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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토박이와 걷다

미아리점성촌 역학사들과의 만남

백외준

2016-05-12


충무공 이순신은 1594년 어느 가을 새벽, 홀로 방안에 앉아 책을 펴 점을 쳤다. 전날 배편으로 아내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은 까닭이다. 그는 이날 얻은 점의 결과를 일기에 기록해 두었다.

  • 『난중일기』의 다양한 주해본들 ⓒ도서출판 여해,

    『난중일기』의 다양한 주해본들
    ⓒ도서출판 여해,
      

  • 『난중일기』의 다양한 주해본들 ⓒ중앙북스,

    『난중일기』의 다양한 주해본들
    ⓒ중앙북스,
      

  • 『난중일기』의 다양한 주해본들 ⓒ지식공작소

    『난중일기』의 다양한 주해본들
    ⓒ지식공작소


1594년(선조27) 9월 초1일(병자) 맑음. 앉았다 누웠다 잠을 못 이루고 촛불을 켠 채 뒤치면서 지새웠다. 이른 아침 세수하고 고요히 앉아 아내의 병세에 대해 점을 치니, <중이 환속하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고,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다.

매번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왜군을 격파한 이순신도 아내의 병만은 어찌 손써볼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완전무결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다가설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그럴 때 종교나 점복과 같은 신비주의는 그 어두컴컴한 세계와 교신하기 위한 실낱 같은 통로가 되어준다.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인간사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었던 이러한 신비주의적 의식들은 인류 역사의 진전과 함께 복잡성과 보편성을 더해가면서 문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중에서도 점복은 고등 종교가 미처 감싸주지 못하는 공간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과 조응하면서 고유의 영역과 위상을 확보해 왔으며, 인터넷 시대인 지금까지도 강한 흡입력과 갖가지 수단들을 가지고 대중을 불러 모은다.

미아리점성촌의 탄생과 그 역사

서울에는 이 점복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마을이 있다. 바로 미아리점성촌이다. 성북구 동선동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 미아리고개 쪽으로 이어진 고가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길 양옆으로 큼지막한 원색 간판을 매단 낮은 단층집들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일대가 바로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역학사 마을, 미아리점성촌이다. 성북문화원에서 향토사 연구원으로 있는 필자는 지난 2014년 여름, 이곳에서 비교적 오래 점집을 운영하고 있는 역학사들을 만나 점성촌의 변천 과정과 한국 점복의 역사, 그리고 그분들 각자의 간단한 이력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 미아리점성촌에 위치한 청산 철학관의 모습 ⓒ백외준

    미아리점성촌에 위치한 청산 철학관의 모습 ⓒ백외준

점성촌의 탄생은 오늘날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왕복 8차선 고가도로와 관련이 깊다. 이 도로가 완공된 것은 1966년의 일이다. 고가도로는 비좁은 고갯길을 넓히고 가파른 경사를 낮추어 고개 양편의 교통을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고가도로와 함께 그 밑에는 도로 양편을 연결하는 굴다리가 하나 생겼는데, 바로 이 굴다리가 미아리점성촌이 탄생한 장소이다. 굴다리가 생기고 얼마 안 되어 지금은 철원철학관을 운영하고 있는 이도병 역학사가 이 굴다리로 들어와 노점을 차리고 손님을 받았다.

“남산에도 조금 있었고 굴다리 밑에서도 66년 4월부터 9월까지 있다가 68년도에 이쪽에 조그마한 집을 얻어서 손님을 받았죠. 처음에 한 5년간은 혼자 있었어요. 그러다가 남산이 개발되면서 헐리니까 집값이 싼 이곳에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죠. 이 동네에서 사글세로 살다가 그 다음엔 전세, 그 다음엔 헌집을 사서 고쳐 썼죠. 손님들이 하나둘씩 오니까 이사를 못가고 여기에서 계속 살았던 거죠.” (이도병, 76세, 철원철학관)

