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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과 철학의 관계

- 장르문화 속 인문찾기 - '재미가 아닌 철학을 위해 복무하는 무협은 없다'

좌백

2021-01-22

장르문화 속 인문찾기는? 흔히 웹툰, 웹소설, 만화, 게임 같은 장르와 이들 장르가 사용하는  맨스, 추리, SF, 스릴러, 무협, 코미디같은 패턴 등을 아울러 ‘장르문화’라고 부른다. 이상한 것은 이들 ‘장르문화’가 점점 큰 인기를 얻고 산업적으로도 크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아직 예술작품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교과서, 언론 등에서도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점이다.  이에 이미 일상과 문화 곳곳에 깊숙이 파고든 다양한 장르문화 콘텐츠들과 그 속에 숨어있던 인문적 가치와 요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새롭게 발굴해 함께 나눠보려고 한다.

 

 

90년대의 신 무협 작가들이 실존주의 무협을 쓴다거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도를 한다거나 하는 평을 들은 일이 있다. 하지만 당사자로서 말하건대 그건 작가들이 동의한 일 없는 선전 전략 중 일부였을 뿐이다. 실제로 필자는 작품 활동 전반에 걸쳐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근본 질문으로 삼고 무협을 써왔다. 작품 중에 하이데거며 야스퍼스의 주장들을 슬쩍 끼워 넣은 일도 있다. ‘인간은 내뱉어진 존재’ 같은 것 말이다.



카카오페이지 무협지 천애협로 이미지출처 카카오페이지

카카오페이지 무협지 <천애협로> 표지(이미지 출처 : 카카오페이지)



예전에 한 강연회에서 무협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시대별로 한국 무협을 이끌어온, 혹은 한국 무협이 표방한 주도적인 철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는데, 듣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어 제대로 답변을 못 하고 어물거리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다.

왜 대답을 못 했는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주제라서? 할 말이 없어서? 아니다. 필자는 대학 전공이 철학이었으며, 졸업한 이후 이십 년 넘게 무협을 써오고 있다. 무협과 철학이라는 얼핏 상관없고, 멀어 보이는 주제는 필자의 안에서 늘 부딪치고 어떤 식으로건 해결을 요구하며 소리치는 문제였다. 그러니 생각을 안 해본 주제가 아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제대로 못 푼 것에 가깝다. 마침 이런 지면이 허용되어 그 문제에 대해 차분히 풀어보고자 한다.



박이문의 문학과 철학 이야기 책 표지 이미지 출처 알라딘

<박이문의 문학과 철학 이야기> 책 표지(이미지 출처 : 알라딘) : 문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심화된 이해를 바란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1. 하이데거는 ‘문학 작품을 비롯해 모든 예술 작품의 존재 이유를 사물과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문학과 철학의 목표는 다르지 않다. 철학은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고민이며, 그걸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바로 ‘사물과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 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면 국내의 어떤 작가이자 문예창작과 교수라는 분이 제기했던 대로 ‘장르 소설에, 특히 무협에 무슨 리얼리티가 있냐’는 비판을 할 수도 있겠다. 당대 문학의 주도적인 경향인 리얼리즘 문학관에 기반해서 이해해야 하는 질문이고 비판인데, 과연 옳다. 얼핏 무협은 리얼리티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문학이다. 사실은 문학이라고 쳐줘도 되나 의심을 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무협은 기본적으로 사실과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장르가 아니며, 그 목적도 독자에게 자기가 서 있는 삶의 현장인 세계를 재인식시키는 것이 아니다. 무협의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목적은 독자에게 재미를 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무협은 상상력의 공간으로서 중국 같지만, 중국이 아니고 과거 어느 때 같지만 사실은 존재한 일이 없는 가상의 시간대를 무림이라는 이름으로 배경을 삼는다. 그리고 물리학과 생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때로는 명백하게 어긋나는 능력들을 무공이라는 이름으로 가능한 것처럼 사용한다. 그래야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얼리즘의 시각을 넘어서면, 심지어 좀 더 근본적으로 리얼리즘의 시각으로 보면, 무협도 근원에 있어서 인간과 삶,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서 세계의 탐구에 매달리고 있다. 우화가 현실과 닮지 않았다고 진실에서까지 멀지는 않은 것처럼, 무협이라는 장르도 분장하고 무대에 선 배우가, 그 위에서 펼치는 드라마와 같이 결국은 인간과 삶,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다만 그게 본격 문학과 비교해 조금 멀다고 할까, 간접적이긴 하지만.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책 표지 필자 개인 소장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책 표지(이미지 출처 : 필자 개인 소장) : 난해하다고 소문난 책이지만 끈기를 갖고 조금씩 읽으면 읽기가 불가능하진 않다.



