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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빈칸을 횡단하다

대전 낭월동 산내 학살지

인문쟁이 노예찬

2020-01-14


대전 동구 낭월동 곤룡터널

▲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곤룡터널. 이곳을 지나면 옥천이 나온다. ⓒ노예찬 



낭월, 옥토끼를 품었던 동네



대전의 동쪽. 옥천의 서쪽. 과거 전우치가 삼 년간 먹고도 남을만한 보물을 묻어 놓았다는 식장산(食藏山)의 남쪽 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옥토망월(玉兎望月)의 명당이라는 동네가 나온다. 옥토망월은 이곳의 지형이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형태와 아름다운 달이 강에 잠기는 미월침강(美月沈江)의 형국이 겹친 명당자리라고 하여 '망월'이라고 불리다가 망(望)이라는 글자의 획이 빠지고 음이 와전되어 지금의 ‘낭월’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1이다. 이 낭월은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독특한 유래의 이름을 가진 낭월동은 식장산에서 흘러드는 풍부한 수량과 지척에 대전천이 흐르고 있어 예로부터 농사를 짓기 좋았다. 때문에 그리 넓지 않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윗낭월, 안낭월, 아랫낭월 세 부락이 존재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낭월동은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평화로움이 묻어나는 동네이다. 남쪽에는 포도농장이 북쪽에는 아파트 단지가 식장산의 보호를 받으며 마을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식장산 줄기 중 하나인 곤룡재에는 그 전말이 아직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역사의 빈칸이 존재한다. 


표지판 문구 : 이곳은 대전 형무소 보도연맹 산내 학살 현장입니다. 문의처 042-331-0092 대전 형무소 산내 학살 진상규명위원회

▲ 대전 형무소 보도연맹 산내 학살 현장 표지판 ⓒ노예찬


곤룡재는 식장산과 낭월동의 동남쪽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과거 이 고개는 옥천 군서로 접어드는 길목 역할을 했다. 현재는 곤룡터널이 개통되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곤룡은 본래 산의 형국이 용과 비슷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동네 노인들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서 학살당하여 죽은 이의 뼈가 산처럼 쌓였으니, 곤룡은 ‘골령’의 예언적 지명이라고.2


현수막 문구 : 극락왕생해탈하소서 대전 동구 불교 승가 연합회

▲ "극락왕생해탈하소서." ⓒ노예찬


이번 글에서는 골령골에 묻힌 역사의 빈칸을 횡단해 보려고 한다. 곤령터널로 향하는 길의 중간, 이곳이 과거 낭월동 산내 학살지임을 알리는 흰색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눈에 띄지 않아 대부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또 대전에서조차 잘 알려진 사건이 아니기에 이곳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표지판 측면에는 ‘극락왕생해탈하소서’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이곳에서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소나무 한 그루와 유해 안치소, 길쭉한 봉분이 보인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한국기독교협의회에서 심어 놓은 나무와 비석이 보인다. 


70년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현수막 문구 : 추모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희생자 유해안치

▲ 산내 골령골 민간인 희생자 유해 안치소 ⓒ노예찬

 

묘비 문구 : 대전형무소 정치범 및 민간인 집단1학살지

▲ 대전형무소 산내학살진상규명위원회의 표지석 ⓒ노예찬



어떤 빈칸의 역사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의 강정구가 2003년 쓴 책,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의 실태』, 『전쟁과 집단학살』에서는 한국전쟁 기간의 민간인 학살이 크게 4개의 시기로 나뉜다고 밝히고 있다. 

첫째, 개전 직후인 7월 초부터 전국에서 벌어진 국민보도연맹원, 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예방 학살이 있었고, 둘째, 북한 점령기부터 철수 과정까지 인민군, 빨치산, 지방 좌익 세력, 보도연맹 유가족을 상대로 한 보복 및 예방 학살, 셋째, 인천상륙작전 이후 수복 과정에서 교전 행위 및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마지막은 9.28수복 이후 1953년 정전협정 체결까지 토벌 과정에서 한국군, 경찰, 우익 청년단체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진행된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보자면 산내 학살 사건은 개전 직후 벌어진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일부에 해당한다.3 

 

위령비 문구 : 국가폭력으로 희생되신 산내 학살의 영령들을 추념하며 '역사정의의 나무'를 심어 연대의 뜻을 밝힙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5:9) 2019.6.27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위령비 ⓒ노예찬

 

실제로 전국에서 일어났던 보도연맹사건의 전말을 이 짧은 글에 모두 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사실들을 열거해보려고 한다. 보도연맹은 보도라는 뜻을 안다면 어떤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보도(保導), ‘그릇된 길로 빠진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보도연맹 강령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내용은 ‘대한민국 정부를 절대지지’, ‘북한 괴뢰정부를 절대 반대 타도’한다는 내용이었다. 


