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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선물, 메타포

- 감정의 자서전 -

손택수

2022-10-21

어찌 보면 의미 없는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도 될 만한 현상들 혹은 서둘러 외면해도

실생활에는 크게 불편할 것이 없는 대상들에 보다 자상한 눈길을 머물게 하고자 하는 행위의 근저에 시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는 하나의 명쾌한 논리로 해명할 수 없는 부조리한 일들이나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행로들을 인간 실존으로 긍정합니다.

나는 왜 가을만 오면 자책감과 회한에 시달리는지, 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들의 파고를 따라 지도 밖을 서성이고 있는지…….

 

 

 

정서의 옷

가을이면 괜히 울적합니다. 포도를 스치는 플라타너스 잎을 징검돌처럼 짚으며 목적 없이 길을 걷고 싶어집니다. 굉음과 인파로 어지러운 대로변을 벗어나 샛길로 빠져 한참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그 어디 허름한 가게의 평상 같은 것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주차 공간을 확보하느라 사라진 평상이 지금 이 시대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평상이 아니래도 작은 여백 같은 공터는 있겠지요.


공터는 대문 앞에 지팡이 짚고 나와서 해바라기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외로운 눈빛일 수도 있고, 들국화 향을 킁킁거리며 산책에 나선 고양이의 유연한 걸음걸이일 수도 있겠지요. 고양이의 눈을 빌려 나비를 쫓다가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길가의 민들레꽃 위에 머물러보기도 하겠습니다. 꽃받침 모양을 찬찬히 뜯어보며 서양민들레인가 토종민들레인가를 따져보는 이 시간은 참으로 다감한 정서들을 불러일으킵니다. 가을의 우울이 준 선물이라고 할까요.

 

 

 

가을

가을

 

 

어떤 기분이나 느낌, 분명치는 않으나 뭔가 가물가물한 예감으로 다가오는 정서의 영역을 사소하게 여기는 태도의 배후엔 이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깔려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상상력과 감성의 지지자인 정서는 오랫동안 폄하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명명백백한 논리의 세계도 아니기에 그런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과 세계는 명약관화한 틀로 포박할 수 없는 미지와 비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의미 없는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도 될 만한 현상들 혹은 서둘러 외면해도 실생활에는 크게 불편할 것이 없는 대상들에 보다 자상한 눈길을 머물게 하고자 하는 행위의 근저에 시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는 하나의 명쾌한 논리로 해명할 수 없는 부조리한 일들이나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행로들을 인간 실존으로 긍정합니다. 나는 왜 가을만 오면 자책감과 회한에 시달리는지, 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들의 파고를 따라 지도 밖을 서성이고 있는지……. 삶과 죽음, 문명과 자연, 사랑과 이별 같은 근원적인 질문들로부터 먼 바다 밖의 미진처럼 전해오는 떨림들에 반응하는 촉수 같은 것 말입니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碑)ㅅ돌은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함형수, 『해바라기의 비명』, 어느 젊은 청년화가 L을 위하여

 

 

1936년 <시인부락>에 발표된 작품인데 시인은 이 시 한 편으로 망각의 늪을 뛰어넘었습니다. 몇 행 되지 않으나 목전에 닥친 죽음 앞에서 전생을 돌아보며 유언처럼 쏟아져나오는 말들에 단 한 줄의 잉여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절박한 정서는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듯 강력한 시각 효과와 함께 하는데 노란 해바라기들과 푸른 보리밭의 색채 대비가 그것입니다. 특히 ‘날아오르는 나의 꿈’과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의 비유는 화살의 이미지를 품고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무화시키는 역동성을 발휘합니다. 무덤의 하강과 노고지리의 상승이 서로를 비추면서 생사의 이분법을 초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의 절박한 정서는 그래서 찬란하기까지 합니다. 하나의 비유가 새로운 생명감을 발산하는 경이로운 장면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라보는 이에 따라서는 해바라기와 태양의 메타포에 기시감이 있어 선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전체를 두고 보면 오히려 그로 인해 더욱 차별화된 비유가 되었습니다.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 어느 젊은 청년 화가에게 헌정된 이 시는 33세에 요절한 시인의 운명을 예감한 시인 것만 같아 더욱 가슴을 시리게 합니다. 여기에 쓰인 비유를 저는 시인이 스스로 장만한 수의처럼 읽어보곤 합니다. 이 수의가 없다면 시는 명령조의 어조와 억센 호흡에 지배되면서 직정적인 감정의 토로에 그쳤을 것입니다. 요컨대, 메타포는 정서의 옷입니다. 아무리 진실한 감정이라 하여도 메타포의 옷을 걸치지 않으면 벌거숭이 임금님이 되기 쉽습니다.

