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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편견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얻은 진짜 사랑

에이슬링 월시 <내 사랑>

이화정

2017-12-21

 

[12월의 테마]
자존감

예술가라는 직책에 ‘여성’이 접목되는 순간, 삶은 지켜내야 할 투쟁이 된다. 세상의 편견과 장벽에 가로막혀 얼룩진 시간을 통과해야 했던 여성 예술가들을 당장 열거할 수 있다. 로댕의 연인으로 천재적 재능을 펼져보지도 못한 채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프랑스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처럼, 그녀와 꼭 닮은 이들이 세상 곳곳에 존재해 왔다. 독일 최초의 여성 표현주의 작가 파울라 베커는 “여자는 화가가 못 돼. 넌 재능이 없어”라는 폭언에도 화구를 둘러메고 집을 뛰쳐나와 자신의 꿈을 이루었고, 몇십 년 동안 남편에게 착취당하며 골방에 숨어서 그림을 그려야 했던 미국화가 마가렛 킨은 용기를 내어 결국 자신의 이름을 쟁취했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 프리다 칼로 역시 장애를 안고도 꿋꿋이 자신의 재능과 사랑을 펼친 인물이다. 편견에 맞선 그녀들의 이야기는 큰 울림을 주었고, 하나같이 영화로 제작되었다.

 
  • 모드 루이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내 사랑>의 포스터모드 루이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내 사랑>의 포스터

성공한 여성 예술가 ‘모드’의 어두운 과거
영화 <내 사랑>의 주인공이자 캐나다를 대표하는 여성화가 모드 루이스(1903~1970) 역시 사회로부터 소외되었지만 자존감을 놓치지 않았던 수많은 여성 예술가의 족적에서 멀지 않은 인물이다. 모드(샐리 호킨스)는 자신이 살던 캐나다 남동쪽 ‘노바스코샤라’는 작은 어촌 마을을 배경으로 그곳의 동식물을 화폭에 그려낸 형형색색의 천진한 그림으로 각광받은 화가다. 마당에 뛰어다니는 개와 고양이, 닭, 구석의 꽃 하나하나 모두가 그녀의 그림에 주요 소재가 됐다.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기교를 부리지 않은 색색의 붓 터치에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열광했다. 특정 유파나 사조에 영향받지 않고, 정규교육도 받지 않고 본능적으로 그린 그림으로 그녀는 나이브 아트(Naive Art)의 선구자로 통한다. 하지만 모드가 유명 화가가 되기까지, 그녀의 성공을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조차 미처 가치를 몰랐던 훌륭한 예술작품들, 집 앞마당에서 5달러에 팔던 작은 그림은 미국의 닉슨 대통령까지 의뢰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고, 이제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민속화가로 작품 당 6,000~20,000달러의 높은 가치로 거래되고 있다.
이런 성공이 있기까지 어둠은 항상 그녀를 따라다녔다. 모드는 화가는커녕 정상생활도 불가능한 신체로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선천성 류마티스 관절염은 그녀의 사지를 점점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구부정한 등에 다리를 눈에 띄게 절뚝거렸고 손가락도 점점 굽어 말년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픈 몸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해 홈스쿨링으로 학업을 마쳐야 했고 집 밖으로 잘 나다니지도 못했다. 늘 사람들의 호기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고, 또래 친구도 없었다. 집안 환경도 어려웠다. 어린 시절에는 돌아가신 부모님 숙모 집에서 눈치를 받으며 얹혀살아야 했고, 남동생은 부모님이 물려준 유산을 탕진하고 그녀를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 영화 <내 사랑>의 장면. 에버렛과 모드 1
  • 영화 <내 사랑>의 장면. 에버렛과 모드 2
    영화 <내 사랑>의 장면. 에버렛과 모드.

편견을 극복하게 해준 자존감
모드의 강점은 모든 사람이 비관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성인이 되면서 원하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독립을 결심했고, 이를 위해 그녀는 외딴집에 혼자 사는 생선 장수 에버렛(에단 호크)의 입주 가사도우미로 취직한다. 고아원 출신으로 홀로 생선을 잡아 납품하거나 고철을 주워 팔며 하루하루 품팔이를 하는 남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외골수인 그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모드를 무시하고 폭언을 퍼붓는다. “이 집 서열 순위를 말해주지. 나 다음이 개와 닭이고 당신이 그 다음이야.” 하지만 기댈 곳 없는 둘은 어느새 함께 있는 시간에 익숙해지고 자연스럽게 부부가 된다. 물론 처음부터 평탄치는 않았다. 모드는 그림은 잘 그렸지만 가사도우미에 영 소질이 없었고, 에버렛은 그런 모드를 몰아붙이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모드는 에버렛의 무뚝뚝함에 주눅 들지 않는다. 두 남녀의 관계이자 멜로의 구도로 볼 때 재밌는 건, 모드가 가진 특유의 사랑스러움이다. 선천적으로 힘든 병 대신 아무래도 모드에게는 타고난 쾌활함이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에버렛이 구박을 하면 할수록 모드는 더 힘을 내는 스타일이다. 못 만드는 음식도 정성껏 준비하고, 삭막했던 회색 벽에는 정성스레 그림을 그려 밝은 기운이 감돌게 만든다. 이런 모드의 노력에 에버렛도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데, 막상 표현은 서툴기 짝이 없다. 그림을 그리는 모드가 방해받지 않도록 성심껏 도와주긴 하지만, 늘 말없이 내색 않고 주위를 맴돌 뿐이다.

 
  • 손을 잡고 있는 사람

한결같은 모드와 달리 에버렛은 모드로 인해 점차 변화해 가는 인물이다. 그런 에버렛의 대사 중 인상적인 구절을 옮겨본다. “내가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건 대부분의 사람처럼 그 역시 편견의 시선을 가지고 모드를 재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드와 에버렛. 둘은 사회로부터 소외받아왔다. 어쩌면 각각 혼자였다면 그 시선을 견디며 평생 외롭게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둘이 되면서, 그들의 공간 안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게 된다. 모드는 에버렛에게 “사람들도 당신 싫어해요, 하지만 난 당신 좋아해요” 하고 말해 줄 수 있는 용기 있는 여성이다. 남과 다른 시각으로 남이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과 가치에 눈을 뜨고,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당당하며 다른 누구도 자신 있게 사랑할 수 있는 여성이다. 화가로 명성을 얻게 해준 밝고 쾌활한 그녀의 그림 역시 이런 자존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붓 한 자루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그녀는 늘 단순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그림에 투영했다. 눈앞에는 적막하고 외딴 어촌마을이 펼쳐져 있음에도 그녀는 그 무채색에 잠식당하지 않고, 우울하지 않은 톤으로 그 풍경을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예술가였다. 비록 아픈 육체는 생의 끝까지 그녀를 괴롭히고 구속했지만,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그녀의 내면은 반대로 한없이 자유로웠다. 모드가 마지막 순간 에버렛을 향해 “난 사랑받았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내내 마음을 울린다. 그건 어느 한 순간 누구로부터 사랑을 얻길 바라지 않고, 매 순간 당당하게 사랑을 가꾸어 온 사람으로서 획득한 진짜 사랑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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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화정
이화정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팀장. 영화 속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 즐겨 한다. 저서로 여행 에세이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과 인터뷰집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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