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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1에관한 모든것 : 오늘도 또 시작하기

김진석

2015-11-26

1에 관한 모든것 

오늘도 또 시작하기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이 있다. 아이러니 또는 역설에 대부분 해당하겠지만, 어린 아이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도 어느 정도 삶을 살아본 나이에 접어들어야, 시작하는 일이 간단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에서 시작은 ‘그냥 시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그냥 시작하기만 하면 반이라는 말은 아니다. 어렵거나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그래도 시작을 하면 그냥 시작한 것 이상이라는, 또는 어쨌든 일단 시작했으면 그냥 시작한 것 이상으로 멀리 간 것이라는, 제법 복잡한 사정이 거기 담겨있는 셈이다. “우선, 시작이라도 해야지” 같은 단순한 표현에서도 그 상황의 복잡함이 묻어난다.

 

‘우선 시작이라도 해야’하는 상황에서, 그러므로 시작은 그냥 시작하지 않는다. 시작은 그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는 일종의 철저한 진공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시작하기 전에도 사람이든 생명체가 살고 있었고, 그들이 왔다갔다 했었거나 이리저리 돌아다녔거나 이런저런 일을 한 것이고 심지어 이러저런 생각과 고민도 있었던 것이다. 다만 시작을 위한 ‘결정적인 한 방’, ‘결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시작이 첫 하나가 되고 첫째 사건의 형태를 띠기 위해서는 결정적 한 방이 필요하다. 이것은 참으로 심오하면서도 엉뚱하고 우스운 일이다.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오하면서도 엉뚱하고 우스운 일이다.

 

start up

 

따지고 보면, 그리고 조금 단순하게 말하면, 인간의 역사는 첫 번째로 시작하려는 움직임의 무게 및 그와 반대로 첫 번째로 시작되지 않은/못한 움직임 둘로 나뉠 수 있다. 만물을 만물 바깥에서 처음으로 만든 존재인 하나님은 이 첫 창조의 대표적 예다. 그러나 그는, 이라고 말하려고 하자마자, 벌써 문제가 꼬인다. 하나님은 정말 남성인 ‘그’였을까? 여자 이전에 무조건 남자였던 그는 벌써 또는 자동으로 남자로 존재하기 시작해야 했을까. 일반적으로 ‘그’는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먼저, 맨 먼저, 남자로 시작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창조는, 창조같은 시작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렇다고 하자. 조물주는 남자로 시작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남자 조물주는 또 어디서 태어났을까? 이 물음은 엉뚱하고 우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심오한 것이다. 첫 시작부터 꼬이고 꼬인다.

 

과거 신학과 철학을 괴롭혔던 물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첫째 원인’은 어디서 왔을까?, 라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그 물음 뒤에는 암묵적으로 그가 남자로 시작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었지만, 그렇게 추정하자마자 무릇 모든 남자는 여자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 그 추정을 끊임없이 괴롭힌다(통속적으로 이 혼란은 ‘닭이 먼저야? 계란이 먼저야?’라는 물음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엄격한 의미로 신으로서 하나님은 남자이면서도 인간 남자는 아니어야 했다. 어쨌든, 당연히 남자가 하나님이지 하는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로 존재했든, 또는 멋진 남자 행세를 하면서도 살짝 무성(無性)의 존재로 남아있든, 신은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사물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고 우선, 인간 역사를 처음 쓰기 시작하려던 사람들은 우선, 첫 가정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말 시작이 있었던가? 그 물음이 끊임없이 제기될만하다. 그러나 승자의 역사인 인간 역사는 다른 한편으로 누가 처음으로 말하고 누가 처음으로 만들고 누가 처음으로 발명하고 등등의 사건들로 빼곡히 쌓인다. 그렇게 ‘처음’의 물음은 ‘제일’(第一)의 물음으로 똘똘 뭉쳤다. 한 번 ‘제일’이 시작하자마자, 그것은 처음 시작한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처음으로 ‘최대’를 하고 처음으로 ‘최고’를 이룬 사건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최강’과 ‘최적’도 금방 거기 섞였다. ‘역사에서 처음으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등등의 말은 그런 배경을 가진다. 제일, 첫째는 금색으로 치장되어야 했다.

 

첫째 자리에 있는 존재가 최고이고 최강이자 최적이기 위해서는, 그가 우연적이지 않아야 했다. 우연히 그런 시작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우연히 그런 최고가 일어난 게 아니어야 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있던 존재는 ‘제일 원인’으로 승격되었고, 더 나아가 ‘제일 목적’으로 승화되었다. 애초에 이미 목적이 시작으로 주어져야 그 시작은 우연을 초월한 어떤 것이 될 수 있었다. ‘애초에 싹수가 있다’는 일반적인 믿음이 거기서 생긴다. 그 경우 목적은 그 자체로 이미 완성의 형태로 끝나기로 이미 시작되어 있었던 셈이다.

