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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소셜클럽 : 광장 실종

신기주

2016-10-25

[10월의 테마]
광장

사회 360소셜클럽 광장실종


광장 실종


난생처음 광장을 목격했다. 2002년 6월 4일이었다. 한일 월드컵이 개막했다. 부산 아시아드에선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첫 번째 경기가 열렸다. 대 폴란드전이었다. 시청 앞과 광화문 일대에서 시민들이 거리 응원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데스크에서 응원전 현장을 취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지금이야 붉은 악마라는 이름이 익숙하지만, 당시만 해도 축구 문외한들한텐 낯선 호칭이었다. 응원 열기가 얼마나 뜨거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아직 역대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상태였다. 승리를 맛본 적이 없었단 얘기다. 기대 반 우려 반 응원 현장으로 향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붉은 인파들이 시청 앞에서 청계광장까지를 가득 메웠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한국에서 처음 열린 월드컵이라지만, 이 정도까지 군중들이 몰려들 줄은 몰랐다. 열광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긴장한 탓인지 초반전에선 기선 제압을 당하는 듯하던 대표팀은 전반 26분에 뜻밖에도 선제골을 터뜨렸다. 이을용의 왼쪽 크로스를 황선홍이 왼발슛으로 성공시켰다. 황선홍의 선제골 덕분에 대표팀의 긴장은 완전히 풀렸다. 동시에 광장의 응원 분위기도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양 팀이 공중볼을 다툴 때마다 광장 전체가 들썩거렸다. 당시 동아일보 사옥 옥상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다. 경기가 계속되고 광화문광장 전체가 붉은 인파로 가득 메워지고 끝내 한 덩어리가 돼서 들썩이는 과정을 명명백백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수만 명이 한 덩어리처럼 넘실거렸다. 원래는 인도와 도로와 건물로 구분된 개별적인 광장이었던 시청광장과 청계광장과 광화문광장이 넘쳐나는 인파로 하나의 거대한 광장이 돼가는 걸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후반 8분이었다. 유상철의 중거리 슈팅이 날벼락처럼 폴란드의 골망을 갈랐다. 쐐기골이었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사상 최초 월드컵 첫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응원전은 더욱 뜨거워졌다. 응원의 열기가 대표팀의 수비력을 강화해주기라도 하는 듯 모두 고래고래 “대한민국”을 외쳐댔다. 홍명보가 주축이 된 대표팀의 수비진용은 붉은 악마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광장은 붉은 물결로 끊임없이 너울댔다

 

광장에서 월드컵 응원 중인 붉은악마들

 

이때의 경험은 모두에게 결코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다. 단지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첫 승리를 해서가 아니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신나게 뛰어놀아서도 아니었다. 원래는 모두가 개별적인 단독자들이었다. 대다수가 초중고교를 다녔고 그렇게 집단과 무리에 섞여봤다지만 본질적으론 개개인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학창 시절은 기본적으론 입시 경쟁 체제다. 친구인 동시에 경쟁자다. 우정을 나눠도 점수로 갈린다. 대학에 입학하고 사회에 나오면 더하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한국 사회를 개인화시켜왔다.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1990년대 한국 사회에선 그런 개인화의 흐름이 더욱 가속화됐다. 개개인도 집단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유교적 농경사회의 가족집단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개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독립이던 시절이 있었다. 정치적 이념 사회를 강요하는 또래 집단에서 벗어나 취향과 자아에 집중하는 개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자유이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새 집단에서 개성을 쟁취하는 것이야말로 개인의 최대치가 됐다.

 

