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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에서 짜장면을 먹었다는 얘기가 아니고요

- 당신은 어떤'가요' -

구효서

2021-11-09

당신은 어떤‘가요’는? 누구에게나 살면서 기쁘고 즐겁고 놀라고 슬프고 우울했을 때, 혹은 무심코 한 시절 건너가고 있을 때 가슴 한구석 갑자기 훅 들어와 자리 잡았던 노래 한 곡 있었을 터. 인생의 어느 순간에 우연히 만났지만 참 특별했던 자신만의 노래에 얽힌 추억과 이야기를 작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고자 한다.

 

우리 집의 스피꾸는 말할 것도 없이 무명틀 방에 걸려 있었고 노래가 많이 흘러나올수록 무명의 생산량도 따라 늘었다. 어린 나는 농사도 안 지었고 무명도 안 짰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누님들을 따라 줄창 노래를 하는 것이었다. 레퍼토리도 쌓여만 갔다. 이것이 나의 유리한 점이었다. 4학년도 되었으니 삼동네 콩쿨대회를 노려볼 만도 했던 것. 그런데 웬 난데없는 〈꽃밭에서〉란 말인가……



이미자의 〈동백(冬栢)아가씨〉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이미지 출처: 미도파 레코드)



이미자 노래 부르다 학교 노래 대표로



가수 이미자 (이미지 출처: 매일신문)

가수 이미자 (이미지 출처: 매일신문)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 수업 시간에 이미자 노래를 부르다가 담임선생님한테 걸려 강화군 내 초등학교 대항 노래자랑 대회에 나가 예선 탈락했다. 4학년 때였다. 선생님 성함은 신경숙. 그때 부르다 걸렸던 노래는 〈동백아가씨〉.


“너 뭐 다른 거 또 아는 노래 있어? 한 번 맘껏 불러 봐.”


선생님이 불러보라고 하기에 냅다 부른 게 또 이미자의 최신곡 〈섬마을 선생님〉이었다. 내내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선생님은 노래가 끝나자 벌을 내리듯 말했다.


“내일부터 선생님하고 방과 후 연습이다. 연습곡은 〈꽃밭에서〉다.”


그때부터 반항했다. 집까지 가려면 십 리를 걸어야 하는데 공부 끝나고 남아 풍금에 맞추어 노래 연습을 하면 해가 기울고, 나는 친구 하나 없이 그 먼 길을 혼자 가야 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로 이어지는 가사며 리듬이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다. 노래란 모름지기 부르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꽃밭에서〉는 꺾고 떨고 눈 절로 파르르 감기는 간드러지는 호소가 실리지 않았다.


선생님도 그런 내 기분을 모르지 않아서 노래 연습에 꾀를 부리고 엄살을 떨 때마다 떡이라도 던져주는 것처럼 “좋아, 너 부르고 싶은 거 불러봐.”라고 했고, 나는 막 데뷔한 조미미의 〈떠나온 목포항〉을 구성지게 불렀다. 속이 시원해졌다. 그래, 이게 노래지!


하지만 가요는 어쩌다 용인되는 반항 무마용 노래였다. 문주란의 신곡 〈동숙의 노래〉 한 번에 〈꽃밭에서〉 열 번, 배호의 신곡 〈돌아가는 삼각지〉 한 번에 〈꽃밭에서〉 스무 번을 불러야 했다. 목소리 관리를 한다며 선생님은 매일 내 입에다 사탕을 물리고 날달걀을 삼키게 했다.



동요보다는 가요가 더 노래 같았던 초등학생



〈꽃밭에서〉의 꽃밭은 꽃밭이 아니라 점점 묵정밭이 되어갔다. 하지만 노래자랑 대회 출전자를 다른 애로 바꾸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선생님은 내 타협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꽃밭에서〉 열 번에 오기택의 신곡 〈고향무정〉 두 번, 〈꽃밭에서〉 스무 번에 쟈니리의 신곡 〈뜨거운 안녕〉 세 번, 이런 식으로.


