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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기 위한 고독

나를, 외로운 누군가를 이해하는 시간

노태맹

2018-09-10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지금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새벽의 고요 속에 앉아있다. ‘나의 고독한 시간’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가을의 시간이다. 시를 쓰기 위해 앉아 있을 때면 그 고독은 더 깊은 막막함으로 변해 버리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이 고독이라는 말을 근래 사용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헤르만 헤세와 릴케를 읽던 사춘기의 그 달콤 쌉쌀한 고독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고독, 정치적이고 낭만적인


이제는 고독이라는 말보다는 외로움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게 된 것 같다. 사실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의 의미는 뒤섞인 채 쓰이고 있다. 가령 ‘고독사’라는 표현처럼 고독은 외로움이라는 뜻에 더 가깝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용어는 그 쓰임에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정신의 삶-사유》에서 고독은 외로움(고립)과 구분된다고 말한다. ‘내가 나 자신과 교제하는 실존적 상태’를 고독이라고 한다면, 고독과 마찬가지로 홀로 있으나 ‘인간 집단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도 버림받는 상태’는 외로움(고립)이라는 것이다. 외로움이란 “달리 표현하면 나 혼자이며 동료가 없는 상태”이다. 아렌트의 이러한 생각은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복수(複數)로서만 존재한다는 것, ‘인격들 혹은 독특성들로 구성된 다원성이 인간의 조건 그 자체를 구성한다’는 그녀의 기본 사유로부터 나온 것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 철학자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Bernd Schwabe in Hannover


그 외로움(고립)의 상태를 지양하기 위한 길이 아렌트 정치 철학의 주된 방향이라면, 그 길을 가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사유의 시간으로서 고독은 행위(action)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외로움이 고독사처럼 지양되어야 할 사회학적, 정치학적 대상이라면 ‘내가 나 자신과 교제하는 실존적 상태인 고독’은 과연 어떠한 상태를 표상하는 일까? 가령 ‘인간은 사회에서 사물을 배울 수는 있을 것이지만 영감은 오직 고독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괴테처럼 혹은 고독을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懷柔)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木管樂器)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로 표현한 김현승의 「견고한 고독」이라는 시처럼 고독은 세계의 비밀을 캐는 양식인 것일까? 아렌트의 고독은 이러한 낭만적 사고와 거리가 조금은 멀어 보이지만, 이 영감을 주는 ‘견고한 고독’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고독한, 고독할 주체는 누구인가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자신의 책 《참된 종교》에서 아주 유명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바깥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너 자신 안으로 돌아와라. 인간 내부에 진리가 머무르고 있으므로.

(Noli foras ire, in te ipsum redi : in interiore homine habitat veritas)”


다시 말해 우리 안에 신과 그 신의 양태들로서의 진리가 현존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머물러야 하고 고독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의 낭만주의는 바로 이러한 종교적 신비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신이 사라진, 신을 잃어버린 지금의 우리에게 고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사실 아렌트가 고독을 ‘내가 나 자신과 교제하는 실존적 상태’라고 말했을 때 이 정의는 실존주의적 정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존주의란 나 자신과 관계하면서 그 관계를 통해 세계와 관계하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고독은 주체 형성의 요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존주의적 관점이 가진 주체 이론과 ‘고독’은 이제 지배적 정치의 장치와 이데올로기로 변형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마르크스로 우회해 보도록 하겠다.


‘고독한’ 혹은 ‘고독할’ 주체는 어떠한 주체일까? 마르크스는 1845년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6번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적 본질은 독특한 개별 개체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그 유효한 현실에서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 

그러므로 본질은 유(類)로서만, 내적이고 침묵하며 많은 수의 개체들을 자연적인 방식으로 연결시키는 보편성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독일의 역사학자, 사회철학자 칼 마르크스 (Karl Marx)

▲ 독일의 역사학자, 사회철학자 칼 마르크스 (Karl Marx)


많이 들어왔고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 같지만 이 테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는 말을 우리는 대부분 ‘그러므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윤리적 관점에서 이해해왔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생각은 인간의 본질-존재는 오직 관계들 사이의 활동(프락시스)을 통해서만 규정된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만났을 때 그를 돕는 것은 한 주체에서 다른 주체로의 역량의 이전이 아니라 나(우리) 스스로의 역량의 보충이자 고양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가 오해되어 전체주의적이거나 종말 신학적으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 관계 속에는 항상 차이들, 변형들, 모순들, 갈등들이 내포되어 있고 그것들이 오히려 관계들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생각을 좀 더 확장한 철학자로 시몽동(1924-1989)을 얘기하려 한다. 그의 '관계의 존재론'에서 우리가 주목할 개념은 관개체성(transindividual) 개념이다. 나는 이것을 개체들 사이를 수평적으로 횡단하면서 그를 통해 스스로의 주체를 구성하는, 생성으로서의 주체 개념으로 표상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나라는 존재가 나타난 것은 일정한 에너지 준위를 가진 분자들의 우연한 그러나 특이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고, 하나의 육체를 이룬 나는 무한히 많은 만남과 역사적 우연을 통해 구성되었다는 것, 그 만남은 또 다른 에너지 준위를 형성하면서 또 다른 생성을 이루어나간다는 것. 그 과정 전체가 나라는 주체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관계는 나라는 존재자를 발생시키면서 또한 그 존재자 안에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독과 상관없어 보이는 주체 발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의아스럽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몽동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공부해서 쉽게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다만 고독에 대해 생각하면서 마르크스의 유적 존재론과 시몽동의 관개체성에 대해 언급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고독한’ 그리고 ‘고독할’ 주체는 데카르트적인 자기 동일적 주체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내 속의 아픈 누군가의 소리를 듣는 일


우리는 아직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고독한 주체의 사유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도 말했지만 ‘우주적’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와 사랑하고, 갈등하고, 절망하고, 탐닉하고, 반성하는 사회와 역사 속에 있다. 조심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이 사회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길고 긴 수도와 기도의 시간을 저 멀리 날려버리고도 남는 그 어처구니없음은 우리가 사회적 역사적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가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독은 나와 외로운 ‘누군가’를 이해하는 시간

▲ 고독은 나와 외로운 ‘누군가’를 이해하는 시간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씩은 고독해야 한다. 우리가 잠을 자면서 하루 동안의 일들을 뇌가 정리하듯이, 너무나 많은 관계들에서 가끔씩은 한 발짝 물러서 그 관계들이 나에게 새겨놓은 흔적들을 바라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독은 나를 이해하는 일인 동시에 ‘외로운’ 누군가를 이해하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 때 읽은 책 중에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기도란 내가 하느님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아픈 누군가를 기억하라는 말을 듣는 것이라고 이해했었다. 그렇게, 고독도 바로 내 속의 아픈 누군가의 소리를 듣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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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노태맹
노태맹

본업은 시인이라고 스스로 말하지만 시를 자주 쓰지는 않는다. 시는 시 이전이므로... 어쩌다가 영남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여 시골의 요양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또 어쩌다가 계명대학교와 경북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스피노자주의자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정작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 모른다. 팔리지 않은 시집만 세 권 냈다. 『유리에 가서 불탄다』 『푸른 염소를 부르다』 『벽암록을 불태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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