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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답변

갱위강국(更爲强國)을 선언한 백제 무령왕

- 이달의 답변 -

by 노중국 / 2022-02-09

인문 쟁점은?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인문학적 과제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깊은 사색, 허심탄회한 대화 등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더 깊은 고민을 나누고자 만든 코너입니다. 매월 국내 인문 분야 전문가 두 사람이 우리들이 한번쯤 짚어봐야 할 만한 인문적인 질문(고민)을 던지고 여기에 진지한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백제의 대왜 외교의 특징 중 하나는 왕족의 파견입니다. 왜를 끌어들여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왜에 왕족을 파견한 사실이 전해지는데, 바로 무령왕대의 일입니다. 무령왕은 마나군(麻那君)을 보냈다가 골족(骨族)인 사아군(斯我君)을 보냈습니다. 사아군의 아들이 법사군(法師君)인데 그는 후일 왜군(倭君)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발굴 50주년 맞은 세계문화유산 무령왕릉



무령왕 표준영정 (이미지 출처: 공주대 서정석 교수 제공)

무령왕 표준영정 (이미지 출처: 공주대 서정석 교수 제공)



질문한 바와 같이, 지난해(2021년)는 백제 무령왕(武寧王)이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다.(누파구려 갱위강국 累破句麗 更爲强國)”고 선언한 지 1,500년이 되는 해이며, 무령왕릉을 발굴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갱위강국(更爲强國) 선언은 당시 국제관계에서 무령왕이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 주며, 무령왕릉의 발굴은 백제 문화의 빼어남과 활발한 국제교류를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무령왕릉이 위치한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2015년 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하나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인이 자랑하고 아끼는 유산이 되었습니다.


무령왕은 백제 제25대 왕입니다. ‘무령’은 장례를 마친 후 올린 시호(諡號.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후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하는 호)이고, 이름은 ‘사마(斯麻)’입니다. 융(隆)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성년이 되었을 때 지은 이름으로 보입니다. 무령왕은 31명인 백제의 국왕 가운데 출생 연도와 즉위할 당시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왕 가운데 하나입니다. 462년에 출생하여, 40세인 501년에 즉위하였고, 62세 되던 해인 523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무령왕의 출생 연도를 알 수 있게 된 것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릉묘지석〉(이하 〈묘지석〉으로 지칭) 덕분이었습니다.



고구려 침입, 내부 반란, 임금 피살…, 위태롭던 5세기 백제



공산성 앞에 설치된 무령왕 동상 (이미지 출처: 공주대 서정석 교수 제공)

무령왕 동상 (이미지 출처: 공주대 서정석 교수 제공)



무령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5세기는 고구려가 위세를 떨친 격동기로, 백제로서는 정치・사회적으로 큰 어려움에 당면한 시기였습니다. 독자들도 잘 알듯이, 무령왕이 즉위하기 26년 전인 475년 고구려 20대 임금인 장수왕(재위: 413~490년)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왕도(王都, 왕이 머무는 궁궐이 있는 도시) 한성(하남 위례성)을 함락하고 백제 개로왕(백제 제21대 왕, 재위: 455~475년)을 붙잡아 죽이고 남녀 8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갔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는 거의 멸망과 같은 상황에 처하였습니다, 이때 개로왕의 동생인 문주(백제 제22대 왕, 재위: 475∼477년)가 신라에 가서 1만의 구원군을 얻어 왔지만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습니다. 이에 문주가 바로 왕위에 오른 후 황급히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이때 무령왕의 나이는 14세였는데, 난리 통에 용케 살아남아 웅진으로 내려온 모양입니다.