주로 신곡에 열을 올렸던 이유는 노래깨나 하는 또래들끼리 경쟁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일 년에 한 번 뒷동산 절터에서 열리는 삼동네(편집자 주-三洞네, 양옆과 앞에 이웃하여 있는 가까운 동네) 가을 콩쿨 대회에 초등부 참가 자격은 딱 세 명한테만 주어졌다. 늘 예심을 보는 옥분네 오빠가 신곡에 점수를 더 준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읍내의 강화초등학교 강당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꽃밭에서〉를 부르고 장원을 하느니 나는 삼동네 콩쿨 대회에서 기타 반주에 맞추어 〈뜨거운 안녕〉을 부르고 양은솥을 타고 싶었다. 하얀 무릎양말 반바지에 양손을 모으고 제비처럼 입을 벌리며 〈꽃밭에서〉를 부르는 내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오글거렸다.


어깨를 으쓱거리고 눈을 사르르 감으며 비극의 주인공처럼 감정을 다해 꺾고 떨고 흔들고 질러야 노래 같았고 속이 시원했다. 내 노래의 출처는 누님들이었다. 누님들은 라디오를 따라 불렀다.



라디오의 보급, 노동요 대신 대중가요의 시대



옛날 라디오

옛날 라디오



막내인 나에게는 누님이 넷이었다. 그때는 시골에 처녀와 총각들이 우글우글했다. 본격적인 이농의 물결이 불어 닥치기 전이었으니까.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때도 젊음의 열기는 노래가 가늠했다. 논이면 논 밭이면 밭,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 라디오가 보급되면서 구전의 노동요 시대는 끝이 났고 대중가요의 시대가 열렸다.


라디오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유선 라디오였던 셈인데 고향에서는 그걸 ‘스피꾸’라고 불렀다. 집집마다 전원 겸 볼륨 스위치 하나가 달랑 붙은 단말 스피커가 보급되어 있었다. 됫박처럼 생긴 그것에는 주파수 선택 기능이 없었다. 시보(時報)를 알릴 때마다 ‘여기는 KBS 중앙방송국입니다. 에이치 엘 케이 에이.’라고만 했다. 스피커 뒤꽁무니에는 삐삐선이라고 부르는 군 작전용 검은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전선은 대추나무 감나무 느티나무 갈참나무 단풍나무를 타고 산을 넘었다. 어딘가의 송출국에 연결되어 있었을 테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줄이 붙어 있어 스피커는 이동도 휴대도 할 수 없었다. 〈삼현육각〉이나 〈삽다리 총각〉 같은 연속 방송극을 들을 때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 논이나 밭에 나갈 때는 ‘기억’이라는 하드웨어에 저장해 갖고 나가 자신의 발성으로 직접 노래를 해야 했다. 듣고 듣고 또 듣고 부르고 부르고 또 불렀으니 다들 노래 실력이 어지간했다. 노래는 정규교육(초등학교 과정이거나 겨우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농사일에 뛰어든 풋풋한 십 대 이십 대들의 열망과 좌절을 오롯이 녹여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좀 유리했다. 딸이 많았던 데다 우리는 무명을 짜는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개량된 베틀에 해당하는 무명틀에 앉아 딸들은 번갈아 무명을 짰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모든 게 수동이었던 시절, 양발로 나무 페달을 겨끔내기(편집자 주-서로 번갈아가며 하기)로 밟아 잉아틀(편집자 주-실의 흐트러짐을 막고 잘 관리하도록 하는 틀)을 벌리고, 오른손으로 도르래 끈을 아래로 잡아당겨 북을 좌우로 보냈으며, 왼손으로는 바디를 당겨 날줄을 끌었다.