2. 무협도 문학이다. 본격 문학과 다를 바 없는 관심사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조금 멀고 간접적이다. 이 ‘멀고 간접적’이라는 부분을 이야기해 보자.


간단히 말해 무협이 기반으로 하는 구체적인 철학은 없다. 없어 보인다. 본격 문학이 문예사조라는 이름으로 기대고 있는, 혹은 표방하고 있는 철학과의 관계에 비해 무협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무협 작가 개인의 차원에서는 어떤 철학사조, 또는 문예사조에 기반한 작품을 창작했을 수 있다. 어떤 작품은 그런 철학과 문예사조의 이론으로 읽지 않으면 해석할 수 없는 창작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단지 그 일개인, 그리고 그 작품 하나만으로 존재할 때, 그건 무협이라는 장르, 문화현상의 측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있냐 없냐는 의미에서는 당연히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무협 판에 영향을 주었는가, 이후에 기억할 만큼 여파가 있었고, 거기 영향받은 다른 작가들의 후속 창작이 있었는가 하고 묻는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문화적으로는 없었다고 말하는 게 지나치지 않다.


한때 필자를 포함한 90년대의 신 무협 작가들이 실존주의 무협을 쓴다거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도를 한다거나 하는 평을 들은 일이 있다. 하지만 그런 평을 들은 당사자로서 말하건대 그건 작가들이 동의한 일 없는 출판사의 선전 전략 중 일부였을 뿐이다. 실제로 필자는 작품 활동 전반에 걸쳐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근본 질문으로 삼고 무협을 써왔다. 작품 중에 하이데거며 야스퍼스의 주장들을 슬쩍 끼워 넣은 일도 있다. ‘인간은 내뱉어진 존재’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자의 작품을 실존주의적인 무협이라고 봐도 좋은 것일까?


필자의 생각에 실존주의적으로 썼다고 하려면 작품 구성 자체에서부터 실존주의적인 철학이 기반이 되어 있어야 한다. 실존주의적인 생각을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한다. 그래서 작가가 생각한 실존주의적인 결론으로 끝이 나야 한다. 그게 성공적이건 아니건 적어도 시도가 그랬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의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필자의 소설은 실존주의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서 쓰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그 전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인 건 알겠지만 터무니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영역에서는 그런 게 있을 수 있다. 문예사조라는 것이 위에서 필자가 말한 대로 근본적인 구성과 전개에서 그 철학을 표방하고 드러낼 수도 있지만, 단지 기법의 차원에서 시도될 수도 있고, 그것 또한 그 철학의 일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강조하지만’ 그런 작품과 작가가 없었다고 하는 게 아니다. 그게 전체로 봤을 때 있었어도 별 영향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소설로서는 몰라도 무협 소설로서는 별 흠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무협은 그걸 위해서 쓰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움베르트 에코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 책 표지 이미지 출처 알라딘

움베르토 에코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 책 표지(이미지 출처 : 알라딘)



3. 움베르토 에코는 역사 소설과 모험 소설을 구분하면서 ‘역사 소설은 시대를 위해 인물이 사용된다. 모험 소설은 인물을 위해 시대가 사용된다’라고 탁월하게 지적한 바 있다. 풀어서 말하자면 역사 소설은 시대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을 보여주기 위해 창작되는 반면 모험 소설은 그게 가상이건 실제건 인물의 영웅적인 활약상을 보여주기 위해 시대가 배경으로만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건 단지 역사 소설과 (움베르토 에코가 로맨스라 부른) 모험 소설에서만 찾을 수 있는 차이점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장르 소설은 대개 이 기준점에 걸린다.


장르 소설은 인물의 활약을 그리기 위해 배경을 변형, 왜곡하고, 가상으로 창조하기도 한다. 역사적 사실이라거나 고증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중요할 때도 있는데, 그건 최소한의 현실성을 가미해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지 그 자체가 중요해서는 아니다. 한 마디로 장르 소설은 재미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거기 복무하게 한다. (위에서 이미 말했듯이 장르에 따라, 또 한 장르라고 해도 작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다. 가령 SF는, 특히 현재 한국에서 창작되는 SF소설들은 이 범주에 넣기 꺼려진다. 그쪽은 다른 장르들과는 많이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다.) 