웅진 천도 후 문주왕은 해구(解仇)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자신의 동생인 곤지를 왜에서 불러들여 내신좌평을 맡겨 정치의 안정을 도모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실의 권위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상황이라 이후의 정국은 병관좌평 해구의 전횡으로 어지럽혀졌습니다. 해구는 곤지를 제거한 후 실권을 휘두르다가 문주왕을 시해하고 13세의 어린 삼근왕(백제 제23대 왕, 재위: 477~479년)을 세워 군국정사(軍國政事)를 자기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해구는 마침내 자신이 왕위에 오를 욕심으로 반란까지 일으켰는데 다행히 덕솔 진로가 이를 진압하였습니다. 진로는 삼근왕이 재위 3년 만에 죽자 왜에서 출생하여 생활하고 있던 말다(末多)를 옹립하였습니다. 말다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재위: 479∼501년)으로, 개로왕과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입니다.


동성왕은 금강 유역의 신진세력들을 등용하여 한성에서 내려온 구(舊) 귀족들과의 세력 균형을 갖추어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사씨, 백씨, 연씨 등이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또 고구려의 방해로 중단되었던 남제(중국 남북조 시기 남조의 두 번째 왕조)와의 통교를 재개하고, 신라에 청혼하여1) 고구려의 공격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성왕은 재위 후반에 이르러 정치를 파행으로 이끌었습니다. 기근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자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휼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이를 거절하고 더 이상 간언하지 못하도록 궁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임류각(충남 공주 공산성에 있는 누각)을 지어 기이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심어 즐기기까지 했습니다.

1) 동성왕이 재위 15년(493년)에 신라에 청혼하자 신라는 이찬(혹은 이벌찬) 비지의 딸을 동성왕에게 시집보냈습니다. 당시 신라왕인 소지왕이 30대 초반이었으므로 결혼 적령기에 이른 왕녀가 없어 비지의 딸을 시집보낸 것으로 여겨집니다. 비지는 아마도 왕족일 것입니다.



가림성 전경 (이미지 출처: 공주대 서정석 교수 제공)

가림성 전경 (이미지 출처: 공주대 서정석 교수 제공)



이후 동성왕은 비대해진 신진세력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신진세력의 대표격이면서 13년 동안 왕궁을 지키는 위사좌평의 직에 있던 백가를 새로 축조한 가림성(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성)의 성주로 내보냈습니다. 동성왕의 이러한 조치는 백가와 그를 추종하던 세력들의 불만을 키운 셈이 되었습니다. 백가는 동성왕이 사비 부근에서 사냥하다가 눈 때문에 귀경하지 못하고 마포촌에 머문 상황을 엿보다가 자객을 보내 찌르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문주왕의 피살, 백가의 전횡, 동성왕의 폭정과 피살 등은 장수왕의 한성 함락으로 비롯된 백제 웅진 시기 전기의 정치적 불안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무령왕의 등장, 정치와 민생 안정, 고구려도 격파!!



칼부림을 당한 동성왕은 한 달 뒤에 죽고, 이 글의 주인공인 무령왕이 마침내 왕위에 오릅니다.(501년) 당시 동성왕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백제 지배층 내에 심각한 경쟁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무령왕이 40세의 연륜이 있고 인자한 성품을 가진 것이 장점으로 부각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즉위 후 무령왕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반란을 일으킨 백가를 진압하였습니다. 이로써 무령왕은 즉위의 정당성도 확보하고 군사권도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무령왕은 농토를 떠나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을 귀농시켜 민생을 안정시키고, 제방을 튼튼하게 하는 등 농업 생산력을 높여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습니다. 섬진강 유역과 광양만, 순천만 일대를 영역으로 편입하여 경제 기반을 확충하였습니다. 한편 지방 통치조직인 담로에 왕족들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습니다. 유학 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우고 오경박사를 두어 유교 정치이념을 강화하고, 겸익을 인도 중부지방에 보내 계율을 배워오게 하여2) 불교 교단을 정비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대외 외교면에서는 중국 양나라(중국 남북조 시기 남조의 세 번째 왕조)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또한 한성을 함락당한 후 처음으로 고구려를 선제공격하여 그동안의 수세적인 입장에서 공세적인 입장으로 전환하였습니다. 특히 512년의 위천 전투에서는 친히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고구려군을 대파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2) 인터넷의 백과사전류에서는 겸익이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 4년(526년)에 인도로 갔다는 설명이 많습니다만 학계 내에서는 여러 설이 공존합니다. 필자는 겸익이 무령왕 21년(521년)에 인도로 가서 5년을 머물렀다가 성왕 4년(526년)에 귀국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521년(무령왕 21년)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한 것은 이러한 정치와 민생의 안정, 고구려군 격파 등으로 얻은 자신감이 바탕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맞추어 양 무제는 무령왕에게 영동대장군(2품)의 작호를 주었습니다. 이는 한 해 전에 고구려 안장왕(재위: 519~531년)에게 수여한 영동장군(3품)보다 품계가 높은 것으로, 이를 통해 당시 무령왕의 국제적 위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위상의 고양은 무령왕의 주변국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520년대에 만들어진 〈양직공도〉에 의하면, 백제가 사라(신라)와 반파(가라국: 고령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연맹체의 여러 나라들을 ‘소국’으로 부르고 부용국(附庸國)으로 취급한 것이 확인됩니다. ‘부용국’은 나라가 작아 천자(天子)를 직접 뵙지 못할 경우 주변의 큰 나라를 통해 천자를 뵙는 것을 말하므로, 백제 자신은 그에 비해 대국이라는 의미지요. 실제로 521년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년)이 양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백제 사신의 뱃길 안내와 통역의 도움을 받은 것이 확인되고, 479년 가라국왕 하지가 남제에 사신을 보낼 때도 백제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므로, 무령왕이 신라와 가야의 여러 나라를 부용국으로 간주한 것이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닙니다.



