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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방랑자 : 마음이 홀로 선다는 것

정여울

2016-09-15

마음이 홀로 선다는 것


얼마 전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고르다가 도시락을 선전하는 문구를 보고 까르륵 웃음이 터졌다. ‘프로혼밥러를 위한 완벽한 도시락’이라는 광고문구였다. ‘혼밥러’는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의 준말인데, 거기에 ‘프로’를 붙이니 ‘혼자 먹기의 달인’이라는 의미가 성립되었다. 얼마나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이 많으면 이런 광고문구가 자연스럽게 통할까 싶어, 곧 웃음기가 사라지고 쓸쓸해졌다. 나 역시 가족은 있지만 혼자 밥 먹을 때가 많다.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에서 사는 현대사회에서, 항상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독립한다는 것은 우선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아닐까. 혼자서도 밥을 척척 해먹을 수 있다면 진짜 ‘프로혼밥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차선책은 음식점이나 편의점에서 간단히 한 끼 먹을 때도 혼자 있음을 두려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뭘 먹고 싶어 할까’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소박한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것도 혼자 밥 먹는 즐거움을 누리는 비결이다.

 

어릴 때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자기만의 방’을 가지게 되면 ‘독립’이 저절로 되는 줄 알았다. 나는 경제적 독립을 넘어 정서적 독립으로 가는 길이 어려웠다. 또한 혼자 잘 있는다고 해서 독립심이 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독립심은 ‘강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부드럽고 유연해야 한다. 즉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잘 지내는 것이 독립심의 필수요소다. 함께 있을 때 지나치게 불편해하고,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의견과 감정을 지닌 것을 참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참된 독립이라 할 수 없다. 그저 혼자 있음에 편해지기만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독립이라기보다는 ‘혼자 있는 상태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극도로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해갈 수 있다. 진정으로 독립적인 사람은 타인과 함께 있을 때조차도 편안히 ‘혼자임’을 즐길 수 있다. 또한 타인과 함께 있을 때 굳이 강력하게 자신을 표현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나의 나다움이 있는 그대로 전해지기만 한다면, ‘나를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은 가지지 않는 것이 좋다. 요컨대 독립은 경제적 독립을 넘어 정서적 독립을 향해야 하며, ‘나 혼자 있음’을 즐기는 것을 넘어 ‘함께 있을 때도 홀로 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독립적인 삶을 꾸리면서도 동시에 외로움에 지치지 않을 수 있는 최고의 트레이닝 방법은 바로 혼자 여행하기다. 함께 여행하면 서로에게 의존하게 되고, 서로의 취향을 신경 쓰게 되고, ‘함께 놀기’에 치중하기 쉽다. 혼자 여행을 떠나면 일단 내 몸의 안전과 생존을 오롯이 혼자 책임져야 한다. 자신의 모든 소지품과 여권과 신체의 안전을 항상 신경 쓰며 다녀야 하고, 위급한 상황에도 처하게 되고, 평소의 영어 실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상황에도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바로 이 모든 어려움을 홀로 겪어내고 나면, 엄청난 자유와 해방감이 밀려든다. 나중에는 이 모든 난관이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져 여행 자체의 행복에 더 깊이 집중할 수 있다.

 

혼자 여행하는 남자

▲ 독립적인 삶을 꾸리면서도 동시에 외로움에 지치지 않을 수 있는 최고의 트레이닝 방법은 바로 혼자 여행하기다.

 

