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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사랑하는 일>

- 소설×인문 -

장영란

2023-01-31

리드문

 


<사랑하는 일> 책 표지 (출처: 알라딘)

<사랑하는 일> 책 표지 (출처: 알라딘)

 

 

사랑의 오만가지 방식들



은호와 영지는 동성연인이다. 두 사람은 사랑한다. 모두의 축복을 받지는 못하지만 두 연인이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문제는 사랑의 방식에 있다. 가족과 거의 일정하면서까지 영지를 택한 은호는 사랑에 육체적 관계, 즉 섹스가 필수라고 생각한다. 반면 영지는 그런 것쯤 없어도 사랑은 유지된다고 말한다. 심지어 은호가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해도 상관없다고까지 이야기하니 은호로서는 이것이 과연 사랑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은호의 아빠는 아빠대로, 엄마는 또 엄마대로, 동생과 할머니는 또 자기들 나름대로 사랑에 대해 말하거나 사랑을 표현한다. 자신만이 진짜 사랑을 알고, 참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은호는 당황하고 분노하고 혼란스러워한다.


김지연의 눈부신 단편 <사랑하는 일>은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일종의 ‘일’임을 잘 보여준다. 일은 고되고 힘들며 때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흔히 사랑을 말할 때 배제하는 그 ‘일’의 고단함은 감정의 크기에 비례해 커지기 마련이다. 이혼을 한 아빠는 은호 앞에서 울면서 말한다. 아빤 엄마를 사랑했다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은호가 영지를 생각하는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일’이기에 각자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 아빠는 아빠의 방식으로 사랑이라는 일을 처리했고, 그것은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즈비언인 은호와 영지의 사랑하는 일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혼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당분간 불가능하다. 6년을 사귄 사이지만 은호의 가족들은 아직도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소설의 말미에는 이해와 화해의 흔적이 조금은 보이지만 그들이 서로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일은 아마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일의 결이 다르고 그만큼 이 세상에는 오만가지 방식의 사랑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섣불리 답을 내놓을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사랑이라 부르는 이 일을 기꺼이 감내하게 하는 원동력은 또 무엇일까? 왜 사랑은 종종 어긋나는 걸까?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왜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끙끙대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은 없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사랑하는 일’ 그 자체이다. 그것이 남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사랑이라 해도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을 기꺼이 누리며 ‘그저 우리 할 일을 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의 태도이리라.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시간은 우리의 마음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흘러가기에. 무정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란 결국 사랑이 아닐까? 나만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일, 그것만이 유한한 삶의 우울을 견디는 방법임을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전건우/소설가

2008년 단편소설 ‘선잠’을 발표하면서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장르 소설의 자장 안에서 활동하며 <밤의 이야기꾼들>, <소용돌이>, <고시원 기담>, <살롱 드 홈즈>, <마귀>, <뒤틀린 집>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이외에도 여러 앤솔로지에 단편을 실었으며 개인 단편집과 에세이 등을 선보였다. 여전히 재미있는 이야기에 목말라 하며 소설의 궁극적인 가치는 ‘재미’에 있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일은 이해하는 일이다


 

책 <니토마코스 윤리학> 표지 (출처: 알라딘)

<니코마코스 윤리학> 책 표지 (출처: 알라딘)



“아무리 좋은 것들을 모두 갖더라도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삶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8권 첫 부분에서 처음 이 구절을 발견하고 놀랐던 적이 있다. 마침 아리스토텔레스의 너무 진지한 설명 방식에 살짝 질려가고 있었는데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나의 무료함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로맨티스트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사랑’이 사람들을 결합하고 연대시킨다고 생각했다. 특히 국가에는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는데 화합을 가져오는 데는 정의보다는 사랑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전히 진지해 하고 있는데 나만 진지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아(philia)’라는 표현으로 친구들 간의 사랑을 비롯해 부모-자식 간의 사랑, 형제들 간의 사랑,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사랑 등을 모두 포괄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 개념은 우리말로 ‘우정’ 또는 ‘친애’라 번역되는데, 우정은 너무 좁은 의미이고 친애는 상용되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사랑’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김지연의 「사랑하는 일」에서 ‘은호가 사랑하는 일’과 ‘은호를 사랑하는 일’로 나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은호가 사랑하는 일은 에로스에 가깝고 은호를 사랑하는 일은 필리아에 가깝다. 김지연의 ‘사랑하는 일’은 특정한 사람의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랑하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사랑하는 일’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대상 때문이다. 은호가 사랑하는 대상은 동성이다. 그렇지만 은호가 ‘사랑하는 일’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은호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불안이나 두려움을 겪는다. 은호가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단지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은호의 사랑을 아주 평범하게 그린다.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고 언제든지 나눌 수 있는 사랑처럼 그려낸다. 단지 은호가 사랑하는 사람이 동성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그래서 은호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은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동성 간의 사랑

동성 간의 사랑

 


그러나 은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나는 솔직히 은호가 사랑하는 일보다는 ‘은호를 사랑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은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바로 가족이다. 여기서는 은호가 동성을 사랑한다고 커밍아웃하는 과정은 그려지지 않는다. 이미 은호는 자신의 갈등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 상태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은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분노하거나 침묵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은호를 사랑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이 생각하는 ‘은호’가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은호는 여전히 은호인 것인데 은호가 아닌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은호가 아닌 것’은 바로 동성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호를 ‘미친년’, ‘정신 나간 년’(김지연, 「사랑하는 일」, 136쪽)으로 만든 것이다. 그들이 사랑해왔던 은호는 ‘보통의’ 또는 ‘정상’적인 여자이다. 물론 은호는 무엇이 ‘보통’이고 무엇이 ‘정상’인지를 물을 것이다. 그렇지만 할머니 외에는 아무도 은호에게 감히 묻지 않는다.


