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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되지 않는 기억, 나를 규정하는 기억

책 『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나』에서 저자 다우베 드라이스마는 기억에 대한 몇몇 인용구를 소개한다.

장근영

2017-10-10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기억, 나를 규정하는 기억

 

책 『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나』에서 저자 다우베 드라이스마는 기억에 대한 몇몇 인용구를 소개한다. 그중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말은 “기억이란 제멋대로 가서 드러눕는 늙은 개와 같다”라는 네덜란드 작가 노테봄의 말이다. 기억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작동한다는 뜻이다. 정말로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것들은 걸핏하면 망각의 심연에 빠져버리고 오히려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맴돌며 나를 괴롭히곤 한다.

 

기억은 감정을 타고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 아주 잘 설명해줬지만, 최근의 심리학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기억과 감정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가 매일 겪는 경험들이 기억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뇌 속의 해마(Hippocampus)라는 기관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 해마는 경험에다가 감정을 덧입히는 역할을 한다. 어떤 기억에 입혀진 감정의 색채가 짙을수록 그 기억은 뚜렷하게 남는다. 반대로 감정이 빠진 경험들은 기억으로서의 힘을 금세 잃어버린다. 같은 이유로 우리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떠오르느냐는 지금 현재 내 감정이 어떤 상태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똑같은 단서를 보더라도 지금 당신의 기분이 좋으면 그 단서와 연결되는 즐거운 기억이 떠오르고, 우울한 상태라면 슬픈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면 제멋대로 드러눕는 늙은 개와 같은 기억도 길들일 수 있다.

 

즐거운 모습  그리고 우울한 모습

▲ 기억과 감정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기분이 좋을 때는 즐거운 기억이 떠오르고, 우울한 상태에는 슬픈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불쾌한 기억의 역할

 

단, 당신이 아무리 명랑하고 유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반적으로 불쾌했던 기억이 유쾌했던 기억보다 더 자주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기억의 근본적인 기능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기억은 과거에 겪었던 나쁜 일들이 어떤 상황에서 무엇 때문에 벌어졌는지를 잊지 않게 해줌으로써 앞으로는 그와 같은 상황이나 원인을 피할 수 있게 도와준다.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나 음식점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우연히 다시 그 집을 찾아가게 되면 또다시 마주한 맛있는 음식을 즐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한번 먹고 배탈이 났던 음식이나 음식점을 기억하지 못하면 다시 그 집을 찾아가는 실수를 하게 될 것이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 건강을 해치고 심지어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즉, 기억의 핵심 기능은 나쁜 일을 피하게 하는 것이다. 좋았던 일보다는 나빴던 일들이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좋았던 일은 몸이 기억하고, 나빴던 일은 머리가 기억한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는지 모른다.

 

나쁜 일을 피하게 하는 것 외에 기억은 또 어떤 기능을 할까.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집단에 속해있으며,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뭘 잘하고 뭘 못하는지 등등의 정보가 모여서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만든다. 그리고 그 정보들은 모두 내가 기억해야 의미 있는 것들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것들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기억이 내 존재의 핵심을 유지하는 생물학적인 기초라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H.M.의 이야기

 

정신병리학자들은 어떤 심리적 요소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가장 잘 아는 방법은 그 요소가 없거나 잘못 작동하는 경우에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빛이 없는 세상을 경험해보면 빛의 의미를 체험할 수 있고, 전기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보면 전기가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기억도 마찬가지다. 우리 삶에서 기억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아는 방법 중 하나는 기억력이 사라진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헨리 구스타프 몰레이슨(1926-2008) /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마’

▲ 헨리 구스타프 몰레이슨(1926-2008) /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마’ © Henry Vandyke Carter

 

심리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억상실증 환자는 'H.M.'이라는 약자로만 알려졌던 ‘헨리 구스타프 몰레이슨’이다. 헨리는 어릴 적에 자전거를 타다 뇌를 다친 이후에 급성 간질발작을 자주 겪게 되었는데,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뇌손상이 누적되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으며 생명이 위험한 순간도 반복되었기 때문에 결국 병원에서는 그가 26살이 되던 1953년에 최후의 수단으로 간질 신호가 시작되는 뇌 부위를 절제했다. 그 결과, 헨리의 간질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심각한 부작용이 생겼다. ‘선행성 기억상실증’ 즉 수술 이후에 벌어진 모든 일을 일정 시간 이상은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54년도 신문을 매일 새로운 소식인 양 읽었고,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처음 들은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하지만 수술 후에 이사가서 살던 집의 위치나 집 내부구조는 그려낼 수 있었고, 부모의 죽음 같이 정서적으로 큰 충격을 입은 사건은 어느 시점에서는 어렴풋이 기억해낼 수 있었다. 뇌과학자들은 헨리의 사례를 통해서 기억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해마가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헨리의 뇌를 절제한 부분이 해마 부위였다), 감정이 기억을 강화시킨다는 사실도 헨리를 통해 발견한 것들이다. 지금 내 해마는 최소한의 기능을 하고 있지만 만약 내가 알콜을 많이 섭취해서 해마가 탈수상태가 되어 그 기능이 약화되면 나 역시 일시적으로 헨리와 같은 기억상실 상태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했던 말을 반복하며 나는 누구인지 여기는 또 어디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정체성 상실에 빠질 것이다.

 

고뇌하는 모습

 

헨리의 증상 중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매번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점이었다. 어제 산 설탕을 매일 다시 사는 탓에 그의 부엌 찬장에는 설탕이 가득했고, 어제 본 신문을 새롭게 다시 보고, 어제 먹었던 음식도 오랜만에 먹는 것처럼 다시 먹었다. 그는 같은 실수도 반복했다. 그런데 나도 어떤 면에서는 헨리와 비슷하다. 특히 내 옷장을 열어보면 누구나 내가 어떤 옷 색깔을 선호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짙은 청색과 회색, 그리고 카키색 옷뿐이다. 문제는 이것이 내 의도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나는 매번 옷을 사러 갈 때마다 ‘이번에는 뭔가 새로운 색감과 재질의 옷을 구입하겠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옷의 미로를 헤메다 보면 어느새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 결과 이미 옷장에 쌓여 있는 색상과 질감의 바지를 또 한 벌 추가하고, 지금 입고 있는 것과 구별도 되지 않는 셔츠를 또 구입하고 만다. 그 결과 옷장을 열어보면 옷은 많으나 입을 옷이 없는 상황이 되풀이된다.

 

생각해보면 헨리와 나 사이의 간격은 그리 멀지 않다. 과거에 내가 저지른 일을 기억하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면 그 순간 나는 헨리와 같은 곳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좋았던 기억보다 나빴던 기억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저지른 실수들을 내가 이룩한 것들만큼이나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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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장근영
장근영

(심리학자)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과 일본 리니지 유저의 라이프스타일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소년 문화심리학과 매체 심리학, 사이버공간의 심리학 연구를 수행했으며, 영화와 만화, 게임 등을 이용한 심리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팝콘 심리학』 『심리학 오디세이』 『싸이코 짱가의 영화 속 심리학』 『소심한 심리학자와 무심한 고양이』 등을 저술했고,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현재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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