 

 

영혼의 수사학

삶이 고단하다고 느껴질 때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을 들여다봅니다. 6살에 소아마비로 9개월 동안 방안에 유폐된 채 지내야 했던 칼로의 유년기는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었지요. 불운이 겹쳐 1925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날을 기념한 행사가 치러진 다음날 칼로가 타고 있던 버스와 전차가 충돌합니다. 그 사고로 척추와 쇄골과 갈비뼈가 부러졌습니다. 오른쪽 다리는 무려 열 한군데가 골절되었습니다. 왼쪽 어깨는 관절이 빠져버렸고, 골반뼈도 세 군데 부러졌습니다. 강철로 된 난간기둥이 배에서 수평 방향으로 자궁을 관통하면서 거듭되는 유산의 고통까지 짊어져야 했습니다. 47년을 사는 동안 32번 이상의 대수술을 받아야 했고, 남편 디에고 리베라는 그사이 칼로의 여동생과 바람을 피웠다고 합니다. 그 앞에서 어떻게 제가 엄살을 떨 수 있을까요.

 

 

그림(프리다 칼로, 부러진 기둥, 1944, 유채)

그림(프리다 칼로, <부러진 기둥>, 1944 유채) (출처: 위키피디아)

 

 

그림에서 보듯 칼로는 척추 교정용 강철 코르셋을 착용한 채 특별 주문한 이젤을 침대 위에 놓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녀가 자화상을 많이 그린 배경입니다. 침대 거울을 달아놓고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칼로는 고통을 묘사하는 과정을 통해 불우를 무수한 그림으로 승화시킵니다. 금이 간 척추를 부러진 그리스 신전의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비유한 이 자화상에서 저는 전신에 박힌 못의 고통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생애를 겹쳐 읽습니다. “나는 아픈 것이 아니라 부러진 것이다.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있음이 행복하다.”고 했던 화가의 말이 들리는 듯합니다.

 

자신의 육체에 내린 붕괴의 고통을 성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비상하는 새의 날개를 이미지화한 짙은 눈썹으로 치환됩니다. 이 눈썹은 화가의 자화상을 관류하는 한결같은 이미지로서 칼로의 삶을 단순한 고통의 응축물로 묶어두지 않습니다. “두 발이 왜 필요하겠는가. 나에게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면” 이라고 했던 화가의 눈썹 날개는 죽음 직전까지 이어집니다. 기둥과 척추, 못과 통증, 날개와 눈썹의 비유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배경인 하늘과 땅으로 신체를 확장 시키고 있습니다. 육체에 내린 고통을 전 지구적인 통증의 사유로 옮겨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메타포는 영혼의 수사학입니다.

 

 

신의 선물

 