보도연맹이 좌익 전향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조직이라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이승만 정권에서 주도한 관변 단체였고, 반공 검사 오제도의 제안에 따라 창설된 단체였다. 여기에 경찰이 합세하고 법무부, 내무부, 국방부, 민보단 등이 서서히 힘을 보탰다. 보도연맹 지도부에서는 당시 저명한 문화인(시인 정지용, 소설가 황순원, 시인 김기림 등)들을 대거 가입시켜 이들을 이름을 이용해 반공 선전 활동을 펼쳤다. 지방의 경우 상황은 더욱 악랄했는데, 가입시켜야 하는 보도연맹원 숫자가 상부로부터 지역 조직에 강제로 할당되어 있었다. 따라서 좌익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속아서 가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은 물론 단체를 가입시키기도 했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중동원단체로 의미가 바뀌게 되었다.4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보도연맹원들은 아무런 이적 활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연맹에 가입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한순간 ‘적’으로 취급 받았다. 정부는 이들이 남한을 배신하고 북한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명분으로 연맹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전쟁 당일 치안국장은 각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 대상 전원을 즉시 구속하고 전국 형무소의 경비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6월 30일에는 불순분자들을 구속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5 이후 군, 경은 보도연맹원들을 검거했고 그들은 즉시 처형되거나, 창고 등에 감금한 후 집단으로 학살되었다.6,7 


산내 골령골 민간인 희생자 유해안치소 전경

▲ 골령골 산내 학살지 전경 ⓒ노예찬


실제로 산내 학살은 6.25전쟁 초기에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8일 첫 번째 학살이 일어났다. 미군의 전투일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경찰은 보도연맹에 가입 및 활동한 민간인과 재소자를 처형했으며, 이때 처형된 인원은 약 1,400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당시 보도연맹에는 쌀과 비료를 받기 위해 가입한 농민들과 학생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같은 해 7월 3일부터 3일간 일어난 2차 학살에서는 여순 사건이나 제주 4·3사건 관련자를 포함해 1,800여 명의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 처형됐으며 확인사살도 이뤄졌다. 3차 학살은 같은 달 6일부터 11일간, 최소 1,800여 명의 재소자가 구덩이로 이송돼 학살당했다. 이러한 학살은 1951년 1월 14일 전후까지 자행되었고 모든 시신은 암매장했다.8,9


학살 당시 사진들

▲ 당시의 사진들(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Bob E. Edward


낭월동 산내 학살지는 일부 해제된 기밀문서 중 미군이 찍은 사진들과 1, 2차에 걸친 발굴 작업을 통해 그 당시의 참혹한 진실이 일부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빈칸은 많다. 아직 산내 학살지에 대한 전모를 가늠할 수 있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근 진행된 2차 발굴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발굴이 진행되자 북쪽 경계구역 경사면 30~50cm 깊이에서 머리뼈의 파편들과 사지뼈들이 출토되기 시작하여 2층인 검은 층 전체에 걸쳐 유해가 흩어진 채로 출토 되었다. 머리뼈 조각이 군데군데 부서진 채 함께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 군데군데 모여 있는 머리뼈 조각들이 각각 한 사람의 머리뼈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두 8구 정도의 유해로 가늠된다. 완전한 머리뼈가 없는 것은 사살당할 때 머리 뒤통수 쪽에 총탄을 맞았기 때문이며 유해 가까이서 총탄과 탄피가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 확인사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후에 유해를 덮은 돌들과 기타 자연환경 등도 머리뼈를 조각내는 데 한 원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쪽 경계선 지점에서는 3m 깊이 정도에서 8구의 유해가 출토되었다. 이 유해들은 동서 방향으로 이어진 도랑을 따라 이어져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유품으로는 백색 개인 의복 단추와 총탄 및 탄피, 그리고 의안 한 점이 출토되었다. 북동・북서 방면의 절단면에서 계속 유해가 나오고 있어, 더 많은 유해가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발굴지를 경계로 확장하여 추가 발굴을 할 필요가 있다. 


