 낮은 아직도 적응되지 않습니다.

잠시 밖에서 두세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이미 하루가 끝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실제로는 더 많은 하루의 시간이 남아있지만, 해가 지면 왠지 모르게 하루도 그렇게 저문 것 같습니다. 해가 일찍 저무는 덕분에 하루가 짧아진 것 같지만 좋은 점도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 ‘밤의 시간’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요즘 그 ‘밤의 시간’을 만끽하며 여행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헬싱키의 아침 풍경헬싱키의 밤 풍경

▲ 오전 열시, 헬싱키 아침 풍경 / 헬싱키 밤 풍경


결혼 전, 친구들과 해왔던 여행들은 꽉 찬 일정으로 하루를 바쁘게 돌아다니다 숙소에 오면 지쳐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오롯이 ‘여행’에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이, 더 보고 싶은 것들로 채워 넣는 여행. 그런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 많이 둘러봤구나….’ 하는 기억은 남아있지만, 마음이 채워진 느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여행이 끝나면 극도의 피곤함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곧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줄 또 다른 특별한 여행을 기대하며 이전과 같이 바쁘게 일상 속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핀란드에서 제가 하는 여행은 이전에 해오던 여행과는 조금 다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여행이라기보다는 30일 동안 우리의 삶의 공간과 시간을 옮겨보고자 하는 일종의 ‘시도’입니다. 또한 한 달 동안 충전을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길다고 생각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30일 동안 여유 없이 살았던 우리에게, 가능하다면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긴 휴식’을 선물해 주는 시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핀란드 헬싱키는 최적의 여행지입니다. 겨울엔 낮이 짧아 많은 것을 할 수 없는 곳. 유럽을 여행하는 여행객들이 잠깐 거쳐 가는 장소, 행여나 여행한다 해도 1주일 이상 머무르지 않는다는 이 심심하고 재미없는 도시는 저와 신랑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여행의 장소’였습니다.


헬싱키 전경

▲ 헬싱키 전경


헬싱키에서의 여행은 하루에 두 가지 이상의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통은 어둑어둑한 아침 여덟시에 일어나 아침을 만들어 먹고, 작은 가방에 물통과 간단한 간식, 그리고 읽고 싶은 책 한 권과 노트 한 권을 챙겨 나와 전날 정한 ‘꼭 가보고 싶은 한 개의 장소’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최대한 머물렀습니다. 몇 날은 마음에 드는 도서관에 출근하다시피 방문하여 온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느긋한 아침 시간이 지나면 인근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그날의 ‘두 번째 가보고 싶은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가보고 싶은 곳’은 가보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이유는 이미 마음에 드는 한 곳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정이 아쉽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있고, 이곳에서 해야 할 일들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닌 그저 ‘하고 싶은 일들’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핀란드국립도서관특별한 중고서적과 갤러리가 있는 소피아 서점

▲ 핀란드국립도서관 / 특별한 중고서적과 갤러리가 있는 소피아 서점


첫 번째 가보고 싶었던 곳에서 머무름이 충분히 끝나면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날 저녁과 내일 아침에 먹을 찬거리를 만들기 위해 동네 마트를 들르는 것이 반드시 해야 할 일정에 들어 있었습니다. 일주일 치의 식량 혹은 먹을거리들을 효율적으로 한 번에 쇼핑하는 것이 아닌 그 날 먹고 싶은 음식들을 생각하고, 그 날 필요한 만큼의 식자재를 구매하여 정성스레 요리하는 시간들.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요리한 음식들을 대화와 함께 나누면 비로소 우리들의 하루 여행이 끝이 났습니다.


요리의 시작은 장보기로부터

▲ 요리의 시작은 장보기로부터


그런 하루 여행이 끝이 나면, 길고 긴 밤의 시간 동안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 노트에 하나씩 하나씩 채워졌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쓰지 못했던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의 날씨, 그날 다녀왔던 곳, 그날 먹었던 음식, 그날 만났던 사람, 그리고 그날의 감정들…. 영수증과 입장표까지 붙어 있는 어쩌면 기록 수첩 같은 일기장이 매일 빼곡히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을 기록한 여행 일기 속에서 우리가 원했던 삶의 모습들을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되도록 원하는 일들만 하기, 그 일을 위해 무리하지 않기. 제 시간에 식사를 하고 최대한 많이 걷기.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 함께 하는 시간 안에서 나만의 시간 가꾸기. 그리고 이러한 날들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기 등…. 우리는 특별할 것 없는 여행 속 일상을 통해 그동안 잊고 있던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기억해 냈습니다.


여행 중 찍은 사진


모든 여행의 출발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여행도 ‘삶의 공간과 시간을 옮겨보는 시도 그리고 휴식을 위한 시간’ 이라는 의미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행의 중반이 넘어가는 이 순간 우리 여행의 의미는 어쩌면 ‘원하던 일상을 찾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러한 의미들을 찾는 행위가 꼭 어느 곳으로 떠나야지만 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루를 기록한 일기들을 다시 처음부터 넘기다 보면 우리의 특별한 것 없는 여행의 일상들은 너무나도 특별한 하루하루였으며, 그 시간의 의미를 알아챈 우리는 어느 곳인가 또 다른 여행지로 떠난 우리가 아니라 바로 숙소 책상 위에 앉아 있는 우리였기 때문입니다.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

이라는 말을 써두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이라고.’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북라이프(2016), p.27


헬싱키 전경


생의 여행 중 제일 긴 시간 동안 정말로 특별하지 않은 일들을 하는 이 여행이 어쩌면 지금까지의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고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음이 채워진 여행, 이번 여행의 끝에는 피곤함이 없을 것이라 단언합니다. 그리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 줄 또 다른 특별한 여행을 기대하지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비록 이전과 같이 바쁜 일상 속으로 다시 돌아가겠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스스로 행복하게 가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지금 있는 자리에서 행복한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사진= 책방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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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은
인문쟁이 김주은

[인문쟁이 2기]


'김주은'은 전남 순천시에 살며 순천역 인근에 있는 서점 <심다>를 운영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에서 문화예술프로그램을 기획 및 진행해 왔으며, ​현재는 시골 마을 어린이들과 함께 그림책으로 예술놀이를 하고 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날마다 ‘여행하듯’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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