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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대한 생각 : 중산층과 중용의 눈

이성민

2017-01-10

중산층과 중용의 눈


얼마 전 나는 아내에게 ‘중산층’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데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해달라고 청했다. 뜻밖에도 아내는 이 용어에 대한 어떤 근본적 회의를 표출함으로써 결국은 내게 도움을 주었다. 즉 아내는 ‘중산층’이라는 용어가 왠지 요즘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 같다는 의견을 들려주었다. 가령 ‘혼족’ 같은 용어는 들리지만, 이제 더 이상 ‘중산층’ 같은 용어는 듣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족’과 ‘중산층’은 좀 다른 범주이지 않겠는가 하는 불만 내지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았다. 진정 궁금증 하나를 얻었지만 말이다.

1
‘중산층’은 ‘middle class’를 번역한 말이다. 이 영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중간 계급’이다. 알다시피 이 중간 계급 개념은 주로 경제적으로 이해되거나 정의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그렇기에 ‘중간’이 아니라 ‘중산(中産)’이라는 단어가 선택되었을 것이다. ‘産’은 ‘생산’이나 ‘재산’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가령 OECD에 따르면 중산층이란 중위소득의 50-150%인 가구를 가리킨다. 영어에서 그냥 ‘middle’인 것을 우리는 ‘중간’이 아니라 ‘중산’이라고 번역한다. ‘commun’은 ‘공동’이나 ‘공통’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는 ‘communism’을 ‘공산주의’라고 번역한다. ‘공산’의 ‘산’ 역시 ‘産’이므로, 이 역시 경제주의적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모든 걸 경제적인 방식으로 읽으면 삶이 더 정확해지거나 편해지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와 돈이 지배하는 오늘날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인간 삶의 가치들은 모르긴 몰라도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어의 경우 말조차도―혹은 말부터도―경제적이다.

2
아무리 사람들이 ‘중간’을 ‘중산’으로 번역하고 중산층을 경제적으로 정의한다고 해도, 이 말에는 언제나 어떤 도덕적이거나 문화적인 가치가 덧붙여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를, 즉 중간이 두터운 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본다. 알다시피 이런 건강한 사회에 대비되는 것이 양극화된 사회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중간’이라는 것에는 무언가 기초적인 균형 감각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중산층의 붕괴가 사회 구성원에게 주는 불안감은 분명 이러한 감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극단의 시대에는 중간의 의미가 나빠진다.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대립하는 가운데 혁명을 꿈꾸었던 마르크스는 이 둘 사이에 있는 소부르주아 계급, 즉 중산층이 결국은 소멸할 것이라고 보면서도, 이 계급의 관점을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기회주의적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

 

우리는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를, 즉 중간이 투터운 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본다. 극단의 시대에는 중간의 의미가 나빠진다. 마르크스는 중산층을 부정적이고 기회주의적으로 보았다.
나는 중간을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을 힘의 관점 내지는 세기의 관점이라고 부르겠다. 세기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무엇이 더 강하고(크고, 길고) 무엇이 더 약한지(작은지, 짧은지)를 보는 눈이다.

가) ----------
나) ------

우리 안에 세기의 눈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해보자. 위 그림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가)가 (나)보다 길다는 것을 본다면 당신에게는 세기의 눈이 있는 것이다. 세기의 눈은 (가)와 (나) 사이에 4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보며, 그만큼 (가)가 더 길다고 본다.
이와 대비되는 관점이 『논어』의 선진편에 들어 있다. 거기서 공자와 자공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자공이 “사와 상이 누가 더 나은가?”라고 묻자, 공자는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라고 했다. 자공이 물었다. “그러면 사가 더 나은가?” 공자가 말했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질문하는 자공의 눈은 세기의 눈이다. 그 눈은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한 것이 주어졌을 때, 어느 것이 더 큰 지에만 관심을 둔다. 반면에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過猶不及)”라고 말하는 공자는 세기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다른 관점을 도입한다. 공자는 적당한 것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면서, 과불급을 보고 있다. 이 경우 8이 적당하다고 가정해보자.

가) ----------
나) ------

과불급을 보는 눈은 (가)가 2만큼 과하며 (나)가 2만큼 부족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중용의 눈이다. 중용의 눈이 보는 ‘중’이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것, 즉 정확하고 적당한 것을 가리킨다. 사회에 이 눈이 있다면, 이 눈은 분명 사회의 양극화에 문제가 있다고 볼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 세기의 눈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눈도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중산층에서 기회주의를 보지 않고 합리성을 보는 눈이.

 

저울 일러스트

 

3
아내가 내게, 가령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중산층이라는 용어가 잘 사용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중산층 붕괴와는 전혀 다른 사태처럼 느껴졌다. 물론 오늘날을 극단의 시대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아도 세계를 들여다보아도 정말 그런 것 같다. 사회는 극과 극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분열의 방식이 다양하다. 사회는 가령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로 분열되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분열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고전적 분열과는 별도로, 알다시피 오늘날 사회는 또한 남자와 여자로 분열되기도 하고,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으로 분열되기도 한다. 중산층이 ‘중위소득의 50-150%인 가구’로 정의되기는 하지만, 이제 이 ‘가구’의 모습도 ‘혼족’이라는 말의 등장이 암시하듯이 예전 같지가 않다. 이제 아이가 있는 부부가족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중간층이 한 사회의 건전함에 대한 지표가 되어주었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도 같다. 


내게는 어떤 시대가 저물고 있으며, 아직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다. 한동안 이런 상태가 지속될 것 같다는 느낌. 이런 ‘중간적’ 시대에 새로운 중간을 찾는 일은 예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중용의 합리적인 눈을 견지하고 장려하면서도, 새로운 과제에 착수해야 한다. 남녀 문제나 세대 문제나 인구 문제나 공동체 문제에서 새로운 중간들을 찾고 실험하기 위해서 말이다. 새로운 중간들이 발견되면 저 중용의 눈이 경제적 영역에서 점차 벗어나 인간 삶의 중요한 가치들로 관심을 돌릴 것이다. 실업의 시대인 오늘날 분명 인간적 가치를 위한 일들이 (재)발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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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성민
이성민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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