철학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움베르토 에코식으로 말하자면 무협은 철학을 위해 쓰이는 게 아니라 재미를 위해 철학을 사용한다고 말이다. 그러니 그걸 잘못했다고 비난할 일도 아니다. 어떤 무협 소설이 당대를 지배하는 문예사조와 아무 상관 없이 창작되고 읽힌다고 해서 뭐라고 할 일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무협이 문예사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서효원 실명대협 출처 알라딘

서효원 <실명대첩> 시리즈(이미지 출처 : 알라딘) : 실명 시리즈에는 이것 말고도 <실명천하>, <실명마제> 등이 있다.

공통적으로 주인공이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눈이 멀었다고 하는 그 실명이 아니라 이름을 잃었다, 즉 기억을 잃었다는 뜻이다.



4. 정리해 말하자면 이렇다. 무협도 문학인 이상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철학과 지향점이 같다. ‘사물과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격 문학과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다. 그쪽 기준으로 보자면 무협은 철학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시대를 이끌어온, 주도하는 철학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게 있을 수도 있다, 결핍이야말로 그 필요를 가장 강하게 보여준다는 건 어느 유명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도 진리에 가깝다. 돌이켜 보면 한국 무협은, 그러니까 한국 작가에 의해 한국에서 창작된 무협은 70년대에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느리지만 꾸준히 발전해 왔으며, 멀리 돌아가는 길이고 간접적이긴 하나 시대상을 반영해 오기도 했다.


70~80년대의 무협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유를 갈망한 것 같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자신을 조여오는 운명, 책무, 은혜와 원한을 갚아야 한다는 압박, 주변의 기대와 무림을 마두1)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무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결국 그 모든 일을 해내지만, 마지못해서, 투덜대면서 하고는 엔딩에서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안 하겠다는 듯 홀가분하게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1) 마두(魔頭) : 무협 용어로 나쁜 무리의 보스라는 뜻


그 시절 한국 무협의 주인공은 가문의 혈겁2)이라는 장치를 통해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방식으로 적으로부터도 (일단은) 자유로워진다. 심지어 서효원의 <실명대협>류 시리즈에서 보듯이 기억상실이라는 방법으로 (이전까지의)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데에는 역설적으로 대단히 자유롭지 못한 시대 상황이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유신과 5공을 거치면서 억압된 개인의 자유와 억눌린 사회 분위기가 사회 고발이나 변혁의 추구와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무협 소설에서도 이런 식으로 반영된 것이 아닐까.

2) 혈겁(血劫 : 무협용어로 학살이라는 뜻 


절차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진 90년대 이후 무협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그때처럼 자유를 추구하는 경향보다는 개인의 자기 정립, 자아 찾기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이것은 또 역으로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자아 정립에 목말랐던 당시 작가들의 무의식적인 욕구가 그렇게 표현된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2천년대 이후 무협 소설, 웹소설의 주인공들은 무엇을 추구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들이 가장 찾아다니는 것이 바로 현세대에 가장 부족한 것이라는 징표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달마역근경 이미지 출처 필자 개인소장

<달마역근경>(이미지 출처 : 필자 개인 소장) : 중국의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진위는 물론 모른다.



5. 철학이라기보다 사상적 배경이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무협은 유, 불, 도 삼교의 동양사상에 기반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지적이 있을 수 있겠다. 사실 그렇다. 무협이라는 장르는 기(氣)나 내공(內功)과 같은 도교적 전통의 결과물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으며, 천하공부출소림(天下工功夫出少林)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무술은, 적어도 중국 무술은 그 기원을 소림사에 두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소림사에서 무술이 탄생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중국의 무술인들조차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그 소림사에 무술을 도입한 사람은 선종 불교의 창시자인 달마 대사라고 알려져 있다. (사실 달마 대사가 무술을 도입한 것도 아니고, 선종 불교를 창시한 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이걸 따지고 들면 따로 지면이 필요해지니 생략하자.)


이 이야기는 유명한 역근세수경(易筋洗髓經) 서문에 ‘이 책은 달마 대사의 유작이며 소림사의 권법 원전이다’라고 당나라 때의 장군 이정(李靖)이 쓴 것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이 역근세수경 자체가 청나라 때 와서야 만들어진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는 건데….


