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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아주 가지는 않는다

- 당신은 어떤'가요' -

조용미

2021-12-08

개울에 나가 앉아서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는 봄은 아니고 늦은 가을이지만 나는 개여울에 나와 앉아 있다.

물소리는 끓어오르는 물 같고, 가라앉는 바람 같고, 풀벌레 소리 같고, 속삭이는 목소리 같기도 하다.

무언가 애타는 마음일 때는 왜 물가에 나가게 되는 걸까……

 

 

 

흔들리는 촛불 사이로

꿈결처럼 오가던
그때의 그 이야기들
지금은 어디에

 

마음의 벽 가린다해도
순간으로 좋았던
그때의 그 추억들
지금은 어디에

 

기나긴 한숨의 세월은
그대 사랑한 벌인가요
흘러 내린 눈물은 어제도 오늘도
이밤을 뒤덮어

 

구슬피 우는 빗물소리
내마음을 아는 듯
어깨위로 싸늘하게
젖어 들어 온다.

 

- 한영애 노래 〈비애〉

 

 

한영애 2집 앨범 〈바라본다〉(1988) (이미지 출처: 벅스)

한영애 2집 앨범 〈바라본다〉(1988) (이미지 출처: 벅스)

 

 

바흐나 브람스보다 더 위로가 됐던

가수 한영애의 2집 앨범 〈바라본다〉에는 보석 같은 곡들이 빼곡하다. 단 한 곡도 건너뛸 수 없는 곡들로 이루어진 명반이다. 우연이긴 하지만 나의 첫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도 「바라본다」라는 시가 들어있다. 그 시절 이 엘피판을 얼마나 자주 들었던가. 나는 특히 ‘비애’ ‘여인#3’ ‘루씰’을 좋아했는데, 그즈음 콘서트에 가도 레퍼토리에는 늘 ‘비애’가 빠져 있어 아쉬웠다. 첫 시집이 나왔을 때 ‘비애’를 듣고 싶다는 짤막한 편지와 함께 시집을 보냈더니, 한영애 씨가 콘서트 중간에 내게 받은 편지를 소개하며 비애를 불러 객석에 앉아 있던 나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그 겨울밤, 집으로 돌아오며 얼마나 기뻐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비애’는 유재하의 작사, 작곡으로 듣고 있자면 처절한 고독감과 슬픔이 소용돌이처럼 밀려온다. 두문불출하던 시절, 밤이면 마시지도 못하는 와인을 따라놓고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노래나 ‘비애’를 자주 들었다. 그땐 이상하게도 바흐나 브람스보다 이 곡들에게서 더 위로를 받았다.

 

 

첫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96, 실천문학) (이미지 출처: 알라딘)

첫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96, 실천문학) (이미지 출처: 알라딘)

 

 

어떤 방어도 쓸모없이 만들어 버리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에서 음악은 약간 위험하다. 어떠한 방어기제도 쓸모없이 만들어버리고 바로 심장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음에는 저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계속 마음을 점령하는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어느 정도 결핍이 채워지는 부분이 생기기도 한다. 물론 결핍과 목마름을 더 부추기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그 시절, 잘하지 못하지만 노래를 불러야 할 일이 있으면 유일하게 ‘여인#3’를 부르곤 했다.

 

1990년쯤부터 10년 정도는 한영애 콘서트에 거의 빠짐없이 찾아갔다. ‘루씰’은 라이브로 듣고 나서 그 곡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그녀를 한국의 제니스 조플린이라고들 하지만 한영애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하고 고유한 음색을 지니고 있는, 오직 한영애인 유일한 가수일 뿐이다. 때로 관능적이고 영적이기까지 한 그 목소리는 압도적이다. 그녀의 노래는 명실공히 한국의 블루스 음악을 대표한다. 앨범 〈바라본다〉는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19위에 올라 있다.

