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인문360인문360

인문360

인문360˚

찬란한 지리멸렬함에 대하여

- 당신은 어떤‘가요’ -

김이설

2022-05-20

뜨겁지 않은 일상, 정염이 일지 않는 매일, 지루하고 무기력한 하루하루란 얼마나 평온한가.

극적이지 않아서, 희열에 빠지지 않아서, 일희일비하지 않아서 안심한 나날을 보낼 수 있다는 확신.

그 확신이 부여하는 남은 생애에 대한 지리멸렬함은 얼마나 찬란한가.




광안리를 찾아간 까닭

몇 해 전 특강이 있어 부산에 갔던 적이 있었다. 저녁 강의였는데, 일부러 일찍 출발해 광안리를 찾았다. 대낮의 광안리는, 늦봄의 광안리는, 네가 없는 광안리는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는 한적한 모래사장에 우뚝 서서야 깨달았다. 세월이 풍광만 바꿔 놓은 것은 아니었다. 풍광보다 더 많이 변한 것은 곧 오십 줄에 들어서는 나 자신이었다. 청춘을 어쩌지 못해 스스로를 매일 탈진시키던 이십 대의 나는 이제 사랑 같은 것과 상관없이 하루하루를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안리

광안리

 

 

굳이 광안리까지 찾아갔던 건 미련 때문이었다. 어쩌면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청춘의 그림자 끄트머리라도 마주치지 않을까, 그렇다면 서글픈 중년의 일상에 하루쯤은, 그 순간만큼은 비썩 말라버린 마음이 조금은 축축해지진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무람없이 반짝이는 늦봄의 바다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잊지 못하는 사람을 안고 사는 일과 잊힌 사람이 되는 것 중에 더 서글픈 건 무엇일까. 너일까, 나일까.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고운 머릿결을 흩날리며 나를 반겼던

그 부산역 앞은 참 많이도 변했구나

어디로 가야 하나 너도 이제는 없는데

 

무작정 올라가는 달맞이 고개에

오래된 바다만 오래된 우리만 시간이 멈춰버린 듯

이대로 손을 꼭 잡고 그때처럼 걸어보자

 

아무 생각 없이 찾아간 광안리

그때 그 미소가 그때 그 향기가

빛바랜 바다에 비춰 너와 내가

파도에 부서져 깨진 조각들을 마주본다

 

부산에 가면

 

- 『첫사랑』 앨범 중 〈부산에 가면〉, 최백호(with 에코브릿지), 포스트뮤직, 2013

 

최백호의 목소리가 좋아지면서 나는 내가 중년이라는 걸 절감했다. 눅눅하게 낮은 목소리, 세월의 주름을 다 꿰뚫고 있는 음조가 좋아지면서 이제 그런 나이가 됐구나, 싶었다. ‘도라지 위스키’의 맛은 몰라도, ‘실연의 달콤함’은 경험해본 적도 없고,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리’는 도통 감조차 잡지 못하지만 ‘다시 못 올 것’이나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이라면 나도 얼마간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가수 최백호(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가수 최백호(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청춘의 미련 같은 건 없는 줄 알았지만

중년이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 사는 일이지 않은가. 세상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청춘의 시절을 묻어둘 수 있는 천연덕스러움과 회한의 슬픔을 꾹꾹 눌러 담고 살면서도 아닌 척 할 수 있는 나이라고 믿었다. 내 나이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춘의 미련’1)같은 건 없는 줄 알았다. 이미 다 겪었으니까, 이미 다 울었으니까, 이미 다 슬퍼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1) 『열여섯번째 이야기』 앨범 중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 ㈜다날엔터테인먼트

 

더 이상 내 걱정 하지 않는 너를

어젯밤에서야 깨달았어요

이젠 더 이상 나의 걱정 하지 않아

원망하려다 이내 알았네

무서운 꿈꾸다 깨어나 그대로 울어버린

밤처럼 막막한 시간 그 슬픔을

갈 곳 없는 마음 연기처럼 사라지게 하는 거라

어려운 일이겠지만 피할 수 없네

이제는 그만 떠나보낼 시간임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지

무서운 꿈꾸다 깨어나 그대로 울어버린

밤처럼 막막한 시간 그 슬픔을

갈 곳 없는 마음 연기처럼 사라지게 하는 거라

어려운 일이겠지만 피할 수 없네

더 이상 내 걱정 하지 않는 너를

어젯밤에서야 깨달았네

 

- 『머무름 없이 이어지다』 앨범 중 〈어젯밤에서야〉, 시와, ㈜디지탈레코드, 2014

 

사랑의 끝을 감지하는 순간, 이제 더 이상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는 순간, 그 찰나의 섬뜩한 두려움을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은 내게 사랑은 없을 것이라는, 내 생애 마지막 사랑이 끝났다는 확신. 그 확신이 주는 절망.