이도병 역학사는 미아리고개로 오기 전 남산 기슭(지금의 중구 남대문로5가와 회현동 일대)에서 처음 점집을 차리고 영업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 서울 도심 개발이 시작되면서 양동과 종로3가 등지에 밀집되어 있던 점집들이 대부분 철거를 당하는 바람에 역학사들은 변두리 지역으로 각기 흩어져 생계를 이어나가야만 했다. 이도병 역학사가 들어온 미아리고개 아랫 동네는 그런 변두리 지역 가운데 한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곳은 집값이 싸고 전차 종점과도 가까울 뿐 아니라 고개를 오르내리는 행인들도 많아 점집을 차리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 수가 늘어났고 그리하여 영업 2년 만에 가게를 마련해 고향 철원의 이름을 딴 간판을 걸었다.

“여기가 전차 종점이었거든. 전차가 을지로부터 여기까지 오니까 정릉, 삼양동, 우이동 이런 데 사람들이 여기까지 버스타고 와서 전차로 갈아타고 시내로 나갔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니까 간판을 보고 한두 사람씩 왔던 거죠.” (이도병)

이도병 역학사의 성공담은 서울에 있는 시각장애인 역학사들 사이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집값이 싸고 목이 좋은 미아리고개 주변으로 시각장애인 역학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점집을 차렸다. 그리하여 1978년 무렵에는 점집 약 40여 개가 밀집한 전국 최대의 점성촌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호황을 맞은 1980년대에는 미아리점성촌도 덩달아 호황을 누렸다. 이미 7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선 점성촌에는 주 고객인 주부들뿐 아니라 관료,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 들도 은밀히 찾아왔다. 일본인 관광객도 심심찮게 방문했다. 택시를 타고 “미아리 가 주세요.” 하면 으레 미아리점성촌에 내려다 주던 시절이었다. 하루 평균 한 가게에 30여 명의 손님이 들어왔고, 입시철이나 신년에는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별별 손님이 다 있었어요. 사주 보러 오는 손님, 1년 신수 보러 오는 손님, 아파서 오는 손님, 이사를 어디로 가야 좋겠나 물어보는 손님, 궁합 보러 오는 손님, 이름 지으러 오는 손님도 있고 많지요. 일본서도 많이 왔다 갔어요. 여행사에서 소개시켜 왔다 가는 거였죠.” (이수남, 73세, 개나리역학사)

  • 철원철학관 ⓒ백외준

    철원철학관 ⓒ백외준

  • 개나리역학사 ⓒ백외준

    개나리역학사 ⓒ백외준

  • 늘푸른철학관 ⓒ백외준

    늘푸른철학관 ⓒ백외준

그러던 미아리점성촌의 기세가 한풀 수그러진 것은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부터다.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미아리점성촌을 찾는 발길도 뜸해졌다. 더구나 젊은이들에게는 90년대 신촌이나 강남 등지에 새로 들어선 타로점, 사주카페 등의 인기가 높아 갔다. 이에 반비례해서 미아리점성촌을 찾는 손님들은 매년 줄어들었다. 노환으로 그만 세상을 뜬 역학사들도 있었다. 해가 갈수록 점집 수가 줄어 지금은 점집이 80년대의 절반에 불과한 30여 개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어느날 IMF가 터진 겁니다. IMF 때문에 실업자가 대량 생산이 되었잖아요. 그렇게 되니까 돈 버는 게 귀천이 없어졌어요. 대학 교수, 회사 사장들도 점쟁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점복은 맹인이나 정신적으로 특수한 만신, 무당이나 하는 직업이었는데, 엘리트들이 이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맹인들이 직업을 많이 빼앗기고 이렇다보니 영업이 잘 안될 거 아니우. 인터넷도 발달해가지고 컴퓨터만 다다닥 두드리면 가만히 앉아서 점 볼 수 있잖아요. 손님이 이래저래 계속 줄어든단 말이지요.” (심남용, 67세, 청산철학관)