-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 2차 유해발굴 조사보고서: 대전 산내면 골령골』, pp15-19




○ 주석


1.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大田地名誌』, <낭월동>, 대전직할시, 1994, p136

2.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大田地名誌』, <낭월동>, 대전직할시, 1994, p137

3. 강성현. 2004, [기획특집] 전향에서 감시동원, 그리고 학살로 –국민보도연맹 조직을 중심으로-. 역사연구(14), 55-106p

4. 김득중 (2014). 국민보도연맹 사형 판결 재심 결정을 계기로 되짚어보는 보도연맹사건. 내일을 여는 역사, 57, 139-152

5. 김득중 (2014). 국민보도연맹 사형 판결 재심 결정을 계기로 되짚어보는 보도연맹사건. 내일을 여는 역사, 57, 139-152

6. 오해영 (2019). 한국(조선) 전쟁(2) - 국민보도연맹 학살과 국가보안법. 정세와노동 (153), 154-161

7. 강성현. "한국 사상통제기제의 역사적 형성과 보도연맹 사건, 1925-50" VOL.- NO.- (2012), 서울대학교 대학원

8. 손유빈, <아물지 않은 민간인 학살의 상처>, 서울대 대학신문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78

9. 송인걸, <한국전쟁 초기 민간인 4400~8000명 학살…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23일 시작>, 한겨레 신문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76941.html


 

○ 참고 도서


- 강성현, [기획특집] 전향에서 감시동원, 그리고 학살로 – 국민보도연맹 조직을 중심으로-(2004), 역사연구(14), 55-106p


강성현, <한국 사상통제기제의 역사적 형성과 보도연맹 사건, 1925-50>(2012), 서울대학교


김득중, <국민보도연맹 사형 판결 재심 결정을 계기로 되짚어보는 보도연맹사건>, 내일을 여는 역사(2014), 57p, 139-152p


김학재, <정부수립 후 국가감시체계의 형성과정 : 1948~1953, 정보기관과 국민반, 국민보도연맹의 운영사례 = (The) Making of national surveillance system since state formation in Korea : 1948-1953, case of intelligence agency, 'gukminban' and National guidance alliance>(2004), 서울대학교


경찰청, <경찰청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백서>(2007)


오해영, <한국(조선) 전쟁(2) - 국민보도연맹 학살과 국가보안법. 정세와 노동>(2019) 153p, 154-161p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大田地名誌』, <낭월동>

 

이유정, <민간인 학살 사건과 국가의 배상책임:울산보도연맹 1심 판결을 중심으로>(2009)


이윤갑, <해방 후 경상도 성주 지역의 건국운동과 국민보도연맹>(2011)


전갑생, <부산지역 全評 소속 보도연맹 연구>(2011)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유해 발굴 공동조사단,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2차 유해 발굴 조사보고서 : 대전 산내면 골령골>(2015)


Philip Deane, < I Was A Captive in Korea, Norton, New York >(1953), 런던 옵서버 지의 종군기자로 활동하다가 1950년에 북한군 포로가 된 필립 딘이 대전에서 총살현장을 목격한 프랑스 신부 카다르(72)의 말을 빌려 ‘대전에서 남한 경찰이 1,700명의 죄수들을 총살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미 대사관 밥 에드워드의 보고서, 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 23 Sept 1950, NARA, RG 319 Records of the Army Staff G-2 ID File, Box 4622, Item 715579.>,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비밀문서로 분류되어 보관되다가 1999년 12월 16일 비밀 해제된 문서에는 ‘대전에서 벌어진 정치범(Political prisoners) 1,800여 명에 대한 처형은 1950년 7월 첫째 주 3일 동안 진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서는 주한 미 대사관 밥 에드워드 중령이 50년 9월 23일 보고한 것으로 여기에는 대전 정치범 처형 장면을 찍은 사진 18장이 별도로 첨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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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인문쟁이 5기]


오늘도 초심을 잡는다. 나는 왼쪽이 현저하게 부족했지만, 그것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왼손은 조금씩 나의 오른손을 파고들었다. 나의 두 손이 깍지를 낀 것 처럼, 아무런 느낌없이. 처음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더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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