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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 우리 집] 막불감동, 빙그레 웃음 도는 건축일화 몇 가지

이일훈

2016-05-30

나의 집, 우리 집

막불감동, 빙그레 웃음 도는 건축일화 몇 가지


막불감동(莫不感動)은 “감동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말.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감동이다, 마음이(을)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일 중 가장 힘들고 큰일이다. 가벼운 듯 흔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드물고 무거운 것이다

 

‘잔서완석루’ 동측면 야경

▲ ‘잔서완석루’ 동측면 야경 ⓒ이일훈


당신은 누구에게 감동을 받았는가. 

당신은 누구에게 감동을 준적 있는가.


사람을 흔히 ‘감정의 동물’이라는데 사람은 어쩌면 동물의 감정을 지닌 존재인지도 모른다(학습된 상식·윤리와 이성(理性)으로 억제·자제하기에 표출되는 경우가 드물 뿐). 필자는 생업으로 건축가 노릇을 하면서 사람은 정녕 동물의 감정을 지닌 존재-인간의 생리에 동물의 감정을 더하니 짐승보다 더 동물 같은-라고 여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른 것들과 소통·타협·조율·양보·배려하지 않고 홀로 보신(保身)하려는 행동이 동물의 특징 중 하나이다(반면 인간의 특징은 보신-普信: 보편적으로 믿거나 두루 믿음-아니던가).

 

오래된 주택가에 헌 집 헐고 어느 새집 지을 때의 일, “건축법대로 일조권 거리를 띄웠지만 뒷집(북쪽)에서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잘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공사를 해야 이웃 사이가 좋습니다.” “아, 걱정 마세요. 뒷집은 아버님과 같이 6·25때 목숨 걸고 같이 피난 나온 분이어서 다른 집은 몰라도 그 집과는 아주 친해요”

 

새집을 지으려면 헌집을 허무는 것이 순서, 굴삭기 오자마자 “공사 못 한다.”고 드러누운 사람은 “아주 친하다.”는 그 집주인이었다. 이유는 새집에 대한 질투심(새집이 들어서면 자기 집이 더 낡아 보이고 집값이 떨어진다고…).

 

또 있지, 비슷한 일. 어떤 집을 짓는데 도로 건너편 주민이 시도 때도 없이 구청에 갖은 이유로 민원을 제기하니 구청 담당자가 현장에 왔다. “건축법에 저촉된 부분이 없고 민원에도 타당성이 없어 구청에서 개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건너편 사람이 대형 굴삭기를 임대하여 현장 입구를 막아버렸다. 수소문하여 굴삭기 주인과 통화하니 “그런 일에 쓰이는 줄 몰랐다. 돈 못 벌어도 남의 현장 막는 용도에는 굴삭기 빌려주지 않는다.”며 가버렸다. 그러자 담벼락에 “아무개는 집짓지 말라.” “아무개는 각성하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유는 새집이 들어서면 자기 집에서 보는 풍경이 가린다는 것. 물론 안 가리면 좋겠지만 자기의 시야를 가린다고 남의 땅에 무조건 집짓지 말라는 억지는 옳지 않다. 이런 일도 있지. 건축심의를 받을 때는 앞뒤 도로를 연결하는 보행자 통로를 만들겠다하고 준공 후에 막아 버려 사람들 못 다니게 하는 대형 건물도 보았다. 자신의 욕심은 중요하고 남의 권리는 무시하는 심보. 그런 일은 여기저기 흔하게 듣고 본다.

 

“백 냥으로 집짓고 구백 냥으로 이웃사라”는 속담은 이웃의 중요성을 말한 것인데 거꾸로 이웃을 원수(怨讐)로 여긴다.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동물성의 행동 방식이 아닌 식물성의 사유를 보여주는 건축의 예들이다. 건축가의 제안이 아무리 좋아도 건축주의 이해와 동의 그리고 실천이 없으면 의미가 살지 못한다. 그러니 건축(집)의 말은 결국 건축주(사람)의 말이요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집을 보면 주인이 보인다(집을 짓거나 꾸밀 때 무엇을 ‘중심’으로 생각하는가? 부의 과시인가, 자기만을 위하는가, 이웃에 대한 배려도 있는가, 환경 파괴적인가, 삶의 태도에 대한 성찰인가. 바로 그 ‘중심’이 집주인의 가치관이다. 숨겨지지 않는).