미아리의 눈먼 역학사들

미아리점성촌의 역학사들 대부분은 시각장애인으로 어렸을 때부터 전문적으로 『주역周易』을 위주로 한 역학易學을 배우고 익혀 점집을 차렸다. 하나의 학문체계로써 성립해서 전승되고 있는 이 역점(易占)은 만신, 무당처럼 귀신에 의지해서 점을 치는 신점(神占)이나 영점(靈占)과는 엄연히 구분된다. 그래서 굳이 보살이니, 무당이니, 장군이니 하는 신적 존재를 표현하는 화려한 그림과 문구로 입구를 장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흔히 보는 깃대도 없다. 대신 ‘○○철학관’이라는 간판이 가장 많고 문 옆에 육효, 사주, 작명, 신수, 택일 등 점보는 종목만을 적어두었을 뿐이다.

미아리점성촌 역학사들의 자랑은 다른 게 아니다. 손님의 옷차림이나 표정 등을 보지 않고서도 오직 사주(四柱)라는 객관적인 데이터만 가지고서 미래를 예측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만의 자랑은 다른 거 아니에요. 요즘은 강남이고 홍대입구고 가면, 사주 카페 이런 것도 많이 생기고, 인터넷으로도 금방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눈으로 못 보니까 보지 않고도 그 사람 사주를 맞춰 주는 거, 그것이 우리 실력이고 자랑이죠. 사주 보면 그 사람 성품, 직업 이런 거를 거의 파악을 하니까… 그런 걸 자랑할 수 있죠. 눈으로 못 보고도 알 수 있다는 거. 눈 뜬 사람은 그 사람 차림새 같은 것을 보고 어느 정도 때려맞추곤 하잖아요. 우리는 못 보고도 맞추니까. 우리 미아리의 자랑은 그렇죠.” (송오순, 75세, 매화부인 예언가)

점성촌에 중앙회를 두고 있는 사단법인 대한시각장애인역리학회는 한국 시각장애인 점복의 맥을 잇고 있는 대표적인 단체이다. 점성촌의 시각장애인 역학사들이 주축이 된 이 단체는 전국의 시각장애인 역학사들을 회원으로 거느리고 있으며 시·도별 지부를 두고 있다. 이 단체의 기원은 멀리 고려시대까지 올라간다. 고려시대에 활동했던 시각장애인 역학사들을 맹승(盲僧)이라고 불렀는데 개경에 이들의 동업조합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는 조선시대에 와서 명통사(明通寺), 맹청(盲廳)으로 이어졌다. 일제강점 초기 잠시 명맥이 끊겼다가 1925년 조선맹인역리대성교 맹인조합이라는 단체로 부활하였다. 해방 후인 1956년에 이를 대한맹인역리대성회로 개칭하고, 1971년 사단법인 대한맹인역리학회라는 명칭으로 법인설립 인가를 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함께 본다면 미아리점성촌은 한국의 대표적 점성촌으로만 아니라 한국 시각장애인 점복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나가는 존재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성북시각장애인 복지관의 모습 ⓒ백외준

    성북시각장애인 복지관의 모습 ⓒ백외준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www.blindnet.or.kr)도 미아리점성촌의 주요 구성원 중 하나이다. 대한시각장애인역리학회가 학회 재산을 털어 1992년 점성촌 안에 점자도서관을 개관하였고, 이후 회원들의 십시일반으로 1998년 도서관 터에 복지관을 세웠다. 시각장애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지은 시각장애인 복지관이라는 점에서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은 미아리점성촌 역학사들의 자부심 그 자체이다. 복지관에서는 역학사 양성, 심리상담사 양성, 경락안마 등 직업교육 외에도 시각장애 어린이들의 음악 지도, 점자책, 오디오북 제작 등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역학사양성교육은 복지관 설립 초 대한시각장애인역리학회로부터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매년 열다섯 명에서 스무 명가량의 역학사들을 배출하고 있다.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점성촌의 축소나 소멸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점성촌이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진다고 해도 그리 안타까워 할 것은 못된다고 생각한다. 점성촌의 핵심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무형적인 것, 다시 말해 한국의 시각장애인 점복이라는 천년 넘게 내려져 온 전통이기 때문이다. 대한맹인역리학회와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은 그러한 전통을 꾸준히 이어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시대가 바뀐다 해도 시각장애인 점복은 그 장소와 형태를 바꾸어 시대에 적응하면서 이 땅 어디선가 계승, 발전해 나가리라고 믿는다. 실제 역학사 양성 교육을 수료해서 각지로 나가 점집을 차린 역학사들의 활발한 활동이 이미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역학사 자신이 생각하는 점(占)의 철학