한편 달마 대사가 선종 불교를 창시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좀 의심스럽다고 해도 불교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다. 또한 선종 불교는 그나마 그 다음 대인 2조(선종의 두 번째 조사라는 뜻이다) 혜가와 3조 승찬이 당시 황제의 불교 탄압을 피해 서주의 완공산에 숨어 지냈고, 4조 도신과 5조 홍인은 기주 황매산에서, 선종 불교의 기초를 확립한 6조 혜능에 이르러서는 아예 남쪽으로 내려가 조계사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나라에도 조계사가 있지만 같은 절은 아니고, 선종 불교의 명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이름을 같이 한 게 아닌가 싶다.)


어쨌건 소림사는 선종 불교의 발상지라는 명성과 달리 달마 대사 이후로는 적어도 선종 불교의 역사에서는 이름이 사라지게 된다. 오히려 무술과 관련해서는 역사에 몇 번 등장하는데, 수나라 말엽에 담종이라는 승려가 당 태종 이세민을 도와 양세충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거나 원나라 말기에 절에 쳐들어온 홍건적을 격퇴했다거나, 명나라 때 장군 척계광을 도와 왜구를 물리치는 데 힘을 보탰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명나라 때 장군 정충두의 <소림곤법천종>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특히 담종의 이야기는 이연걸이 주연한 영화 소림사의 모티브가 되었다. (어디까지나 모티브지 영화에 나온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고 하는 건 아니다.)



용호산 장천사 포스터 이미지출처 chinesemov

장도릉을 소재로 한 영화 <용호산 장천사>(2020) 포스터 : 도릉이 제자와 함께 귀신을 퇴치하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무당파의 시조인 장삼봉을 위시해서 역사상 유명한 도사에게는 귀신 쫓는 일화가 늘 따라다닌다.



6. 도교는 불교보다 더 무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단지 무협 소설 속에 도사나 도교의 종파들이 많이 등장한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도교는 수행을 통해 신선이 되고자 하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수행 방법 중 하나가 명상이고 금단술이며, 거기서 파생된 개념이 바로 내공이다. 소위 선천지기니 후천지기, 운기토납법 등 무협 소설 속에서나 나올 많은 용어가 근원을 따져 보면 도교의 수련법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도교 이전에 중국의 전통사상인 기철학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중국에서 기철학과 도교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섞여 있으며, 그 외에도 각종 전통사상,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전통적으로 전해오던 민간 속설이며 미신들이 종교의 틀 안에 모여 보존된 게 도교라는 종교다.


그러니 사실 도교란 어떤 종교라고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데, (위에서는 수행을 통해 신선이 되고자 한다고 했지만 이건 그야말로 너무 심하게 줄여 말한 거고) 종파에 따라서, 심지어는 한 종파 안에서도 여러 복잡한 교리들이, 심지어는 서로 모순되는 교리들이 병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교의 시초가 되는 오두미도(五斗米道)의 탄생과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이게 더 확실해질 것 같다. 원래 오두미도는 후한 말엽에 장도릉이라는 인물이 청성산에서(무협에 자주 나오는 청성파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듯) 도를 깨우쳐 창시한 종교다. 이 종교의 핵심은 부적을 써서 태운 뒤 물에 타 마시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건데, 사실 이 부적이란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고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하는 서약서라고 한다. 그리고 병이 나으면 쌀 다섯 말, 그러니까 오두미를 교단에 바치는 것이다. 그래서 오두미도, 혹은 오두미교라 한다. 정일천사(正一天師)라 불린 장도릉이 창시한 오두미도는 그 아들 장형을 거쳐 손자 장로(張魯)에 의해 대성하였는데, 삼국지에 등장하는 한중왕(한중지역의 제후) 장로가 바로 이 사람이다. 알고 보면 그는 단지 지역의 군벌일 뿐 아니라 종교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가 다스리던 한중 땅은 그래서 통치체제도 종교적 교단 조직과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대인의 의식으로 생각할 때는 부적으로 병을 고치고 쌀을 대가로 바친다니 이 무슨 사이비 종교냐 할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치유의 은사3)를 전도의 수단으로 삼는 종교는 지금도 흔하고, 오두미도가 바치라고 한 쌀은 당시 만연하던 기아와 빈민의 구제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면 평가가 조금 달라질 수 있겠다. 오두미도는 십 리에 하나씩 의사(義舍)라는 건물을 짓고, 거기에 받은 쌀을 쌓아두고는 배고픈 자는 누구든 가져갈 수 있게 했다니 일종의 빈민구제용 공공기관을 설치 운영한 셈이다. 종교의 수장인 장로가 지역의 패주가 된 이유도 이런 식으로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3) 은사(恩賜) :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