처음 유럽 여행을 떠났을 때, 나는 첫날부터 여권을 잃어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여권을 잃어버린 줄만 알고 공포에 떨었다. 그것도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에서 독일로 가는 비행기로 환승하기 직전에! 모든 걸 다 잃어버려도 여권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된다는 친구의 조언과 정반대로, 나는 모든 건 다 있는데 여권만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거의 30분 동안 하얗게 질려서 내가 챙긴 모든 짐을 샅샅이 뒤졌다. ‘이제 나는 환승은커녕 아주 오랫동안 집에 못 돌아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거의 초죽음이 될 무렵, 여권을 찾았다. 여권을 잘 챙겨야 한다는 압박감에 너무 시달린 나머지, 따로 챙겨놓은 짐 속 깊숙이 여권을 숨겨놓은 채,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외국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지갑을 10개도 더 잃어버린 내가 외국에서는 한 번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며 스스로 기특해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으면, 화려하게 차리고 다니지만 않으면, 별다른 위험은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만 베니스 기차역에서 잠시 마음을 놓고 열심히 책을 읽어버렸다. 기차가 떠나기 전까지 방심은 금물이었다. 잠깐 사이에 배낭 전체가 없어졌다. 이번에는 실제 상황이었다. 너무 놀라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지만, 경찰에도 신고하고 역무원에게도 이야기했지만 도둑은 이미 내 배낭 전체를 훔쳐가 버린 뒤였다. 다행히 여권과 휴대전화, 큰 가방은 곁에 있었지만, 그동안 열심히 찍어놓은 사진 파일과 아이패드와 준비해온 현금이 싹 다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선물 받아 아껴 쓰던 만년필과 정든 옷가지까지 몽땅! 바로 내 머리 위 선반에 있던 배낭을, 누군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가져가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런 경우는 숙소나 광장에서부터 표적을 겨냥한 거라고 한다. 그다음부터 나는 아예 배낭을 다리 밑에다 놓아둔다. 선반 위에 두면 졸거나 책을 읽을 때는 주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몸에 닿는 곳에 짐을 놓아두는 습관은 그때부터 기르게 되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사건들 덕분에 잃은 것은 ‘물건’이지 ‘나 자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정신 차리고, 집중해서 여행 그 자체에 몰입하는 마음가짐을 지니게 되었다.

 

길치이자 방향치이고, 비행기 공포증까지 있었던 내가 지금은 어딜 가도 주눅 들지 않고 ‘모자란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며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된 힘은 바로 지난 10여 년간의 배낭여행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반드시 떠났던 배낭여행을 통해 나는 내게 주어진 일상과 노동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고, 아무리 힘들거나 바빠도 ‘내 마음이 온전히 쉬는 시간’은 꼭 마련해야만 지치거나 병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자기를 보살피는 기술, 자기를 지키는 기술, 자기를 단련하는 기술을 알게 되었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내 최고의 무기인 ‘한국어’를 쓸 수 없게 된다. 한국어로 밥을 먹고사는 나, 오로지 한국어로 소통하고 한국어 글쓰기로 독자를 만나는 나의 강점을 전혀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무력감’이 때로는 기분 좋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의 장점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살아도, 그렇게 힘들거나 외롭지만은 않았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알 수 없는 다음 행선지에 대한 설렘으로, 나는 ‘익숙한 것들과의 조용한 이별연습’을 할 수 있었다. 내 것, 나의 재능, 나의 미래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런 해방감이야말로 진정한 자립심의 필수요소였다.

 

앞서 가는 무리를 뒤따르는 혼자인 남자

▲ 혼자 밥 먹기, 혼자 술 먹기, 혼자 살림하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군가와 함께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정서적 독립은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자신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 혼자만으로 내 주변의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있어도, 내가 나를 위로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의 친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할 때 더 큰 자립심이 길러진다.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고 생각하기 위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내가 먼저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더 멋진 혼자’가 되어야 한다. 최고의 자립심은 ‘언젠가는, 혹은 지금 당장에라도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의지와 열정이 함께할 때 비로소 완성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혼자 밥 먹기, 혼자 술 먹기, 혼자 살림하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군가와 함께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혼자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자립심은 누군가와 함께할 때조차도 ‘자기다움’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혼자 있음의 편안함에 도취해 ‘함께 있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자립심과 협동심은 반대되는 가치가 아니다. 혼자 있을 때 강인한 사람이 함께 있을 때도 강인해질 수 있다. 우리는 ‘1인 가구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자립심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 그리고 아무리 불편한 사람과도 잘 지내는 길을 찾기 위해 자립심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위로받고,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용기를 얻으며, 힘들 때 수다를 떨 수 있는 단 한 명의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다만 혼자 있기 위해 독립심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누군가와 진정으로 함께하기 위해 독립심을 키워야 한다.

 

도로 위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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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여울
정여울

작가.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월간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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