“은유는 아마도 인간의 가장 다산적인 잠재력일 것이다. 은유의 효력은 마술에 접해 있다. 그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의 피조물의 몸속에다 깜빡 잊어버리고 놓아둔 창조의 도구처럼 보인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의 말입니다. 신이 깜박 잊어버린 이 창조의 도구는 원시 인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뇌의 모습과 유사한 호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을 낳는다’는 유감주술의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장녹수가 그러하였듯 허수아비나 인형을 만든 뒤 상대의 옷 조각으로 옷을 해 입히거나 속에 상대의 접촉물인 손톱이나 머리카락 등을 넣어 바늘로 찌르거나 묻는 행위는 ‘접촉하고 있던 것은 분리된 이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접촉주술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천연두를 손님이라고 하거나 호랑이를 산군이라고 하는 건 신성하거나 두려운 존재로부터 보호나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직접 발화를 금하고 간접적 발화를 활용한 사례들입니다. 천연두를 손님으로 치환하는 심리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치 있게 변화되기를 바라는 희망이 내재해 있다고 하겠지요. 호랑이를 산신령이라고 하는 것 역시 맹수의 포악성이 오히려 산을 보호하는 신성성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갈망의 표현일 것입니다. 세계나 사물에 자신을 투사해서 항상 살아있는 생명체나 정령으로 바라보는 의인법 또한 메타포의 원초적 뿌리 중 하나입니다.

 

 

아버지는 잠시 말없이 걷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하루살이라는 벌레는 태어나서 이삼 일 만에 죽는다는데,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세상에 나오는 것인가, 그런 것이 무척 궁금했던 적이 있었지."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어느 날 이것이 하루살이 암컷이라며 확대경으로 보여 주었어. 설명에 의하면 입은 완전히 퇴화해서 먹이를 섭취하는 데 적합하지 않고, 위를 절개해 봐도 들어 있는 것은 공기뿐. 들여다보니 그 말 그대로였어. 그런데 알이 뱃속 가득 충만해 있어서 홀쭉한 가슴 부분까지 꽉 차 있었어. 그것은 마치 현기증 나도록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슬픔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는 것처럼 보였어. 외로운 빛의 알들이었지. 내가 친구 쪽을 돌아보며 '알'이라고 하자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 '안타까운 일이군.'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네 엄마가 너를 낳고 곧바로 세상을 떠난 것은." 


아버지의 그다음 말은 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통증처럼 아프게 내 뇌리에 꽂힌 것이 있었다. 홀쭉한 어머니의 가슴팍까지 숨 막히도록 가득 채우고 있던 나의 하얀 육체. 

 

- 요시노 히로시, 『I was born (류시화 옮김)

 

 

하루살이는 짧은 삶을 살다 가지만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화석생물 중 하나입니다. 먹이를 찾아다니는 수고로 힘을 낭비하지 않고 모든 에너지를 번식으로 초점화하기 위해서 진화 과정 중에 입을 퇴화시켰다고 합니다. 일생일대의 과제인 알을 하나라도 더 품기 위해서 배를 비우는 전략을 취한 셈입니다. 배뿐만 아니라 가슴팍까지 가득 들어찬 알들과 어머니의 뱃속을 숨 막히도록 채우고 있던 나의 흰 육체의 비유는 그 자체로 서늘한 충격입니다. 이제 막 영어를 익히던 중학교 1학년 무렵의 일을 회상한 이 시에서 시인은 삶을 ‘I was born’의 수동형으로 받아들이다가 어머니의 존재라는 능동형에 의해 가능해진 것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탄생과 소멸은 비록 나의 의지가 아닐 수 있으나 능동형의 희생이 바탕에 깔린 수동형의 삶이 마냥 수동일 수만은 없다는 전언이 아버지의 숨은 뜻이 아니었을까요. 참신한 메타포는 이처럼 삶의 중심부에서 솟구쳐 오릅니다.

 

 

 

[감정의 자서전] 신의 선물, 메타포

- 지난 글: [감정의 자서전] 이미지로 생각하고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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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담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어릴 때 꿈은 농부였다. 별(辰)과 노래(曲)가 하나가 된 농(農) 자를 업으로 삼고 싶었는데 꿈이 좌절되면서 그만 시를 쓰게 되었다. 유년시절의 실향과 실패와 숱한 실연이 시를 쓰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지은 책으로 시집 『목련전차』,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청소년시집 『나의 첫소년』, 동시집 『한눈 파는 아이』 등이 있다. 제3회 조태일문학상, 제13회 노작문학상, 제22회 신동엽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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