빼어난 고고학적 가치, 동아시아 유일의 무령왕릉



왕릉원 전경(좌)과 밖에서 안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무령왕릉 모습(우) (이미지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왕릉원 전경(좌)과 밖에서 안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무령왕릉 모습(우) (이미지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이러한 역사적 의의뿐 아니라, 무령왕은 우리나라 고고학에서도 첫손으로 꼽는 역사 인물입니다. 1971년 7월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옛 명칭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었기 때문이지요. 무령왕릉은 유물이 도굴되지 않아 고대 동아시아 제왕의 무덤 가운데 무덤의 주인공, 무덤의 축조 연대, 무덤의 내부 구조 등을 온전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입니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에서 하룻밤 만에 이루어진 발굴이어서 많은 아쉬움이 남지만 전돌(塼石: 예전에 왕궁, 사찰, 왕릉 따위의 벽이나 바닥을 장식하는 데 쓰던 벽돌, 출처: 표준국어대사전)로 이루어진 내부구조와 출토된 5,200여 점(발굴 초기에는 2,500여 점으로 발표됨)의 유물은 무령왕대의 백제의 역사・문화와 공예・기술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용문금동환두대도, 환두, 세부 동탁은잔 (이미지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왼쪽부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용문금동환두대도, 환두, 세부 동탁은잔 (이미지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유물 가운데 압권은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이라는 문구 등이 적힌 〈묘지석〉이었습니다. 한국고대의 능묘 가운데 묘지석이 나온 최초 사례입니다. 이 무덤은 중국식 전축분 형식이고, 중국제 유물도 많아 묘지석이 없었다면 무덤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둘러싸고 혼란이 빚어질 수도 있는데, 이 묘지석이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임을 분명히 해 주었습니다.