무명 짜며 노래 부르던 누이들 따라 늘어간 레퍼토리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무명짜기 (이미지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무명짜기 (이미지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이 복잡한 과정이 몸에 익으면 눈을 감아도 노래를 불러도 무명틀은 절로 작동되게 마련이었는데, 일정한 작동 사이클을 따라 출렁거리는 몸의 움직임에 노래까지 실으면 그보다 신나는 광경이 없었다. 핑계 김에 일하고 춤추고 노래하니 엄하기 그지없던 아버지도 뭐라 할 수 없었다. 이름하여 우리 집은 ‘노래가 그치지 않는 집’. 잘각잘각 무명틀 소리를 박자 삼아 부르는 누님들의 〈맹꽁이 타령〉-열무김치 담글 때는 님 생각이 절로 나서 걱정 많은 이 심정을 흔들어 주나-은 미루나무 아스라한 한길까지 뻗어 나가 뭇 총각들을 설레게 했다. 우리 집의 스피꾸는 말할 것도 없이 무명틀 방에 걸려 있었고 노래가 많이 흘러나올수록 무명의 생산량도 따라 늘었다. 어린 나는 농사도 안 지었고 무명도 안 짰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누님들을 따라 줄창 노래를 하는 것이었다. 레퍼토리도 쌓여만 갔다. 이것이 나의 유리한 점이었다. 4학년도 되었으니 삼동네 콩쿨 대회를 노려볼 만도 했던 것.


그런데 웬 난데없는 〈꽃밭에서〉란 말인가. 심통이 났다. 반항의 뜻으로 경연 대회 당일 날 나는 신던 꺼먹고무신에 맨발로 나타났다. 물론 그날 나는 집에다가도 노래자랑 대회에 나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나를 패주고 싶었으리라. 그런데 경연 당일인 걸 어찌하랴.


읍내에 들어가자마자 선생님은 나에게 실내화(운동화는 비싸니까)와 하얀 무릎양말을 사서 신겼다. 그러나 심통이 가라앉기는커녕 더 커졌다.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꽃밭에서〉 때문도 아니었고 실내화와 하얀 무릎양말 때문도 아니었다. 짜장면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짜장면을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먹어 본 적도 없었다.



무산된 생애 첫 짜장면… 〈꽃밭에서〉에 스리슬쩍 뽕끼를



짜장면

짜장면



내가 경연 대회 무대에 설 차례는 오후에 시작될 2부에 배정돼 있었다. 객석에서 1부 순서를 보고 선생님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때 갔던 곳이 중국집이었는데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천상(땅 위에서는 맡아본 적이 없었으므로)의 냄새에 1초 만에 환장해버렸다.


둘러보니 모두 시커먼 굵은 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아, 저 냄새인가 보구나. 저것이 곧 나의 입에도 들어오겠구나.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너는 목을 보호해야 하니까 자극적인 것 말고 울면을 먹어라.”


세상에 그처럼 맛없는 국수가 있을까. 코처럼 미끄덩거리기만 하고. 나는 이미 짜장면 냄새에 반쯤 미쳐 있는데. 나에게 울면을 먹일 양이면 선생님 당신도 양심상 울면을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자기만 떡하니 짜장면을 먹다니. 냄새에 환장한 가엾은 제자 앞에서.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해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 가사처럼 돼 버렸다. 2부의 내 순서가 되었을 때 나는,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해 돌이킬 수 없게도 〈꽃밭에서〉에다가 스리슬쩍 ‘뽕끼’를 넣어 불렀다. 넣어 불렀다기보다는 원래 그런 노래라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불렀다. 반항이라는 원망이라는 의식도 없이. 마지막 소절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의 ‘어울리게’에서 멋들어지게 꺾어버렸다. 웬일로 박수는 많이 받았는데 입상권에 들지 못했다. 더 의외였던 것은 선생님의 반응이었다. 그야말로 나에 대해 일말의 원망도 없는, 초탈하거나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어른들의 속은 알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당신은 어떤‘가요’] 꽃밭에서 짜장면을 먹었다는 얘기가 아니고요

- 지난 글: [당신은 어떤‘가요’] 비단처럼 부드러운 그 무엇인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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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소설가
구효서

소설가
1957년 강화도 출생.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소설집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도라지꽃 누님』 『저녁이 아름다운 집』 『아닌 계절』,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랩소디 인 베를린』 『비밀의 문>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한국일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수상.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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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사진 이미지

강**

2021-12-02

저도 꽃밭에서 1~4절까지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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