점성촌의 역학사들을 인터뷰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한결 같은 대답이었다. 그것은 점성촌 역학사들의 인생철학과도 같은 것일 텐데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점이란 결국 주어진 미래를 가능한 행복하게 만들어 가기 위한 것. 따라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이 지당하고 단순한 말에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것 말고 뭐 더 중요한 것이 있을 건가 싶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 나 앞에 놓인 ‘미아리고개’가 아닐까?

“점은 인생상담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역학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불행한 데서 행복의 길을 찾아주느냐가 중요한 역할이죠. 올바른 지도. 이것이 목적이에요.” (홍수성, 76세, 홍수성작명소)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역학 중심으로 보더라도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낙천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게 중요해요. 좌절하는 손님에게 용기를 주고, 절망하는 손님에게 희망을 주는 게 중요합니다. 무조건 부정적인 이야기만 해주면 안 되거든요. 이런 단점이 있지만 한편으론 이런 좋은 점이 있으니까 희망을 갖고 극복해 나가라고 이야기해줘요.” (윤병관, 61세, 늘푸른철학관)

  • 동양철학관 ⓒ백외준

    동양철학관 ⓒ백외준

마지막으로 소개해 두고 싶은 에피소드 하나. 동양철학관 이회택 역학사님에게 여쭌 “선생님을 위해 스스로 점을 보신 적은 있습니까?”라는 다소 안이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들려주신 이야기이다.

“내 점은 내가 안 치고 서로 친구 간에 점괘를 내달라고 하지요. 가까운 사이, 가족에 대해서는 자기가 안 치고 쳐달라고 하고 그랬지. 옛날에 딸이 자꾸 점을 쳐달라고 해서… 친정 아버지한테 와서 점을 쳐달라고 하니까 농담 삼아서 그러면 돈 내라고 했지. 그러니까 딸이 돈 대신 비녀를 빼놓고 이걸 낼 테니 아버지 보고 쳐 주라는 거야. 점 복(卜), 비녀 채(釵). 그래서 복채라고 합니다.” (이회택, 72세, 동양철학관) 생각할수록 화기애애한 방안 풍경이 떠올려져 마음 따뜻해지는 그런 이야기였다. 한 방에 아버지와 딸이 마주앉아, 딸이 내놓은 비녀는 점상(占床) 한켠으로 밀어놓은 채, 너무나도 잘 알아서 다시 물을 필요도 없는 딸의 사주를 짚어가며 아버지가 차근차근 점괘를 뽑는 광경. 뒤이어 딸의 점괘를 화제 삼아 부녀가 주거니 받거니 묵은 이야기, 다가올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을 것을 생각하면 점이란 이렇게 예쁜 기술일 수 있구나 하고 웃음 짓게 된다. 손톱 같은 짬이나마 두 사람의 솔직한 이야기로 주어진 시간을 물들이는 기술.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점 고유의 멋과 매력은 이런 데 있지 않을까?

*미아리점성촌 역학사님들을 인터뷰할 때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 관계자들의 협조가 컸다. 김동성 관장님을 비롯하여 권오형 전 사무총장님, 김욱배 사무국장님, 홍윤희 복지과장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점성촌의 역학사들과 귀한 인터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분들의 적극적인 주선 덕분이었다. 또 이분들과의 대화 가운데 역학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큰 행운이었다. 모든 분들께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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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백외준
백외준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살고 있다. 2013년부터 성북문화원 향토사 연구팀에서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미아리고개』, 『성북동- 만남의 역사와 꿈의 공간』등 성북구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책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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