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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지우개로 지운 듯 기억나지 않는 일이 다반사인데, 잊으려고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처럼 잊히지 않을 때도 있으니,

박태근

2017-10-26

삶,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지우개로 지운 듯 기억나지 않는 일이 다반사인데 잊으려고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처럼 잊히지 않을 때도 있으니, 기억나지 않는 일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여기고 잊히지 않는 일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렇듯 기억의 잠재력을 잠재우고 그저 기억나는 대로, 그저 잊히는 대로 살아가려는 답답한 태도에 일침을 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의 달인 혹은 기억의 천재라 불릴 만한 이들의 삶과 도전을 살펴보며 잊고 지냈으나 내 안 어딘가에 잠자고 있을 기억의 가능성과 소중함을 되살려보자.

 

책표지 :『1년 만에 기억력 천재가 된 남자』 조슈아 포어 지음, 갤리온

▲ 『1년 만에 기억력 천재가 된 남자』 조슈아 포어 지음, 갤리온


기억의 방법, 기억의 보람


여기 56장의 서로 다른 카드가 있다. 물론 카드의 구성은 익히 아는 대로다. 클로버와 하트 등 네 가지 그림에 2부터 10까지 숫자와 Q, K 등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카드. 그런데 이를 마구 뒤섞은 후 한 번씩 보여주고 나서 순서대로 외워보라고 한다면 어떨까. 대다수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며 시도하지도 않고, 일부는 호기롭게 도전해 대여섯 개의 카드를 외우다가 실패하고 만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1분 안에 그림과 숫자의 차례를 정확하게 맞춰서 우리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도대체 이런 기억력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1년 만에 기억력 천재가 된 남자』의 주인공 조슈아 포어는 2005년 과학 기자 신분으로 미국 최대 규모의 기억력 대회인 전미 메모리 챔피언십을 취재하러 갔는데, 다음 해인 2006년에는 같은 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거머쥔다. 그는 타고난 천재일까? (믿을 수 없지만) 그 역시 자동차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종종 까먹어 고생하는 평범한 기억력의 소유자다. 그렇다면 1년 동안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는 기억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기억법을 습득하고, 하루에 한 시간씩 훈련을 쌓으며 스스로 고수가 되었다는데, 그렇다면 그의 삶도 확연히 달라졌을까? 물론 기억력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불필요한 걸 기억하고 중요한 걸 잊으며 산다. 물론 카드 순서보다 중요한 걸 깨달았으니, 그가 소개하는 기억의 방법은 잊어도 그가 전하는 기억의 보람은 기억하면 좋겠다. “좋아진 것은 기억력뿐만이 아니다. 생각이 깊어지면서 나와 세상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 어떤 것이든 기억하려면 그것에 시선을 고정하고, 더 자세히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전보다 나 자신과 세상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책표지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 지음, 갈라파고스

▲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 지음, 갈라파고스


기억이란 긴 여정의 끝, 망각


기억과 망각 가운데 하나만 고를 수 있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극단적인 선택지라 답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망각보다는 기억을 택하는 편이 유리하지 않을까. 현명한 판단을 위해 설명을 붙이자면, 기억을 택하면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마음대로 잊을 수 없으니 무엇을 기억하고 기억하지 않을지도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고, 망각을 택하면 어떤 것도 기억할 수 없으니 무엇을 망각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어느 쪽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그 결과가 어떨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기억을 택한, 아니 기억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가 30여 년에 걸쳐 연구한 결과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이자 러시아의 언론인 솔로몬 V. 셰르솁스키의 이야기다. 그는 회의 시간에 상사로부터 왜 회의에 집중하지 않느냐며 핀잔을 듣는다. 그런데 그는 회의에 집중하지 않았으면서도 회의의 모든 내용을 줄줄이 읊으며 상사를 무안하게 만든다.(아, 부럽다. 역시 기억력은 좋은 것!) 이에 놀란 상사가 기억력 테스트를 권하고, 이때부터 셰르솁스키의 삶은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만다. 그는 그야말로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였는데, 수십, 수백 개에 이르는 잡다한 목록을 그대로 외우는 것은 기본이고, 스쳐 지나간 거리의 모습이라든지 기억도 나지 않을 언젠가 먹었던 음식의 종류와 상태라든지, 그러니까 무엇이 기억나지 않느냐고 묻는 게 빠를 만큼 기억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망각하기 위해 기억나는 이미지 위에 반투명 필름의 이미지를 덮어씌우기도 하고,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을 적어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걸 기억하려 시도하기도 하지만, 결국 모두 실패하고 만다. 자, 이제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책표지 :『기억의 비밀』 래리 스콰이어, 에릭 캔델 지음, 해나무

▲ 『기억의 비밀』 래리 스콰이어, 에릭 캔델 지음, 해나무


우리는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권의 책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이번에는 기억력과는 무관한 이들의 이야기다. 『기억의 비밀』을 밝히는 두 사람은 기억이 저장되는 신경학적 매커니즘을 밝혀낸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릭 캔델과 기억의 형태가 여럿이며 이에 따라 다른 뇌 회로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밝혀 주목 받은 인지신경과학자 래리 스콰이어다. 이들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오늘날 생물학 버전으로 바꾸면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이고, 뇌과학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최신 버전으로 바꾸면 “나는 뇌를 가졌다, 고로 존재한다”로 정리해야 온당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기억과 관련하여 표현하면 “우리는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일 수 있다고 하겠다.
이 책은 그간 기억에 도전한 인류의 성과를 과학 언어로 정리하는데, 대표적인 두 방향은 ‘분자’와 ‘정신’이다. 전자는 생물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후자는 인지심리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들은 두 분야를 한데 모아 ‘인지분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관점과 체계를 선보인다. 꽤 복잡해 보이지만 그간의 연구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기억의 출발점일 뿐이라는 게 이들의 고백이다. “기억이 어디에 어떻게 저장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여전히 보잘것없는 수준”이고, “과거에 꽃병과 마주친 일이 어떻게 기억에서 인출되는지, 그 꽃병이 점차 망각될 때 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고 하니, 기억과 망각의 선택을 묻는 질문이 새삼 초라해진다. 그렇지만 출발하지 않으면 도착도 할 수 없는 법. 탄탄한 출발점을 바탕으로 ‘기억의 비밀’을 넘어 ‘기억의 내일’을 그려본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언가를 기억하고 잊으며 살아가는 우리 삶에 대한 진지하고 진실한 태도 아닐까 싶다. 다 잊어도 이것만은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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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태근
박태근

<알라딘> 인문 MD. 일명 ‘바갈라딘’으로 불린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 인문 MD로 일하고 있다.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 연구원으로 출판계에 필요한 목소리를 전하며, 여러 매체에서 책을 소개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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