 

 

세계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 비비 킹(B.B.King)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세계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 비비 킹(B.B.King)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루씰(Lucille)’은 세계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인 비비 킹(B.B.King)이 가지고 있는 기타의 애칭인데 블루스 기타리스트이며 작곡가인 엄인호 씨가 존경의 의미로 작곡하여 비비 킹에게 곡을 헌정한 것이다. 기타를 ‘루씰’이라 부르게 된 일화가 있다. 1950년대 중반 비비 킹의 나이 24세에 클럽에서 공연 중 화재가 발생하여 밖으로 재빨리 대피했는데, 자신이 아끼는 기타를 두고 나와 죽음을 무릅쓰고 불길 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간신히 기타를 찾아 나왔을 때 건물이 무너져내렸다. 그날의 화재는 '루씰'이라는 이름의 여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내가 싸움을 하다가 석유램프를 걷어차 불이 붙어 일어났다는 말을 나중에 듣고, 자신의 기타에 ‘루씰’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루씰이 기타 이름이었다니.

 

 

낡은 모습 그대로 소멸해가는 것이 더 아름다운

‘개여울’은 1922년 김소월이 발표한 시로, 50년 후 1972년 정미조의 데뷔곡이었지만 원래 1967년 이희목이 작곡하고 김정희가 처음 부른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10여 명이 훌쩍 넘는 가수가 다시 불렀다. 이렇게 많이 리메이크해서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월의 애절하고 아름다운 시가 노랫말이 되었을 때의 정서적인 효과 때문일 것이다. 모두 자기 자신의 고유한 음색과 감정을 담아 개여울을 들려주고 있다. 그런데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가 부른 ‘개여울’을 듣고 나서부터 다른 가수의 ‘개여울’은 듣지 못하게 되었다.

 

개인의 취향 문제도 있겠지만 누구도 이토록 깊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개여울’을 부르지는 못한 것 같다. 섬세하고 절제된 감정으로 담백하게 부르는데도 이상하게 강한 울림이 있다. 말로의 앨범 〈동백 아가씨〉에는 마치 무슨 서정시를 읽듯, 상쾌하고 즐거운 산책을 하듯, 말로에 의해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세련된 재즈로 다시 태어난 전통가요가 귀한 선물처럼 가득 들어 있다. 개여울을 들으며 깨닫게 된 소소한 생각들이 있다.

 

 

말로 스페셜 앨범 〈동백 아가씨〉(2010)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말로 스페셜 앨범 〈동백 아가씨〉(2010)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 말로, 〈개여울〉 (김소월 시)

 

 

개울에 나가 앉아서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는 봄은 아니고 늦은 가을이지만 나는 개여울에 나와 앉아 있다. 물소리는 끓어오르는 물 같고, 가라앉는 바람 같고, 풀벌레 소리 같고, 속삭이는 목소리 같기도 하다. 무언가 애타는 마음일 때는 왜 물가에 나가게 되는 걸까. 물을 보면 마음이 흐르고 흐르다 가라앉는다. 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갈 바를 깨닫게 된다.

 

내 영혼과 밀착된 어떤 존재가 과연 있을까. 어딘가에 있다고 해도, 지금은 그의 마음이 나를 만나지 못해 허물어지고 닳아버렸을 것 같다. 다른 마음을 만나 그의 존재를 확장하는 '큰일'보다 이제는 낡은 모습 그대로 고요히 소멸해가는 일이 더 아름다운 것을 알겠다. 이번 생에도 나는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 당신을 한 번쯤 지나쳤는데도 알지 못하고, 또 한 생이 지나가 버릴지라도……

 

 

 

당신은 어떤‘가요’는? 누구에게나 살면서 기쁘고 즐겁고 놀라고 슬프고 우울했을 때, 혹은 무심코 한 시절 건너가고 있을 때 가슴 한구석 갑자기 훅 들어와 자리 잡았던 노래 한 곡 있었을 터. 인생의 어느 순간에 우연히 만났지만 참 특별했던 자신만의 노래에 얽힌 추억과 이야기를 작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고자 한다.

 

 

 

[당신은 어떤‘가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는다

- 지난 글: [당신은 어떤‘가요’] 꽃밭에서 짜장면을 먹었다는 얘기가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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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시인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당신의 아름다움』이 있고, 산문집 『섬에서 보낸 백 년』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김준성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목월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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