묘지석 통해 무령왕 확인, 계보 연구도 가능



무령왕(좌) 및 왕비(우) 지석 (이미지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령왕(좌) 및 왕비(우) 지석 (이미지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묘지석〉에는 무령왕과 왕비의 사망일, 왕의 나이가 기재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무령왕의 출생 연도를 확인할 수 있게 되어 무령왕의 계보를 좀 더 자세하게 연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령왕의 계보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서술되어 있어 이를 따르면 개로왕의 손자가 되는 셈인데,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처럼 서술되어 있어 차이가 있습니다. 〈묘지석〉의 내용을 통해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연장자였음을 알 수 있게 되어 『삼국사기』의 계보에 착오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지요. 또한 〈묘지석〉을 통해 장례 기간이 27개월이었다는 점, 무덤 공간을 지하세계의 신들로 사서 매매 문서를 만들었다는 점, 백제에서 왕의 죽음을 ‘붕(崩)’이라 한 점 등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 임진년작 명문 전돌 (이미지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사 임진년작 명문 전돌 (이미지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그밖에 연도 막음돌인 전돌의 “…사 임진년작(…士 壬辰年作)” 명문(銘文: 금석(金石)이나 기명(器皿) 따위에 새겨 놓은 글, 출처:표준국어대사전)을 통해 이 전돌이 임진년인 512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고, 무령왕 20년(520년)인 경자년에 만들어진 은제 팔찌의 “경자년다리작대부인분이백삽주이(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卅主耳)” 명문을 통해 백제에서 왕비를 ‘대부인(大夫人)’으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묘지석〉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무령왕의 작호를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이라 하면서 무령왕의 죽음을 ‘붕(崩)’이라 한 사실입니다. 앞서 소개했듯이, 대장군호와 왕호는 521년 양나라 무제가 무령왕에게 내려 준 작호로, 이는 무령왕이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제후적인 존재였음을 보여 주는 셈입니다. 그런데, ‘붕(崩)’은 황제의 죽음을 나타내는 용어이므로(제후의 죽음은 ‘훙(薨)’이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왕’과 ‘붕’은 함께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백제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묘지석〉에 ‘붕’이라고 표현한 것은 무령왕이 중국 왕조와의 외교관계에서는 제후적인 입장을 취하였지만 내적으로는 황제와 같은 존재로 군림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를 학술적으로는 ‘외왕내제(外王內帝) 표방’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천하관(天下觀)은 백제 말기까지 이어졌습니다.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영기〉에서 무왕(백제 제30대 왕, 재위: 600~641년)을 ‘대왕폐하(大王陛下)’로 부른 사실이 확인됩니다.



무령왕릉 벽감과 중국제 청자 등잔 (이미지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령왕릉 벽감과 중국제 청자 등잔 (이미지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령왕릉 출토 유물 가운데 90여 매의 철제 오수전과 도자기는 중국제입니다. 도자기의 기종은 청자연판문육이호 2점, 흑유사이반구병 1점, 청자 잔 6점 등 9점입니다. 철제오수전은 무령왕이 붕(崩)한 해인 523년 12월에 양나라에서 만들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이듬해인 524년 양 무제는 성왕(백제 제26대 왕, 재위: 523~554년)을 ‘수동장군백제왕(綏東將軍百濟王)’으로 책봉하였는데, 아마도 이때 양나라에서 온 사절이 가져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책봉사는 조문사(弔問使)를 겸하였을 가능성이 큰데, 그렇다면 이 오수전과 중국제 도자기는 무령왕 장례의 부의품(賻儀品)일 것입니다.



복원된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 (이미지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복원된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 (이미지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령왕릉에서는 신라산 물품이나 가야산 물품은 하나도 없고, 특이하게도 왜산(倭産)으로 추정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목관에 사용된 나무입니다. 발굴 20주년이 되는 1991년에 목관에 대한 수종 분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금송(金松)임이 밝혀져, 당시 학계는 물론 시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목재품에 대한 수종 분석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고대 자연 환경을 이해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무령왕보다 앞선 시기 백제의 주요 목관 재료는 주목(朱木)이었습니다.(하남 감일동 Ⅱ-②지점 3호 횡혈식석실분의 관재와 공주 수촌리 고분군 Ⅱ지구 4호분의 목곽부재) 주목은 결이 곱고 또 붉은 색이 잡귀를 쫓는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므로 백제인들이 시신을 감싸는 최상품의 관재(棺材)로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무령왕릉의 목관 재료의 수종을 분석해 본 결과 주목이 아니라 금송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후 부여 왕릉원과 익산 쌍릉 대왕묘의 목관의 재료도 금송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무령왕릉 이후 백제의 왕실의 무덤에 금송을 관재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족 파견 통해 왜와 우호적 관계, 무령왕 후손이 천왕 생모



