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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답이 그런 건 아니지만 모든 질문은 옳으니까요

- 이달의 답변 -

신용목

2020-12-04

 

 

인문쟁점은?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인문학적 과제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깊은 사색, 허심탄회한 대화 등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더 깊은 고민을 나누고자 만든 코너입니다. 매월 국내 인문 분야 전문가 두 사람이 우리들이 한번쯤 짚어봐야 할 만한 인문적인 질문(고민)을 던지고 여기에 진지한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이달의 질문] 쏟아지는 시집들... 우리는 시를 왜 읽어야 할까요?  / 질문자 - 서효인 시인

 

Q. 시는 누가 읽는 것일까요? 왜 시를 읽어야 할까요? 시집을 만드는 과정보다, 이 시집을 왜 읽어야 하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책을 만드는 입장에서 항상 곤궁했습니다. 신용목 시인님에 답변을 구합니다.



[이달의 답변] / 답변자 – 시인 신용목



A. 모든 답이 그런 건 아니지만 모든 질문은 옳으니까요



계는 저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점점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끝없는 생존경쟁은 이제 경쟁 자체를 시스템화하여 우리의 삶과 영혼을 폐허로 만들고 있습니다. 시스템에는 인간이 없습니다. 자비가 없으며 사랑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체온이 없습니다.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선 하나의 달걀로서의 인간을 위해, 그 인간의 마음과 감각과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모든 것으로서의 인간인, ‘우리’를 위해 쓰지 않는다면 문학은 존재할 이유가... ...

 


급속한 변화

급속한 변화



1. 어떤 대상은 정해진 용법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용도에 따라 각자의 방식으로 규정됩니다. ‘개념화’가 사유와 대상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간극을 통해 운동성을 확보하지만, 한 대상에 걸맞은 개념이 자리 잡기 전에 그 대상은 이미 다른 것으로 변모해 있기도 합니다. 개념이 가진 추상화와 동일성은 현실 구동에 있어서 지극히 미약한 힘을 발휘할 뿐입니다. 의미와 윤리를 지배하던 ‘개념화’의 권위가 사라졌다는 것을, 일각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사유의 상실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사유의 근거가 보편적 이성에서 특수한 경험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실로 세계는 삶의 순간순간을 끝없이 통합하는 과정이 아니라 삶의 순간순간 속에서 끝없이 분산되는 감각 그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문학은 작가와 작품이 가진 아우라를 통해 독자들을 설득하기보다는, 각자의 독서경험 속에서 끝없이 재의미화되는 다면체의 그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제출되었다면, 그것은 뻔히 반복되는 낡고 상투적인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장르로서의 시가 이미 다른 장르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이때,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바뀐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의 장르적 특성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어도 시의 필요성에 관한 질문 앞에 서 있는 자라면, 세계의 변화는 (대)타자의 것이지만, 시의 변화는 자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 이 질문이 가진 어둡고 깊은 수렁 위에 합당한 대답의 널빤지를 놓고 우리를 건너가게 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저는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답신 형식의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그 대답이 어쩌면 대답을 포기하지 않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느낌에 빚진 탓입니다. 아니, 그 수렁이 매 걸음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인지도 모릅니다.



춥고 어두운 겨울 숲

춥고 어두운 겨울 숲



2.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일들. 그에 대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저는 어떤 논리적 관련성도 없는 한 사람이 떠올리곤 합니다. 왜일까요? 실체 없는 그리움과 지속적인 결별이 만들어낸 마음의 웅덩이 같은 것 혹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유예됨이거나 일어나지 않았기에 우리로부터 영원히 사라지고 우리가 영원히 상실하고 만 순간들이기 때문일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시에 대한 예감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허수경 시인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인물정보

허수경 시인(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인물정보)



허수경 시인은 1992년 한국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또 한 번 우리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떠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이곳의 삶이 자신의 사랑을 지옥으로 바꾸기 전에 스스로를 그리움의 편으로 돌려놓았는지도 모릅니다. ‘저곳에서의 고독’을 통해 ‘이곳에서의 사랑’을 지키는 일. 우리가 시인을 만난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인이 한국 문학장에서 활동한 기간은 5년 남짓, 저는 20년 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시인은 28년 전 독일로 떠났습니다.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며 그를 떠올리거나 간혹 시집 뒤에 붙는 해설이나 짧은 추천사를 부탁하기 위해 메일을 쓰곤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를 직접 본 것은 많으면 서너 번. 시인이 한국에 오거나 우리가 독일에 갈 때뿐인데, 우리가 독일에 가는 일은 시인이 한국에 오는 일만큼이나 드물어서, 기껏 서너 번.