 

어떤 노래는 그 절망에 대해서 너무 담백하게 읊조려, 듣는 사람을 무작정 무너지게 한다. 시와의 노래 〈어젯밤에서야〉를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쥐어뜯기는 기분에 빠진다. 이제는 잊은 줄 알았던 순간이 떠올라서, 간신히 외면했다고 믿었던 시간이 여전히 선명해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서.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끔찍했던 세월이, 내팽개쳐버린 미련이, 버린 줄 알았던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이제는 외면해야 할 과거일 뿐인데, 마음과 생각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은 그것을 추억이라 부르는 모양인데, 부질없다.

 

내가 슬픈 건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건 아직까지 너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픈 건 너와의 이별을 이제까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이상 내 걱정 하지 않는 너를 어젯밤에서야 깨’닫고서야 나는 알아채는 것이다. ‘이제는 그만 떠나보낼 시간’이라는 것을. ‘어려운 일이겠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그러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제는 그런 슬픔을 겪지 않아도 되니까. 이제 눈물을 흘릴 일도 없으며, 아플 일도 없으니까. 이제 사랑은 나의 일이 되지 못하고,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조차도 잊고 살고 있으니 말이다.

 

 

늙는다는 것이 주는 축복

꼭 잠 못 이뤄 밤새 파도 소리를 들었던 부산이 아니어도 상관없었을 터다. 막차에서 내리는 나에게 달려오던 네가 활짝 웃던 남춘천역이면 어떻고, 너와 걸었던 전나무 향 가득한 첫눈 내린 부안 내소사면 어떤가. 새벽 연꽃 향을 맡기 위해 밤기차를 타고 내려갔던 여름의 무안 회산백련지나 들꽃 만발했던 가을 가평의 아침고요수목원,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2)던 남해금산이어도 상관이 없다. 거기가 태안이거나, 사천이어도, 남원이거나 함안이어도 다르지 않다. 너와 함께 있었으나 지금은 네가 없는 곳. 그래서 이제는 찾아가도 빈 기억만 남은 곳. 이제 너의 부재로만 존재하는 곳.

2) 『남해 금산』 중 〈남해 금산〉, 이성복, 문학과지성사, 1986 

 

모든 사랑은 위험하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더욱 치명적이라고 하던가. 그러니 정말 다행이다. 한때나마 너를 사랑했으니. 너를 사랑하는 것으로 청춘을 통과했으니, 그 불같던 청춘이 수명을 다해 지금은 무감하게 늙어갈 수 있으니.

 

 

사색

사색

 

 

최백호와 시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늙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는다. 뜨겁지 않은 일상, 정염이 일지 않는 매일, 지루하고 무기력한 하루하루란 얼마나 평온한가. 극적이지 않아서, 희열에 빠지지 않아서, 일희일비하지 않아서 안심한 나날을 보낼 수 있다는 확신. 그 확신이 부여하는 남은 생애에 대한 지리멸렬함은 얼마나 찬란한가. 청춘은 끝났고, 사랑은 사라졌으며, 기억은 왜곡되고 분절되었다. 지나간 건 지나가서, 잊힌 건 잊혀서, 사라진 건 사라져서 좋은 것이다. 이렇게 텅 빈 마음과 마주하는 일이야말로 내 나이에 제일 잘 어울리는 일이라는 것도 이제는 알겠다. 이제는 그것이 좋다는 걸 알겠다. 그것이 제일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당신은 어떤‘가요’는? 누구에게나 살면서 기쁘고 즐겁고 놀라고 슬프고 우울했을 때, 혹은 무심코 한 시절 건너가고 있을 때 가슴 한구석 갑자기 훅 들어와 자리 잡았던 노래 한 곡 있었을 터. 인생의 어느 순간에 우연히 만났지만 참 특별했던 자신만의 노래에 얽힌 추억과 이야기를 작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고자 한다.

 

 

 

[당신은 어떤‘가요’] 찬란한 지리멸렬함에 대하여

- 지난 글: [당신은 어떤‘가요’] 노래하는 모습들


 

  • 부산
  • 광안리
  • 첫사랑
  • 부산에가면
  • 최백호
  • 머무름없이이어지다
  • 어젯밤에서야
  • 사색
  • 언어적인간
  • 호모로쿠엔스
김이설 소설가 사진
김이설

소설가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열세 살’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오늘처럼 고요히』, 경장편 소설 『나쁜 피』, 『환영』, 『선화』,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과 연작소설집 『잃어버린 이름에게』가 있다.

댓글(0)

0 / 500 Byte

공공누리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찬란한 지리멸렬함에 대하여'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