『삼국사기』에서 삼국 통일 이전까지의 기사를 분석하면, 신라와 왜의 관계 기사가 총 45회로 많지만 왜가 신라를 침략한 사실이 29회나 되는 반면, 백제와 왜의 관계는 총 9회뿐이지만 모두 우호적인 내용입니다. 백제의 대왜 외교의 특징의 하나는 왕족의 파견입니다. 왕족 외교는 신라가 때로는 백제를 편들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고구려에 접근하는 등의 상황에서 왜를 끌어들여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삼국사기』는 아신왕(백제 제17대 왕, 재위: 392~405년)이 태자 전지를 왜에 파견하였고, 의자왕(백제 제31대 왕, 재위: 641~660)이 아들 풍장을 왜에 보낸 사실을 전합니다.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왜에 왕족을 파견한 사실이 전해지는데, 바로 무령왕대의 일입니다. 무령왕은 마나군(麻那君)을 보냈다가 골족(骨族)인 사아군(斯我君)을 보냈습니다. 사아군의 아들이 법사군(法師君)인데 그는 후일 왜군(倭君)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아키히토 천황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의 아키히토 천황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2001년 12월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천황이 68세 생일을 맞이하여 “저 자신으로서는 캄무(환무, 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령왕은 일본과 관계가 깊었고, 이때 이래로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빙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라고 언급한 것은 이러한 백제의 왕족 외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가 왕족 외교의 일환으로 왜에 건너가서 그 후손인 화을계(和乙繼)의 딸 신립(新笠, ?~789년)이 광인(光仁) 천황(재위: 770~781년)의 비(妃)가 되어 환무 천황(재위: 782~806년)을 낳은 것입니다. 이는 『속일본기』 연력 9년(790년)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순타 태자의 후손이 왜에서 왕비를 배출하였다는 사실에서 순타 태자의 가문이 왜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에 자리잡은 백제계 가문 가운데 왕실과 결혼한 것은 무령왕의 후손인 신립이 처음입니다. 신립의 아들 환무 천황은 수도를 평성경(平城京)에서 장강경(長岡京)으로 옮겼다가 다시 평안경(平安京)으로 옮겨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신찬성씨록』을 편찬하게 하여 씨성제를 정비하도록 하는 등의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보다 앞서 왜에 전해진 백제 문화는 일본 열도에서 크게 유행하여 일종의 ‘백제류’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2001년 12월 아키히토 천황의 발언은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가 몇 달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성공 개최를 기원하며 위와 같은 고대의 백제와 왜의 인적 교류와 왜국 내 백제 문화의 유행을 상기한 것입니다.



‘백제와 왜’ 관계 보며 한일 갈등 해소 교훈을


오늘날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냉랭한 분위기가 강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역사적 경험에서 교훈을 찾는다면 고대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삼국 가운데 백제는 일본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한반도 내에서 삼국 사이의 세력 균형이라는 역학(力學) 관계가 작용하였습니다. 백제는 남진의 압력을 가해오는 고구려와 힘을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바다 건너 왜의 군사적 지원도 필요하였습니다. 한편 이 시기 왜는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백제는 이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해 주었습니다. 그 범위는 학술, 제도, 종교, 기술, 생활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습니다. 이에 백제는 필요할 때 왜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왜가 이에 응했습니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오늘날 한일 간 갈등을 해소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공주대학교 서정석 교수, 경북대학교 윤용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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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중국 사학자 사진
노중국

사학자,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계명대학교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고대사학회 1~4대 회장, 백제학회 회장, 문화재 위원회 사적분과위원장,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위원, 백제역사 유적지구 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위원장 등 역임. 저서로는 『백제정치사연구』(1988), 『백제 부흥운동사』(2003), 『백제사회사상사』(2010),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2012), 『역주 삼국사기 Ⅰ·Ⅱ·Ⅲ·Ⅳ·Ⅴ』(공역주, 2012), 『대가야의 정신세계』(공저, 2009), 『한국고대의 수전농업과 수리시설』(공저, 2010)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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