그런데 2002년 월드컵은 이런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외환위기를 거치며 빠르게 파편화돼가던 개인들은 처음으로 뜨거운 광장을 경험했다. 군중이 되고 집단이 되고 하나가 되는 체험을 했다. 이제까지였다면 이런 집단성을 거부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정반대였다. 광장에 모여서 하나가 되는 경험은 매력적인 집단체험이었다. 개인들은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 연결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개인이었을 때보다 더 거대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개인이었을 땐 몰랐던 군중의 스펙터클을 자각했다. 그저 휴일 산책을 나오는 공간 정도로 여겨졌던 광장은 어느새 다시 모이고 싶은 공간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개인들은 틈만 나면 광장에 모일 기회만을 기다렸다.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만 기다리기엔 감칠맛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다양한 이벤트가 있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어김없이 광장에 모였고, 그들이 하나라는 걸 자각하고 돌아갔다. 소재가 정치적 이슈였든 스포츠 이벤트였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서로 연결돼 있으며 하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스펙터클한 짜릿함이었다. 당시엔 마침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초고속 인터넷이 깔리던 시기였다. 인터넷은 외환 위기 이후 흩어져가던 개인을 더 긴밀하게 연결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연결된 개인이 물리적인 공간에서 함께라는 걸 자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광장이었다. 광장은 그 자체로는 그저 넓은 공터일 뿐이다. 이미 서로 연결된 개인이 광장에서 만났을 때 광장은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공론장이 된다. 서로 무관한 개인이 모여들면 그건 한강공원에 불과하다. 서로에게 무심한 채 산책하고 캠핑할 뿐이다. 이런 광장을 온라인에서 구현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다음 아고라였다. 그것은 거대한 인터넷 광장이었다. 아고라에선 온갖 연결들이 발생했다 사라졌다. 1대 1 메신저 정도에 머물러 있던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은 아고라를 통해 광장적 소통으로 확대됐다. 온라인 광장이 오프라인 광장을 닮고 다시 오프라인 광장이 온라인 광장을 모방하는 광장의 순환 구조였다.

 

2002년은 다시 오지 않는다. 14년이 지난 지금 모두가 하는 말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4강에 들었다. 지금의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다시 입성하기란 히딩크가 다시 온다고 해도 하늘의 별 따기다. 2002년처럼 개인들이 광장에 모여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확인하기란 더 어려워졌다. 물리적 광장이 사라져서가 아니다. 서울시청광장은 건재하다. 다만 광장의 연결성이 더욱 미약해지고 연결의 맥락이 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2012년 10월 4일이었다.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싸이는 한국 팬들을 위해 서울시청광장에서 특별 공연을 마련했다. <강남스타일> 서울시청광장 공연은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공연을 취재 겸 구경 갔다. 10년 전 월드컵 응원전과 같은 광장이었다. 그러나 월드컵 응원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모두가 스마트폰으로 싸이의 공연을 촬영하고 있었다. 갖가지 SNS에 자신만의 공연 장면을 동영상으로든 사진으로든 전송하면서 친구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공연 내내 개인들의 스마트폰 촬영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싸이의 말춤이 시작됐다. 모두 말춤을 추면서도 SNS 활동은 멈추지를 않았다.

 

광장의 풍경이 10년 전과 다르게 느껴진 이유를 깨달았다. 모두 오프라인 광장에 함께 있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각자 온라인에 개별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마치 내가 감기 걸렸단 사실을 직장 동료보다 지구 반대편의 페이스북 친구가 먼저 아는 것처럼 물리적 공간과 실제 네트워크는 완벽하게 이분화된 상태였다. 개인들은 광장에 모여서 싸이의 공연을 즐기고 있었지만, 그들은 결국 따로따로였다. 그들은 옆자리에서 함께 뛰어노는 사람들과 연결된 게 아니라 스마트폰을 통해 자신의 트위터에 연결된 사람들과 연결돼 있었다. 광장은 더는 한 덩어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단독자의 점조직일 뿐이었다. 2002년 월드컵광장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2002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뜻을 이해했다. 2002년의 광장은 사라졌다. 2012년의 광장은 더는 개인들에게 하나가 되는 경험을 제공해주는 공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개인들은 그런 연결이 더 이상 필요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다. SNS를 통하면 이미 개인들이 서로와 연결돼 있다는 경험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이 연결되고 싶은 특정한 사람들하고만 말이다. 불특정 다수와 마주해야 하는 광장보다 더 안전한 연결이었다. 2002년의 인터넷이 무한 연결을 추구했다면 2012년의 SNS는 제한된 연결성을 추구한다. 불특정 다수의 개방적 네트워크는 결국 광장을 만들고 리더를 낳는다. 제한된 연결성을 추구하는 폐쇄적 네트워크에선 광장은 생겨나지 않는다. 단지 수많은 인맥의 연쇄만 있을 뿐이다. 자신의 인맥 안에선 자신이 주인공이다. 단지 상대방한텐 주인공이 아닐 뿐이다. 그렇게 모두 자기만의 세계에서 혼자만의 주인공으로 살게 된다.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인정하는 정치가 이뤄질 리가 없다. 그렇게 광장이 사라지고 정치가 사라진다.