 

처음에는 심오한 듯 하다가도 곳곳에서 엉뚱하고도 우스운 이야기로 빠지거나 그 이야기와 겹치는 이 이야기는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목적(telos)이란 개념은 그 자체로 종말을 의미한다. 이것도 그냥 추상적 개념 차원에서만 진행된 이야기가 아니다. ‘처음부터 피(혈통, 가계 등)가 다르다’는 믿음이 거기 있었다. 또 과거에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비교적 삶을 완성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많은 나이는 잉여가 아니었다. 애초에 가졌던 목적을 이뤄야 삶은 완성되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관점이 뒤집힌 요즘에는 나이가 들면 잉여 존재의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

 

역사가 진행된 궤적을 살피면, 그런 첫째 사건이나 최고 또는 최적은 소수가 독점하는 체제에서는 실제로 가능하기도 했고 또 필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 소수가 다수에게 자리를 넘겨준 후에는 그 이야기는 진짜로 심오한 듯 하면서도 엉뚱하고 우스운 이야기가 된다. 이제 다수의 인간 또는 심지어 모든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인생을 시작하는 존재가 된다. 신과 왕 또는 어떤 노블레스(noblesse)로부터 지시와 명령을 받을 필요가 없이, 비슷비슷하게 자기 삶을 시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과거에 신(또는 감히 덧붙이자면, 철학자의 지혜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모든 인간)처럼 모든 것을 아는 존재만이 사물을 만들고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대는 영영 끝나버린다. 끝이야, 끝, 하나의 시작이 특권이었던 시대는 끝이야, 라는 웅성거림이 웅웅거린다.

 

이제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이 우선 그리고 홀로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 언제든지 자기가 첫째로 이야기(자신에 대해서든 타자에 대해서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최소한 말로는, 최소한, 원칙으로는 그렇다. 이제 모든 개인은 자신이 시작할 수 있고, 자신이 끝을 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는 자신이 최고이자 최대의 무게이다. 근대 이후는 다름 아닌 이 모델의 발전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 급격하게 거대한 이야기의 전환이 일어난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최소한 시작과 하나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역사는 그 정도로 엉뚱하고 우습기도 하다. 물론 그냥 엉뚱하고 우습기만 한 건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심오한 점도 거기 있다. 아주 소수에게만 처음과 최고가 같이 일어난 궤적이 인간에게 근사한 발전과 진보를 가져왔다면, 거꾸로 모든 사람이 자신에 맞게 자신이 시작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 것도 그 못지않은 발전과 진보였다. 근대에 계몽주의와 사회계약론이 등장해서 역사적 진보를 가져왔다는 것은 알만 한 사람은 다 안다. 그리고 그 계몽주의와 사회계약론의 핵심은 다름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각각 고유한 하나로서 존재하며, 그 하나로 시작하고 끝난다는 이론 혹은 사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계몽주의나 사회계약론은 더 살펴보면 모두 똑같은 하나가 아니다. 최소한 두 관점이 있다. 우선, 도덕적 보편성에 기대는 하나가 있다. 거기서는 모든 하나 하나의 사람이 보편적 도덕성과 권리를 가진다. 다르게 말하면, 원칙적으로 이 하나 하나의 인간들은 우연히 시작하지 않는다. 보편적 도덕성과 권리를 부여받은 개인들이 그저 우연히 시작하고 끝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전에 하나님에게 가졌던 권리가 원칙적으로 또는 잠재적으로 모든 개인들에게도 부여된다. 인간 하나 하나는 모두 같은 권리를 가지며 그것은 서로에게 양도할 수 없는 고귀한 권리라는 주장이 천둥처럼 시작한다. 두 번째 관점은, 이 하나들이 시작하고 끝나는 방식이 많건 적건 우연적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보편적 도덕성과 권리로 충만한 개인들 대신에, 서로 충돌하고 서로 깎아먹는 개인들이 있다. 서로 다르게 태어나고 서로 다른 곳에서 자라고 서로 다르게 끝나는 하나 하나의 개인들. 그러나 각자 고유한 자유와 각자 다른 능력을 각자의 방식으로 실현할 가능성을 실제로 가진 개인들.

 

우리가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두 관점의 묘한 결합체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 전자로 기울어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후자로 기울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에 그 둘을 엉뚱하고도 우습게 그러나 심오하게 뒤섞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 하나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두 관점은 쉽게 조화되지는 않는다. 하나는 아니다. 끊임없이 갈라지는가 하면 또 어느새 교차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때로는 하나의 관점에 기대다가 다른 순간에 다른 관점으로 이동한다. 변덕과 임기응변이 넘친다.

 

이처럼 시작과 하나의 관념이 결합된 주체의 존재가 꼭 필요한 걸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 제일가는 것일까? 한 사람이 푸른 하늘을 보고 웃을 때, 그리고 그 하늘에 새털구름이 떠있으면 더 좋을 때, 그는 꼭 주체인 건 아니다. 바람 소리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또 맑은 하늘에 둥근 달이 떴을 때, 그 분위기에 빠지는 일도 꼭 주체의 일은 아니다. 또 자기 자신보다 ‘너’ ‘당신’의 이름을 많이 부르고 싶을 때에도, 각자는 그냥 주체는 아니다. 또 자신의 말을 매일 갈고 닦았는데도, 또 아무리 갈고 닦아도, 세상에는 참으로 잡음과 아우성과 헛소리가 많구나, 라는 것을 느낄 때에도, 사람은 자신이 주체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또 알게 된다.

 

그런데 자신의 말을 매일 갈고 닦으려면, 그러려면, 또 그랬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충분히 그렇게 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은 언제 시작하는 것일까? 벌써 시작한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일까? 그 날을 다 살고, 아 오늘 하루가 지나갔구나, 말하는 날은 언제일까? 오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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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진석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재직. 『사회비평』주간과 『인물과사상』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고, 현재 『황해문화』 편집위원.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초월에서 포월로』(1,2,3),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소외에서 소내로. 문학비평집』, 『포월과 소내의 미학』, 『기우뚱한 균형』,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더러운 철학』 『소외되기-소내되기-소내하기』 등의 저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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