길과 집이 하나인 집, ‘가가불이(街家不二)’


사람을 위한 길을 만들자는 제안의 드로잉

▲ 사람을 위한 길을 만들자는 제안의 드로잉 ⓒ이일훈건축연구소 후리


“우리 마당에 누구라도 들어오시라.”, “우리 마당에서 아무나 쉬었다 가시라.”고 말하는 집이 있다. 「가가불이(街家不二), 이일훈 저, 시공문화사, 2000」 길과 집은 하나라고 말하는 건축이다. 서울 등촌동에 있는 다가구 주택이다. 오래된 주택가 작은 필지에는 집 앉히고 주차장 설치하고 나면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심지 못한다. 더하여 담장까지 두르면 이웃과 불통된 섬이 되고 만다(담장은 높을수록 도둑이 숨기 좋다).

 

궁리 끝에 집을 두 채로 나누고 “길과 연결된 열린 마당을 두자, 대문도 없앤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게 하자.” 했더니, 건축주 왈 “도둑이 들어오면 어쩌나.”, 아니다. “열려 있는 곳에는 사람의 눈이 많아 오히려 도둑이 피한다.” 알겠다. 그렇게 나무 심고 계단 같은 화단 만드니 과연 동네 아이들이 놀고 머물더라. 옆집 뒷집 앞집도 그렇게 서로 마당을 연결하고 담을 없애면 불규칙한 형상으로 이어지는 멋들어진 사람의 길이 되겠더라(주택가 도로는 넓건 좁건 자동차가 점령하고 사람이 편하게 걷지 못한다). 길과 붙은 집(건축)들이 길과의 연관성을 소홀히 하면 집(건축)은 그저 콘크리트상자일 뿐. 집 한 채 지으며 동네(도시)를 바꾸는 꿈을 꾸고 그렸는데 십 년도 더 지난 지금 그 주변은 어떻게 변했을라나(마당을 열자는 제안을 쾌히 받고, 짓고, 사는 건축주의 태도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무나 들어오라는 ‘가가불이’ 마당

▲ 아무나 들어오라는 ‘가가불이’ 마당 ⓒ박영채

 

마당의 개방성을 강조하는 '가가불이' 단면 구성 드로잉

▲ 마당의 개방성을 강조하는 '가가불이' 단면 구성 드로잉 ⓒ이일훈건축연구소 후리


훼손된 자연을 치유하고 경계를 없앤 집, ‘작은 큰집’


차를 타고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 경개 좋은 어느 산 밑에 두부 자르듯 산자락 잘라내고 지은 낡은 집이 있었다. 심하게 절토하여 만든 평지가 마음에 걸렸다. 잘려나간 산자락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집을 새로 지으면서 원래의 지형을 (추정하여) 되살리는 것이 좋겠다” 하니, 쾌히 “그렇게 합시다.” 했다.

 

살림살이에 필요한 방들을 ㄷ자로 나누어 앉히고 벽과 지붕을 흙으로 덮어 산자락의 흐름에 순응하는 지형을 만든다(사실 건축이란 새로운 지형을 만드는 행위이다. 지형을 훼손하는 건축이 일반적이지만 괴손된 지형을 치유하는 건축은 왜 없단 말인가). 완공된 집은 대부분이 땅속에 묻힌 형상, 방과 방 사이의 마당은 집밖에서는 보이지 않아 어두울 듯 하지만 햇빛이 잘 들며 뒷산과 연결된다. 산·바위·나무의 기운이 마당으로 내려오고 사람의 시선과 마음은 산을 향해 열리며 오른다.

 

집이 지어진 뒤의 일, 경계도 담장도 없으니 등(하)산하는 사람들이 마당에 불쑥, 별채에도 불쑥, 그러다 주인이 없는 때는 아예 툇마루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놀다간 흔적을 남기는 일이 잦다. 그래도 주인은 담장을 두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기 땅이지만 “산을 빌려 잠시 살 뿐”이라고 말한다. 건축하기 전에 “훼손된 지형을 치유하려니 토목비용이 더 들어 간다”고 설명하자 “그것은 공사비용이 아니라 자연 치료비”라며 웃던 건축주의 이해를 잊지 못한다. 집을 짓는데 산을 품은 듯 큰 생각이었다. 필자는 자연을 사랑하는 그 마음에 화답하며 그 집을 ‘작은 큰집’이라 이름 하였다.


훼손된 산자락을 되살려낸 '작은 큰집'의 부분 풍경. 지붕을 새로운 지표면으로 돌려 놓았다.