정말 우리는 사소한 순간들을 나눠 가지지 못했습니다. 닭갈비에 소주를 한잔 씩 걸치고는 앞치마를 그대로 두르고 집으로 돌아갔다거나, 그도 모자라 전화통을 붙들고 별 시답잖은 이유로 누군가를 실컷 욕하다 앞뒤 없이 울고 마는 시간 같은 것. 우리는 그렇게 사소하고 또 사소해서 소중한 시간을 잠시 유예시키고 있을 뿐이라고 여겨왔습니다. 만일 그 유예가 지금도 유효하다면, 시인이 자신의 산문집에서


“들판에서 토끼들이 새끼를 낳고 있다

다가올 겨울을 어떻게 보내려고

가을 문턱에 새끼를 낳는단 말인가”


라고 써놓았어도, 저 들판에서 태어난 새끼 토끼가 제 잿빛을 빛내며 서글프고 쓸쓸하게 어미가 되어 다시 새끼를 낳는 순간을 우리는 멀리서나마 함께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의 이유는, 더는 멀리서나마 우리가 함께 그 순간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일까요? 시인이 남긴 글과 시들을 붙들고 언젠가 시인을 지나간 혹독한 겨울을 떠올리기 위해서일까요?


미안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새끼 토끼들은 끝내 겨울을 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봄의 들판을 뛰어다니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의 복판에서 싸늘하게 제 생을 마감했을 것이라고 짐작해서가 아닙니다.


아마도 저 새끼 토끼들은 계속되는 가을 속에서 오지 않는 겨울을 영원히 걱정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가장 혹독한 겨울은 우리 앞에 당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 앞에 당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영원히 우리 앞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가을 속에서 축축한 숲에 들어 겨울 땔감을 준비하고 멀찌감치 서서 새끼를 낳는 토끼를 바라볼 것입니다.


저는 허수경 유고집에 실린 글들을 시인이 살았던 도시와 같은 시간을 가진 도시에서 밤새 읽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도시의 밤은 또 이곳의 낮이어서, 우리의 시간은 끝없이 서로를 엇갈림의 운명 속에 세워두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남겨진 글들이 처음엔 끈 떨어진 연 같다가 바람에 휩쓸리는 빈 봉지 같다가, 보이지 않는 먼 하늘을 나는 새에게서 툭 떨어진 흰 깃털 같다가, 또 어느 순간엔 그저 시인의 혼잣말 같다가 다시 우리에게 건네는 귓속말 같다가, 끝내 땔감을 거머쥔 손으로 막 태어난 토끼를 바라보는 눈빛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치 서로가 진 배낭을 자기 배낭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엉뚱한 글과 말에 이끌려 인생을 탕진하고 저 외로운 것만 챙기던 불우한 한 인간으로 서서, 아니 누군가 도둑 맞은 배낭을 짊어진 인생들처럼 우리는 시인의 시가 아닌 우리의 일상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시인이 잠든 숲에는 나무를 건너뛰는 새 소리가 들리고 몇 장의 잎들이 뿌린 듯이 떨어지겠지요. 그뿐일 겁니다. 그러나 빨갛게 불 지핀 난로 앞에서 우리는 또 찬 술을 나눠 마시며 그 눈빛을 눈빛인 채로 두고 한없이 웃고 떠들며 각자의 한 시절을 살아갈 것입니다. 다만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우리의 일상 속에 시인이 함께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슬픔에 직면한 모습

