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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구스 반 산트 <프라미스드 랜드>

이화정

2018-01-23

 

재개발의 늪에 빠진 삶의 터전
얼마 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공동의 리듬, 공동의 몸> 공동체 아카이브 전이 떠오른다. 전시 중 한 부문은 아파트 철거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익숙한 풍경, 친밀한 공간의 리듬을 단숨에 해치는 일이라는 시각을 바탕으로 서울의 아파트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을 담았다. 건물 철거 당시 을지로의 소리를 채집해 들려주는 방이 인상적이었는데, 아무 장치도 없는 방 안에 들어서면, 곧장 콘크리트를 부수는 소음 사이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오래전부터 읊조리던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를 그 방 안에서 소리로 듣는 듯한 경험이었다. 성북동 산에 새로 번지가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 재개발 중인 아파트

마침 정재은 감독이 준비 중인 다큐멘터리 <고양이들의 아파트> 소식을 들었던 참이라, 그 전시가 새삼 더 다가왔다. 다큐멘터리는 2017년 7월 철거하는 둔촌 주공아파트 기록을 하던 중 그곳에 살던 250마리의 길고양이가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여러 단체와 주민들이 길고양이의 생태적 이주를 위해 뜻을 합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었다. 모임명은 '둔촌주공아파트 동네 고양이의 행복한 이주를 준비하는 모임'이다. 정재은 감독이 처음부터 고양이들의 사정에 주목한 건 아니었다. 먼저 그는 한국 아파트 콘크리트의 생애주기를 다룬 <아파트 생태계>를 준비 중이었다. 솟아오르는 아파트 가격 기대로 재개발과 재건축을 쉬지 않는 한국의 아파트들, 그리하여 기껏해야 30~40년 주기로 모습이 바뀌는 서울에서 아파트 재개발을 둘러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파트를 연구하는 도시학자부터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파트 키드까지, 다양한 이들이 오래된 아파트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감독은 고양이 역시 둔촌 주공아파트의 주민 중 하나로 인식한 셈이다.

개발을 둘러싼 저마다의 사정
사실 내 주변만 하더라도 반포 주공아파트를 비롯해 재개발에 들어간 아파트에 살았던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정감 어린 회고부터 시작해서, 재개발의 가치 아래 사라지는 것들을 추억할 일들은 얼마든지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개발을 통한 이익 창출에 무작정 반대를 표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지 싶다. 당장 재개발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을 생각했을 때 만약 내가 그 수익의 수혜자라고 한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그런 의미에서 개발을 둘러싼 이권의 충돌을 그린 구스 반 산트 감독의 <프라미스드 랜드>는 먼 미국 땅의 이야기지만 우리에게도 현실적으로 와 닿는 이야기이자, 우리가 곱씹어야 할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 영화 <프라미스드 랜드>영화 <프라미스드 랜드>

배경이 되는 지역은 미국의 농촌 마을인 맥킨리라는 지역이다. 경기 하락으로 농가들은 수익 창출에 한창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에, 마침 이 지역의 땅밑에 거대한 천연가스가 매립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세계 최대 규모의 에너지 기업 ‘글로벌’은 이 지역의 수익성을 높이 사기로 한다. 만약 채굴을 허락해준다면, 당장의 수익은 물론 당신의 자녀들이 돈 걱정 없이 교육을 받으며 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을 주겠노라고. 물론 이 채굴로 인해 땅이 오염될 수 있다는 먼 미래의 일은 숨긴 채 말이다.

중요한 협상을 진행하러 글로벌 사에서 파견한 인재는 협상 무패 기록을 가진 최연소 부사장 스티브(맷 데이먼)이다. 이 일만 잘 성사가 된다면 뉴욕 본사 입성도 떼 놓은 당상이다. 스티브는 거액의 돈만 쥐여주면 사정이 딱한 주민들의 동의야 며칠이면 끝날 줄 알고 자신만만하게 이곳으로 오지만, 막상 마을 주민들과 만나면서 이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환경단체 소속의 더스틴(존 크래신스키)은 개발로 인해 황폐해진 자신의 농장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스티브를 곤경에 빠뜨린다. 마을 사람들이 존경하는 과학교사 프랭크(할 홀브룩) 역시 개발을 극구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는 이미 채굴에 동의한 마을 사람들에게 입장을 재고할 것을 종용하기까지 한다. “우리에게 돈을 쥐여주는 게 돕는 거라 믿겠지만, 그건 땅이 파괴되는 걸 묵인하는 대가 아닌가.” 뼈가 있는 지적에 스티브 역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다.

 
  • 영화 <프라미스드 랜드>의 장면 스티브와 더스틴의 만남
  • 영화 <프라미스드 랜드>의 장면 주민 투표 당일, 단상 위에 선 스티브
    영화 <프라미스드 랜드>의 장면. (왼쪽) 스티브와 더스틴의 만남 (오른쪽) 주민 투표 당일, 단상 위에 선 스티브

개발과 보존의 이분법 그 이상의 질문
<프라미스드 랜드>가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예상하는 대로 개발을 추진하는 쪽과 이에 반대하는 이들의 다툼을 그린 이분법으로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 역시 채굴로 인해 환경이 파괴될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먼 미래 지구의 환경을 근심하기에는 당장 목전의 수익이 아쉬운 것이다. 뼈 빠지게 일하고도 수익은 없고 대출 이자 갚기도 빠듯해 급기야 나고 자란 터전을 떠날 결심까지 해야 하는 것이 농촌에 당면한 현실이다. 영화는 거액의 보상금 제안에 기뻐하는 이들의 표정을 놓치지 않지만, 그들을 비난하는 시선을 취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봤을 때 그들을 설득하는 입장인 스티브는 거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러 온 ‘악인’으로 묘사될 캐릭터지만, 그 논리만으로 보기에는 다소 복잡한 굴곡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평생을 농부로 살았던 할아버지와 살며 땅의 소중함을 알았던 스티브는 협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결국 더 이익이라는 믿음으로 이 일을 행한다. 자신의 논리 안에서 보자면 그들을 돕자는 취지다. 괜히 버티다가 나중에 거대기업에 헐값으로 터전을 뺏기는 대신, 좋은 조건으로 거래를 할 수 있는 지금 경제적인 실리를 취하라는 생각이다.
<프라미스드 랜드>는 누구도 도덕적 심판을 가할 수 없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안에서, 각 캐릭터를 바라보고, 우리 역시 각각의 입장에 한번 처해 보라고 말한다. 실제 환경 운동에 앞장서는 배우 맷 데이먼과 존 크래신스키가 의기투합해 각본을 쓴 작품으로, 그들의 고민이 반영된 만큼 기존에 나온 환경영화보다도 더 깊은 질문을 던져준다. 우리 모두 각자 땅의 소유주인 양 행세하며 살고 있지만, 지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형태의 지구를 남겨 줄 것인가. 당장의 이익 말고도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개발이 주는 당장의 이익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피해갈 수 없는 질문과의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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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화정
이화정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팀장. 영화 속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 즐겨 한다. 저서로 여행 에세이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과 인터뷰집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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