지붕을 새로운 지표면으로 돌려 놓았다. ⓒ이일훈

 

 

‘작은 큰집’ 안 마당에서 본 뒷산의 초여름

▲ ‘작은 큰집’ 안 마당에서 본 뒷산의 초여름 ⓒ이일훈

 

세상을 향해 안방까지 공개하는 집, '잔서완석루'

 

어느 날, 집을 짓겠다고 찾아온 건축주에게 말했다.
“새로 지을 집을 아직 구상하기 전에 집주인이 갖는 꿈을 글로 써보시면 어떨까요?”

 

답장이 왔다.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신세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네들 덕택에 여기까지 오면서 그나마 사람 꼴을 갖추어 살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바람 더 맞고 지낸 그 벗들이 오래간만에 한번 와서 한숨 돌리고, 그간 나누지 못한 얘기꽃을 피우며 지내는 집이면 좋겠습니다. 작게 모임을 꾸려 움직이는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와서 함께 어떤 주제를 놓고 논의하는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집 분위기는 이웃에 위세 부리지 않고, 주변을 비웃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위 내용은 훗날 책 「제가 살고 싶은 집은…, 이일훈+송승훈 저, 서해문집, 2012」으로 묶였다.)

 

밤늦도록 국어 교사 모임이 열리던 어느 해 여름, ‘잔서완석루’ 툇마루

▲ 밤늦도록 국어 교사 모임이 열리던 어느 해 여름, ‘잔서완석루’ 툇마루 (사진제공=송승훈)

 

자기 집을 지으며 맨 처음 하는 생각이 식구들 욕심이 아니라 주변 지인들에게 집을 제공하겠다니…? 새집을 짓는 누구라도 과시욕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운데 이웃에 위세를 부리지 않겠다니…? 놀라움을 넘는 감동! 그 감동은 아직도 식지 않았다. 새집에 이사 간지 다섯 해가 넘는데도 독서교육·연구모임을 갖는 교사들에게 기꺼이 집을 제공한다. 거실과 서재는 당연하고 안방까지 개방하여 세미나·워크숍을 진행한다. 건축에 관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에 정해진 날을 집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느 날인가, 길담서원에서 주최한 음악회가 그 집에서 열린 적도 있다.

 

공공시설에서 성취·발현·구현되는 공공성은 훌륭한 평가를 받더라도 박수칠 일이 못된다. 공공시설에서 그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우리 사회에서 그런 경험이 적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불행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 만성불행). 오히려 더 큰 공공성이 일상에서 성취·발현·구현되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야한다. 공공시설이 가져야할 자세는 보여주기 위한 상투적 공공성을 넘어 이제 공동성으로 나아가야한다. 더 큰 문제는 공공시설 아닌 그러나 공공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다수의 사유시설(대표적으로 건축시설)들이다. 시민 전체가 공유해야하는 환경을 해치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사유시설이 얼마나 많은가(그런 예들은 거의가 법적으로 문제없다고 말한다).

 

도시와 불화하고, 자연과 불통하고, 이웃과 불편하며, 공생, 상생, 공동의 가치를 외면하며, 사용의 가치보다 소유의 목적에만 집착하는 건축이 넘치는 시절, 위 예들은 사유(私有)를 넘는 사유(思惟)방식을 보여준다. 사유인데도 불구하고 세상과 담쌓지 않고 열어도 별 문제없다는 자세, 내 집만을 위해서 자연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 나아가 자신의 살림살이 공간도 벗들이 필요로 한다면 더불어 나누겠다는 집주인의 마음에서 그윽한 평화를 느낀다. 주변을 존중하고 사람을 환대하는 건축(그 반대가 사람을 무시·멸시·푸대접하는, 세상에 너무 많은 건축 아닌 건물)이 비로소 건축일 것이다. 세상에 권할 만한 생각을 좇아가면 건강한 건축은 저절로 되나니. 세상엔 그런 건축, 아니 그러한 사람도 있다. 이 아니 귀한가, 아…! 그저 막불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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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일훈
이일훈

식물성의 사유를 지닌 철학적 건축가로 불리며, ‘불편하게 살기’ ‘밖에 살기’ ‘늘려 살기’를 권유하는 ‘채나눔’ 설계방법론을 주창한다. 천주교 ‘자비의 침묵수도원’ ‘안드레아병원 성당’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 불교 ‘도피안사 향적당’과 ‘기찻길옆 공부방’ 등의 사회성 짙은 작업을 했다. 『사물과 사람 사이』,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등의 책을 펴냈다. 건축주와 주고받은 이메일을 묶은 책 『제가 살고 싶은 집은…』 대만에서 번역·출간되기도 했으며, 건축의 대중화와 인문학으로서의 건축을 보여주는데 한몫한다는 평을 듣는다.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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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사진 이미지

김**

2021-12-06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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