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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가까워지는 게임과 한글, 그 과거와 미래

- 장르문화 속 인문 찾기 -

이경혁

2020-10-27

 

 

장르문화 속 인문찾기는?



지만 모든 한글 번역이 훌륭한 게임 경험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왈도체’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한 속칭 ‘발번역’은 게임 번역계의 웃지 못할 흑역사이기도 하다. “Hello there! Mighty fine morning, if you ask me, I’m Waldo.” 대략 ‘좋은 아침이군! 난 왈도라고 해’ 정도로 번역될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보면, 나는 왈도.”

 

 

 

한글이 필요 없었던 초창기 디지털게임들


 

초창기 디지털게임은 언어와 매우 무관한 매체였다. ‘테트리스’나 ‘팩맨’은 한국에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지만, 한글판이 없었다. 80년대 오락실 풍경을 언어적으로 접근해보면 매우 새로운데, 한글이 나오는 게임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TV나 라디오, 신문 잡지와 영화가 모두 한국어 중심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대중문화에서 디지털게임은 유일하게 한국어가 하나도 없는 매체였다.


80년대 오락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풍경에는 게임 제목을 오락실 주인아저씨가 매직으로 슥슥 종이에 대충 써서 붙인 모습도 들어갔다. ‘PACMAN’이 ‘팩맨’으로, ‘Bubble Bobble’이 ‘보글보글’로 적히는 정도는 훌륭했지만, 간혹 게임을 잘 모르는 주인장에 의해 SF적 경찰 특공대를 가리키는 게임 제목 ‘E-SWAT’가 ‘이수와트’로 붙어 있기도 했다. 주호민의 만화 ‘신과함께’에는 ‘1945’로 추정되는 비행슈팅 게임 제목을 할아버지 주인장이 ‘비행기’로 붙여놓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신과함께. 저승편 이승편 신화편. 주호민 만화

만화 신과함께 표지(이미지 출처 : 알라딘 서점)



풍성해진 의미만큼 중요해진 한글판의 의미



제목만 한글로 써있어도 게임하는 데 문제가 없던 시절은 이제 옛날 일이 되고 말았다. 2020년의 디지털게임들은 과거처럼 단순한 규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여전히 언어를 크게 타지 않는 게임들도 많지만, 발전한 컴퓨터 기술은 게임 안에 더 많은 규칙과 문화적 코드들을 구현할 수 있게 하며 언어의 활용량을 크게 늘렸다.


롤플레잉이라는 게임 장르가 대표적이다. 특정한 이야기를 담은 게임 세계 안에 플레이어가 주인공으로 뛰어드는 이 장르에서 언어는 이야기라는 서사적 흐름을 이끌어나가기 위해 매우 큰 비중으로 자리한다. ‘엘더 스크롤’ 시리즈나 ‘울티마’ 시리즈,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같은 롤플레잉 게임들은 방대한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한 별도의 백과사전까지 마련되어 있고, 등장인물들의 풍부한 대화를 통해 게임을 진행하기 때문에 특정 언어를 모를 경우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90년대 가정용 콘솔 게임기나 PC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롤플레잉 게임들은 정식 라이선스 유통이 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영어나 일본어 그대로 번역되지 않은 버전을 통해 소개되었다. 많은 게이머들이 언어의 장벽 앞에서 통곡했다. 뭔가 재미있어 보이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는 상황은 여러 가지 해법을 낳았다. 영어의 경우 그래도 나이 든 사람들은 대충 플레이할 수 있었지만, 세세한 디테일은 게임잡지 등이 제공하는 ‘대사집’을 통해 해결하였다. 아예 직접 해당 언어를 배워버리는 의욕 넘치는 게이머들도 적지 않았다.


한국의 게임 시장이 나름 세계적으로 유의미한 위치에 놓이고, 라이선스에 기반한 정식 배급이 이루어지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정식 번역을 거친 게임들이 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방대한 세계관과 어지간한 중편 소설 분량을 능가하는 게임 내 텍스트양을 자랑하는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는 업보와 속죄라는 철학적 주제를 다루며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게임으로 자주 거론되는데, 국내에서 이러한 평가가 가능했던 것은 전문 번역가를 거친 정식 한글판이 유통되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번역 결과물 중에서도 게이머들이 모범적 사례로 꼽는 작품은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다. 단순히 게임 내 텍스트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1차원적 작업에 머물지 않고, 게임 안의 지명이나 인물의 별명, 아이템 이름이나 기술명까지도 충분히 검토를 진행해 의미 있는 한국어 번역물을 내놓은 바 있었다.


‘크로스로드’로도 번역할 수 있었던 지명 ‘crossroad’는 ‘교차로’로 나왔고, 오랫동안 한국 판타지 계에서 ‘파이어볼’, ‘아이스볼트’등 원어명 자체로 통용되었던 마법사의 기술들을 ‘화염구’, ‘얼음화살’과 같은 한국어로 번역해 낸 결과는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주요 악역 리치왕이 휘두르던 저주가 깃든 마검 Frostmourne을 ‘서리한’으로 번역해낸 것은 게임 분야의 한국어 번역물을 이야기할 때 항상 첫손에 꼽는 훌륭한 번역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4 화염구. 피해를 6 줍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세계관의 카드게임 ‘하스스톤’은 Fireball이라는 마법주문을 ‘화염구’로 바꾼 블리자드 세계관의 훌륭한 한글화로 더욱 빛났다. 한때 판타지 세계의 마법은 모두 영어였지만, 이제는 누구나 ‘화염구’라는 단어를 어색하지 않게 쓰게 되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게임-하스스톤 게임DB)



엉망인 한글화는 필요 없다, ‘왈도체’의 흑역사



하지만 모든 한글 번역이 훌륭한 게임 경험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왈도체’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한 속칭 ‘발번역’은 게임 번역계의 웃지 못할 흑역사이기도 하다.