할머니만이 은호가 미쳤다고 하면서 “너무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같은 책, 136쪽)고 말한다. 그런데 은호는 오히려 할머니에게 가장 큰 배신감을 느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할머니는 내 편을 들어줄 거라 믿었기 때문”(같은 책, 136쪽)이다. 할머니와 은호 모두 배신감을 느낀다. 할머니는 은호라고 생각한 것을 너무 사랑했지만 ‘은호 아닌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나는 할머니가 날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할머니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그냥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호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분노가 아니라 슬픔을 느껴야 한다. 할머니의 닫힌 세계 속에서는 누군가 벽을 깨고 나갈 수 있도록 두드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호는 할머니에게 상처만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할머니가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했기 때문에 이해할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은호도 할머니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것은 아니지 않을까?


은호는 왜 할머니가 미쳐 날뛰는 것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할까? 할머니라는 세대를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머니가 이해할 수 있도록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 것이 비극일 뿐이다. 할머니는 은호를 이해해야만 하는데 할 수가 없어서 분노해버렸고, 은호는 이해를 받고만 싶은데 받을 수가 없어서 분노해버린 것이다. 할머니와 은호 모두 서로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미친 듯이 분노해버렸다. 할머니는 은호에 대한 사랑이 부정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할머니에게는 자신이 사랑한 은호가 ‘은호가 아닌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은호는 단지 사랑의 대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은호는 여전히 ‘은호’였기 때문에 할머니를 부정해버린 것이다.



세대차이

세대 차



반면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은호에게 침묵하거나 덤덤하다. 은호의 부모세대는 이미 동성애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세대이다. 할머니처럼 미쳐 날뛰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듣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호는 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밝혔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5년이나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은호는 어머니가 “그날의 대화를 기억 속에서 삭제해버린 듯”(같은 책, 126쪽)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침묵은 은호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부단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이해할 시간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단지 시간이 많이 필요했을 뿐이다. 어머니는 결국 은호를 다시 사랑하는 일을 시작했다. 아빠와 이혼하고 캐나다로 가면서 한국에서 살기 힘들면 여자친구와 함께 오라고 말한다(같은 책, 150). 어머니는 은호의 사랑을 이제 이해했고 은호의 삶을 염려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은호를 사랑하는 일이 아직 힘겹다. 은호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사회 속 기득권자이다. 사실 가장 특이하게 다가온 인물이 아버지였다. 은호가 커밍아웃했을 때 아버지가 “덤덤한 편”이었던 이유는 현실을 부정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은호를 만나서 반복적으로 설득하려 했던지 은호는 아버지에게 치를 떠는 것으로 나온다. 결국 은호가 아버지를 만나준 것은 내 집을 상속받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은호는 결국 아버지를 견뎌내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린다. 아버지가 아직 은호의 사랑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은호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가족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굳이 동성애 사실을 소문낼 필요는 없지 않겠냐고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영지는 “거짓말 안 하고 살겠다”고 말하고, 은호는 “거짓말 안 하고 사는 정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같은 책, 141쪽)고 말한다.


은호는 자신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칼날 같은 말들을 퍼붓는다. 아버지가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제대로 사랑하지도 못했다고. “씨발 진짜 아빠가 사랑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어!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야, 그게 무슨 사랑이야!”(같은 책, 143쪽)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그래도 아빤 우리 딸 사랑해”, “아, 진짜! 지랄하지 좀 마!”(같은 책, 144쪽). 아버지와 딸 간의 대화를 듣다가 문득 “도대체 사랑하는 일이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은호는 ‘사랑하는 일’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방식과는 상관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옳다’ 또는 ‘그르다’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은호가 아버지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다’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이라 말하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에 대해 연민을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아버지가 은호에 대해 분노를 터트리며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은호에게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울고 있는’ 아버지를 그린 것은 의도적으로 보인다. 아버지만이 은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름 사랑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계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식이 ‘살아갈’ 세계에 대해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여기서 아버지가 다른 누구보다도 불행한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가 ‘살아갈’ 세계에서는 이 소설이 “유쾌한” 여성퀴어소설(같은 책, 155)이라 평가받는다. 그런데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유쾌한”이란 말을 내뱉기 어렵다. 은호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은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은호를 아직 이해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일은 이해하는 일이다.


 


 

[소설 x 인문] 김지연 <사랑하는 일>

- 지난 글: [소설 x 인문]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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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란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네르바교양대학에 재직 중이다. 그리스 신화와 철학 및 문화비평을 중심으로 다양한 저서와 논문을 썼다. 지은 책으로 『영혼이란 무엇인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호모 페스티부스 : 놀이와 예술과 여가로서의 삶』, 『죽음과 아름다움의 신화와 철학』, 『소크라테스를 알라』, 『플라톤의 국가, 정의를 꿈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신들의 전쟁과 인간의 운명을 노래하다』, 『장영란의 그리스신화』, 『위대한 어머니여신』, 『신화 속의 여성, 여성 속의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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