다들 잘 알다시피 장로는 조조에게 패배해 한중을 내놓게 된다. 그리고 본인은 종교의 수장으로만 남아 활동을 계속했는데, 그의 사후에도 오두미도는 정일도, 혹은 천사도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져 왔다. 정일도는 그들이 ‘변하지 않는 단 한 가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의 정일(正一)에서 따온 이름이고 천사도란 그들의 교주를 하늘이 내린 도사, 천사(天師)라 불렀기 때문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초대 종사인 장도릉이 정일천사라 불린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초대 천사가 되고 장로는 3대 천사인 식이다. 그리고 이후 원나라 초대 세조 황제 때에는 제36대 천사인 장종연이 사한천사(한나라 때부터 전통을 이어받은 천사라는 뜻이다)로 봉해지고 14세기에 와서는 중국을 남북으로 나누어 남쪽의 도교 종파와 도관(도교 사찰) 및 도사들을 이들이 통괄하게 하였다. 그리고 1969년부터 천사도는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각수궁(覺修宮)이라는 도교 사찰에 본부를 두고 장도릉과 장로의 후손인 제64대 천사 장원선이 법통을 잇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저 천사도와 중국을 남북으로 나누어 북쪽 도교를 통괄하던 종파가 바로 전진교인데, 이쪽은 송나라 때 중양자 왕철이 창시하여…. 왕중양과 그 제자들, 특히 장춘진인 구처기에 대한 이야기는 김용의 <영웅문>에도 잘 나와 있으니 생략하자.


7. 그래서 불교와 도교가 무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무협의 사상적 배경은 불교와 도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서양 철학이 아니면 철학이 아닌 것도 아니고,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나. 아니라고 본다. 서양 철학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무협 소설은, 한국 창작 무협 소설은 불교와 도교의 사상들을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한 보조적 장치로 사용했을 뿐 그 사상을 드러내거나 그걸 등장인물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움베르토 에코의 규정이 작용한다. 인물을 위해 불교와 도교가 이용되었지, 그 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 와서는 조금 목소리가 작아지는데, 작가 중에는, 그리고 그들이 쓴 작품 중에는 훨씬 더 불교적이거나 도교적인 작가와 작품이 있다고 알고 있어서다. 또 노장사상에 깊이 천착한 작품도 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작가와 작품이 과연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킬 만큼 성공했는지, 또 나중에 나온, 나올 작품들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강한 울림이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역시 일회성, 일과성이 아닌가 말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걸 가장 잘 그려낸 작품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김용을 거론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사조영웅전 세트 이미지출처 교보문고

김용 무협 소설 <사조영웅전>(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 이 책에는 전진파 도사 장춘자 즉, 구처기가 칭기즈칸에게 도를 설법한 일화,

<신조협려>에는 구처기의 제자들 이야기가, <의천도룡기>에는 무당파 대종사 장삼봉이 등장한다.



8. 그래서 문제인가? 문제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강조를 위해 다시 말하건대, 무협 소설이 철학을 기반으로 하고 사상을 표방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협 소설은 재미를 위해 모든 것이 이용될 뿐, 그 역을 위해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을 제대로 담지 못했다고 욕먹는 것보다 재미없다고 욕먹는 게 훨씬, 백만 배는 더 아프기 때문이다.



 

[장르문화 속 인문찾기] 무협과 철학의 관계

[장르문화 속 인문찾기] 게임 속에서 타인을 다루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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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백

본명 장재훈 숭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이후 좌백이라는 필명으로 무협소설을 쓰고 있다. 1995년 [대도오]를 시작으로 최근작 [구대검파]까지 무협소설 십여 종 외에 [논리의 미궁을 탈출하라], [소크라테스를 구출하라] 등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철학 판타지 시리즈도 출간했다.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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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사진 이미지

정**

2021-03-27

흥미로운 이야기 잘 봤습니다.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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