‘왈도체’는 롤플레잉 게임 ‘마이트 앤 매직 6’의 한글 번역판이 엉망으로 나온 데서 파생된 유행어다. ‘왈도’는 원래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로, 플레이어가 다가가면 인사를 하는데, 이 인사는 영어 원문이 다음과 같았다.

“Hello there! Mighty fine morning, if you ask me, I’m Waldo.”

대략 ‘좋은 아침이군! 난 왈도라고 해’ 정도로 번역될 이 문장은 게임 안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보면, 나는 왈도.”



Might and Magic. vi THE MANDATE OF HEAVEN. NEW LOAD CREDITS EXIT

‘왈도체’의 기원이 된 ‘마이트 앤 매직 6’의 시작 화면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비단 위 사례뿐 아니라 수많은 오역을 만들어낸 이러한 기계적이고 잘못된 번역체를 게이머들은 통틀어 ‘왈도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패키지 게임의 판매량이 부족해 전문번역 투자에 대한 가성비가 나오지 않는 한국의 상황 덕분에 해외게임 번역은 대체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비전문가의 수준 낮은 번역에 그치곤 했는데, 이에 분노한 게이머들이 직접 번역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게이머들은 훌륭하게 만들어졌지만, 언어 문제로 한국에서 유통이 어려운 게임들에 직접 달라붙어 번역 하기 시작했다. ‘문명’ 시리즈, ‘폴아웃’ 시리즈 등 공식한글화가 되지 않은 여러 유명 게임들에 게이머들이 직접 프로젝트팀을 꾸려 달라붙었다. 팀을 짜고 번역단어를 통일하고 서로 문맥을 교정해 가며 수많은 게임이 아마추어 번역팀들에 의해 훌륭한 수준의 한국어판 게임으로 재탄생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유저(사용자) 한글 패치’가 본격화한 것이다.


해당 게임의 마니아들이 직접 달라붙어 번역해 낸 결과물인 유저(사용자) 한글화 게임들은 게임마다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훌륭한 퀄리티의 산출물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한국 게임 시장도 과거보다 의미 있는 규모로 커져 많은 해외게임들이 공식 한글판을 지원하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아마추어 번역팀의 산출물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19년 출시된 후 평단과 게이머들의 높은 평가로 주목받은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은 방대한 대사량을 자랑하는 롤플레잉 게임으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한글판이 없어 많은 한국 게이머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다. 이후 게이머들이 자발적으로 수행한 아마추어 버전의 한글 패치가 개발사에 의해 정식으로 채택되면서 2020년부터 100% 한글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며 지평을 넓힌 바 있었다.



디스코엘리시움 게임화면

▲롤플레잉 어드벤쳐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의 게임화면(이미지 출처 : 디스코 엘리시움 공식 홈페이지)



점차 늘어나는 한글판 게임, 게임문화의 디딤돌



세계 속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에 이제는 게임이 한 자리를 크게 차지한다. 임요환, 페이커와 같은 e스포츠 스타부터 시작해 ‘게임 잘하는 나라’로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존재하는 곳이 한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국내에 발매되는 여러 게임 중 한글 지원이 되는 게임의 가짓수는 게이밍 문화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와 비교해볼 때 턱없이 모자란 수준에 머물렀다.


최근 들어 점점 신규 대작 게임들의 공식 한글화가 이뤄지는 추세가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한글이라는 문자가 한국어 문화권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해볼 때, 더 많은 게임의 한글화는 곧 더 폭넓은 한국 문화권에서의 게임 대중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무턱대고 모든 게임의 100% 한글화를 바랄 수는 없다. 잘 준비되지 않은 한글화는 도리어 앞서 언급한 ‘발번역’의 사례처럼 게임 자체를 망쳐버릴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전문 번역가를 투입하고 게임의 앞뒤 맥락을 재어 가면서 수행하는 한글 번역은 당연히도 높은 비용을 추가로 투자해야 하는 작업이어야 하고, 번역의 질에 대한 보장이 있어야 한다.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번역은 되려 게임 번역 전체의 평균 질을 떨어뜨리며 악순환을 낳을 우려를 키운다.


발전한 기술만큼이나 디지털게임들은 더 많은 의미를 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오늘날의 디지털게임은 이제 사회와 인간을 비춰내는 시대성 있는 매체로의 가능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만 그 생산의 중심과 기원이 북미와 일본이라는 두 축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앞으로도 상당수의 게임 생산이 해외에서 이루어질 공산이 크다. 이때 필요한 것은, 좋은 내용을 담은 양질의 해외게임들이 훌륭한 번역을 통해 국내 게이머들에게도 보편적으로 플레이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다.


더 많은 보편적인 게이머들이 한글화된 게임을 통해 더욱 풍성한 의미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하나의 게임이 품은 의미를 좀 더 쉽고 편안하게 경험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환경의 초석에는 훌륭한 수준의 한글 번역이라는 추가 작업이 요구된다. 게이머들이 직접 한글 패치를 제작할 정도로 요구가 많은 한국 게임문화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해외에서 제작되는 모든 게임이 제작 단계에서부터 선택 가능한 언어에 한국어를 추가하는 프로세스가 보편화하는 순간도 그리 머지않아 보인다.

 




[장르문화 속 인문 찾기] 만화, 전통을 계승하고 전복하며 탄생한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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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혁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겸 연구자
기고와 강연, 방송을 통해 게임의 사회적 의미를 모색한다. 저서로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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