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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쓸쓸한 길상사, 그리고 백석

성북구 길상사

인문쟁이 김정은

2019-12-12



늦가을의 길상사



가을이 완연한 길상사 전경

▲ 늦가을 길상사의 전경 ⓒ김정은 


총천연색으로 만개했던 단풍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몇몇 나무들은 이미 반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였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지켜본다는 건 꽤 서글픈 일이다. 곧 무채색으로 덮일 세상의 모습을 떠올려 보니 더 그러했다. 지극히 고요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가을이 끝나가고 겨울이 시작되고 있음을 물씬 느낄 수 있던 곳. 그래서 늦가을의 길상사는 참으로 쓸쓸했다.


길상사 극락전

▲ 길상사의 중심, 극락전 ⓒ김정은

 

현판에 쓰인 '맑고 향기롭게'

▲ 맑고 향기롭게 ⓒ김정은 

 

길상사의 종

▲ 길상사의 종 ⓒ김정은 


그때 극락전 저 멀리서부터 작지만 힘있는 염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절 군데군데에는 법정 스님이 남긴 삶의 가르침이었다던 ‘맑고 향기롭게’라는 문구가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은은히 울리던 청명한 종소리. 모든 욕심을 버린 고귀한 초연함이 녹아 있던 곳, 그래서 늦가을의 길상사는 참으로 높았다. 



길상사와 김영한, 그리고 백석


길상사 팔작지붕 대문

▲ 일주문을 대신하는 길상사의 팔작지붕 대문 ⓒ김정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위치한 길상사는 여느 사찰들과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부분 사찰의 입구에는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경계 짓는 ‘일주문(一株門): 기둥이 한 줄로 이어져있는 형태의 문’이 있다. 하지만 길상사의 경우, 마치 궁궐의 입구와 같은 팔작지붕의 대문이 이를 대신한다. 이는 길상사의 독특한 설립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길상사 공덕비로 통하는 길

▲ 길상화 공덕비로 가는 길 ⓒ김정은

 

길상사는 본래 1970년대 요정 정치의 중심이던 고급 요릿집 대원각이었다. 7천여 평의 터와 40여 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요정, 대원각의 주인은 세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김영한, 자야, 그리고 길상화. 1916년에 태어난 김영한은 열여섯에 기생이 되었고, 1937년 시인 백석을 만나 ‘자야’라는 아명을 얻었다. 자야와 백석은 3년여 간 뜨겁게 사랑했지만, 기생 출신인 자야를 받아들일 수 없던 백석의 부모의 반대로 헤어졌다. 해방 이후 백석은 북으로 갔고, 둘은 죽을 때까지 영영 서로를 볼 수 없었다. 1987년, 자야는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대원각을 시주했다. 그리고 법정스님으로부터 ‘길상화’라는 불명(佛名)을 얻었다. 


길상화 공덕비 / 묘비 문구: 시주 길상화 공덕비

▲ 길상화 공덕비 ⓒ김정은 

 

‘1,000억 원의 재산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하다.’ 

김영한이 전 재산에 달하는 대원각을 시주하며 남긴 이 말은, 백석이 그의 생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김영한의 공덕비 아래 나부끼며 바스라지는 낙엽이 꼭 이루지 못한 애달픈 사랑의 잔해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죄 많은 사람’이라 칭하며,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이곳에 맑고 장엄한 종소리가 울리기를 바란다던 김영한의 진심은 고귀했다. 그야말로 쓸쓸하고 높았다. 그가 그렇게 사랑하던 백석처럼. 



한평생 높고 쓸쓸했던 백석이기에 



늦가을의 길상사를 둘러보며 백석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김영한을 위해 썼다는 사랑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가 아닌, <흰 바람벽이 있어>였다.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높고 쓸쓸했던 백석을 떠올려본다. 쓸쓸하지만 높았던 늦가을의 길상사는 백석과, 그리고 그를 사랑하던 한 사람의 마음과 참 닮아있었다. 



○ 공간 정보

주소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잠로5길 68 (성북동)


○ 사진 촬영_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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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김정은
인문쟁이 김정은

2019 [인문쟁이 5기]


아는 것이 꽤 있고 모르는 것은 정말 많은, 가끔 어른스럽고 대개 철이 없는 스물넷. 말이 좀 많고 생각은 더 많다. 이유없이 들뜨고 가슴이 설렐 때, 조급함과 불안감에 가슴이 답답할 때 모두 글을 쓴다. 때때로 물안개같이 느껴지는 삶 속에서 확신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글을 쓸 때의 내가 가장 사람답다는 것.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람다워지고싶어 인문쟁이에 지원했다.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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