슬픔에 직면한 모습



3. 그렇기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저는 문학을 하는 일이 고통이나 슬픔을 질병으로 분류하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고통이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에게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문학이 저 고통의 정치학과 대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시스템의 부분이거나 노예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가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인간의 진실과 현실의 이면과 세계의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그 고통을 외면하는 방식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의 무늬와 나의 무늬가 깎여서 다치고 부서져서 얻게 되는 고통은, 그것 자체로 자기 자신의 현현이면서 저항의 순간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망할 권리가 있고 우리는 슬퍼할 자유가 있으며 그래서 어느 아픈 꿈속에는 기어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세계는 저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점점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끝없는 생존경쟁은 이제 경쟁 자체를 시스템화하여 우리의 삶과 영혼을 폐허로 만들고 있습니다. 시스템에는 인간이 없습니다. 자비가 없으며 사랑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체온이 없습니다.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선 하나의 달걀로서의 인간을 위해, 그 인간의 마음과 감각과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모든 것으로서의 인간인, ‘우리’를 위해 쓰지 않는다면 문학은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쓴다는 건 우리의 삶을 쓴다는 것이고 우리의 삶을 쓴다는 건 결국 현실을 쓴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현실을 쓴다는 건 무엇일까요? 거기엔 마치 꿈처럼, 불가능을 향해 열려 있는 인간 내면의 지표를 상실한, 제한된 현실의 가능성 속에 갇힌 인간이 있고 일상의 쳇바퀴를 공식으로 규정하는 축소된 삶이 있을 뿐입니다. 끝없는 착취와 절망 가운데 웅크려 잠든 영혼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곧잘 우리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잊곤 합니다. 자유주의를 표방한 세계화와 남북분단으로 대변되는 냉전체제가 공존하는 한국의 현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한순간도 이 체제와 어긋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인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쉽게 잊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시가 우리를 뜨겁게 살아있는 한 명의 인간으로 만들어준다고 할 때, 그 인간은 곧 인류의 얼굴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작가에게 자신의 몸 밖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구분이 언제나 선명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또 분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시대’의 말로 또 다른 ‘시대’와 대화합니다. 어떤 시대도 소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시대의 기억이 없는 자는 다른 시대에 말을 건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글쓰기는 자신의 시대에 대한 혐오와 절망을 안고 다른 시대에 대한 불안과 죽음을 견디는 훈련일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그 이유를 모르는 삶처럼, 여전히 그 타깃을 확정할 수 없는 훈련 같은 것 말입니다.



숨 가쁘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

숨 가쁘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



4. 그러나 정작 왜 시를 읽어야 하냐는 질문 앞에서, 아니 저 질문을 불러온 숱한 조건들 앞에서 제가 서둘러 환멸을 느낄까 봐 두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문학의 구조는 정치의 구조를 조건으로 삼을 수밖에 없고 정치의 구조는 삶의 과정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문학 내부에 반동적으로 자생하는 정치의 물리력이 삶의 욕구를 추동하며, 늘 미학적 고투를 앞질러 여론에 도달하고 나의 욕망을 잡아끌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제가 시 부근에 머무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제가 제 욕망을, 삶을, 정치를 이기는 방법이 따로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실감을 포기하지 않는 것, 숨 가쁘게 달리면서도 문득 뭔가를 놓친 것처럼 뒤를 돌아보는 것, 깨진 돌의 모서리에서도 인간의 언어를 발견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저는 내가 쓰고 싶은 것을,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쓸 수 있는 용기가 내 안에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12월 [이달의 답변] 모든 답이 그런 건 아니지만 모든 질문은 옳으니까요 ⑧

12월 [이달의 질문] 쏟아지는 시집들... 우리는 시를 왜 읽어야 할까요? ⑦

11월 [이달의 답변] 숨은 역사 찾는 발굴과 보전, 개발 쫓겨 뒷전은 곤란 ⑥

11월 [이달의 질문] 문화재 보존 vs 경제 개발, 영원한 딜레마를 풀 해결책은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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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신용목

시인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나의 끝 거창』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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