 

뉴욕의 하이라인을 걸었다. 하이라인은 뉴욕 맨해튼의 미트패킹 지역부터 허드슨 강가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산책로다. 하이라인의 시작점에는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휘트니 미술관과 삼성837이라고 불리는 삼성전자의 마케팅 센터와 뉴욕의 명소로 꼽히는 스탠다드 호텔이 있다. 이른바 뉴욕의 새로운 핫플레이스다. 하이라인은 원래 정육공장들에서 생산하는 육류제품들을 항구까지 실어나르는 철길이었다. 이 철길을 새롭게 단장해서 공원으로 만들었다.

 

뉴욕의 하이라인

 

하이라인은 도시 재생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하이라인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가 않았다. 역시나 대규모 고층빌딩 개발 계획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하이라인과 친구들이라는 시민 단체가 앞장서서 무분별한 대규모 개발을 막았다. 대신 하이라인을 시민들 누구나 오갈 수 있는 광장으로 만들어서 도시에 돌려줬다. 하이라인을 걸어가면서 문득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광장의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란 하이라인 광장엔 진출입로가 없다. 1.45마일이나 이어지는 철길의 시작점과 끝점이 있긴 하지만, 걷기 좋아하는 관광객이 아니라면 이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 일은 드물다. 언제든 들어왔다가 나갈 수 있다. 당연히 중심점도 없다. 하이라인 중간중간에 몇몇 쉼터가 있긴 하지만, 많은 사람이 몰려 있을 만큼 크진 않다. 하이라인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흘러다닐 뿐이다. 서로 마주치지만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서로를 보고 슬쩍 눈인사를 하거나 뉴요커답게 인사를 나눌 수도 있지만, 그뿐이다. 하이라인은 길의 모습을 한 광장이고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들지만 고여 있지 않고 흘러다닌다. 이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의 타임라인과 닮았다. 우리는 흘러가는 타임라인의 어디로든 진입할 수 있다. 개인들의 생활을 접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또 그렇게 스쳐 지나간다. 결코 어디에서도 멈춰 서 있지 않다. SNS 시대의 연결이란 모두가 모두와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SNS 시대의 광장 역시 마찬가지다. 모여드는 곳이 아니다. 서로 스쳐 지나가는 곳이다. 서로를 흘끔 쳐다보며 잠시 연결됐다가 흩어지기를 무수하게 반복하는 곳이다. 이제 하이라인은 타임스퀘어 광장을 능가하는 뉴욕의 명소가 됐다. 이른바 힙한 사람들은 타임스퀘어 광장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별 이벤트도 없는데 모두가 모여서 웅성거리는 광장보단 세련되게 서로서로 스쳐 지나가는 하이라인 같은 광장을 더 선호한다. 이 시대의 광장 말이다.

하이라인의 끄트머리엔 제이콥스 K. 자빗트라는 이름의 거대한 컨벤션 센터가 있다. 이곳은 뉴욕 모터쇼나 뉴욕 코믹콘 같은 큰 행사가 열리는 대규모 컨벤션 센터다. 거대한 실내 광장이지만 행사가 없을 땐 굳게 닫혀 있어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다. 한때 이 컨벤션 센터 건설 계획이 뉴욕 맨해튼 재개발의 뜨거운 감자였던 적이 있었다. 좌초돼 가던 이 지역 개발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던 인물이 바로 도널드 트럼프다. 트럼프는 이 개발 계획을 통해 부동산 개발 업자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모두를 스쳐 지나가는 하이라인 광장의 끄트머리에서 트럼프의 이름을 발견했다. 우연이었다. 그리고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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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신기주
신기주

(기자)「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대중매체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통섭적인 기사를 쓰고 있다. O tvN <비밀독서단>에 출연 중이며 「시사IN」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는 왜』 『장기보수시대』 『사라진 실패』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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