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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탄에 떨어진 배롱꽃에 은일하다

무등산 자락의 원림 명옥헌, 소쇄원, 독수정

인문쟁이 김지원

2019-09-17


담양의 여름은 백일홍이다. 이 은유가 지나치지 않은 것은 8월과 9월에 담양을 방문하면 어느 곳에서나 붉은 백일홍 꽃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광주댐이 생기기 전에 무등산에서 시작돼 식영정과 환벽당 사이로 흐르던 천을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는데 백일홍의 다른 이름이 자미화이다. 


화려하게 붉은 꽃을 피운 백일홍

▲한여름 담양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는 백일홍 ⓒ담양군청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공간, 원림(園林)



백일동안 피고 지는 배롱꽃을 따라가면 그 사이에 별처럼 흩어져있는 누정(樓亭)과 마주친다. 누정이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높이 지은 누각(樓閣)과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는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광주와 담양 인근에는 정철의 송강정과 송순의 면앙정, 임억령의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명옥헌, 독수정 등이 과거의 기억을 새기고 섰다. 그 중 독수정과 명옥헌, 소쇄원은 자미탄을 따라 무등산 자락을 정원 삼아 조성된 원림이다.


원림(原林)은 한국의 정원 양식이다. 정원이 자연의 모습을 축소하여 인공적으로 집 안에 만드는 것이라면 원림은 자연의 상태를 최대한 보존하여 그 안에 건물을 세우는 형태이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이기도 하고 공간을 확장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소유보다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삶을 지향했던 세계관이 반영된 건축양식이라 하겠다.


연못 위에 드리워진 꽃 그림자와 꽃잎들이 구분할 수 없게 어우러졌다

▲명옥헌 연못에 떨어진 꽃잎과 꽃 그림자 ⓒ김지원



연못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옥구슬 같구나, 명옥헌(鳴玉軒)



명옥헌은 한 번에 지어진 원림이 아니다. 조선 중기 오희도(吳希道 1583~1623)가 광해군 치세의 세상을 멀리하고자 후산마을로 내려와 망재라는 서재를 짓고 살다가, 그의 사후에 아들 오명중이 아버지의 뜻을 기려 명옥헌을 세웠다.


후산마을 골목길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길을 넘어서면 좁은 시야가 넓어지고 백일홍 군락이 눈앞에 펼쳐진다. 설핏 드러나는 누각의 지붕은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天圓地方)’는 세계관이 구현된 연못은 각진 형태이고 한가운데 둥근 섬이 있다. 못 둘레는 사람 한둘이 걸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제외하고는 온통 백일홍 나무로 무성하다. 아직 만개하지 않았지만 무심한 바람에 떨어진 꽃잎이 물 위에 떠다닌다. 수면에 비치는 배롱꽃 그림자와 떠 있는 꽃잎을 구분하기 어렵다. 매혹당하듯 꽃그림자에 시선을 빼앗긴다.


명옥헌 전경. 시민들이 처마 그늘에 앉아 쉬고 있다

▲산의 경사면에 높이 세워진 명옥헌 ⓒ김지원


명옥헌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된 누정으로 가운데 방이 있다. 연못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마루까지 높다. 사방에서 바람이 들도록 문을 올려 걸어놓았는데 네모난 문으로 보이는 장면은 그 자체가 액자 안의 그림이고 뷰파인더에 담긴 세상이다. 난간에 기대어 앉아 옥구슬 구르는 것 같은 시냇물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귀를 기울여도 소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만 간간이 난다. 아마도 적막한 밤에나 들을 수 있을 듯하다. 혹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담은 귀를 씻어내고 은일하는 이에게는 들릴지도 모르겠다.



맑고 깨끗하다, 소쇄원(瀟灑圓)



자미탄을 거슬러 광주호와 가사문학관을 지나면 소쇄원이다. 조선 중기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스승인 조광조(1482~1519)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능주로 유배되고 사사(賜死)되자 이곳에 들어와 살았다. 소쇄원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자연 속에서 맑고 고고하게 살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소쇄원 가는 길. 대나무길이 푸른 그림자를 만든다.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푸른 대나무숲 길 ⓒ김지원


매표소에서 청둥오리가 노니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넓은 대나무 숲이 나오고 그 가운데로 길이 났다. 한낮의 뜨거운 볕도 대숲 그늘 안에서는 맥없이 스러진다. 짙은 녹음에 눈이 편안해지고 더운 몸이 서늘하게 식는다. 작은 구릉을 지나면 선경(仙境)과 같은 소쇄원이다. 산과 계곡을 그대로 두고 자연 안에 건물을 지은 원림이다. 가운데 계곡물이 흐르고 왼쪽에 제월당과 광풍각이 있고 오른쪽에는 물길을 내서 만든 연못과 대봉대와 애양단이 있다.


애양단으로 가면서 지나는 흙담길.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애양단으로 이어지는 흙담과 봉황을 기다리는 대봉대 ⓒ김지원



귀한 손님이 오면 버선발로 맞이하리라



입구를 들어가면 대봉대(待鳳臺)가 봉황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소쇄원의 주인은 이곳에서 올곧은 마음을 지닌 선비가 오기를, 성군이나 그가 다스리는 태평성대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대봉대 오른쪽에 든든하게 선 담벼락에 이름이 새겨졌다. 애양단(愛陽檀), 북풍을 막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과 따사로운 볕처럼 골고루 내리쬐는 부모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세운 담이다. 햇빛이 눈부신 이곳에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소쇄원 48영>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계곡을 건너기 위해 물 위에 걸쳐진 외나무다리를 걷는데 애양단의 흙담이 따라온다. 계곡에 큰 돌들을 괴어서 다리를 놓고 그 위에 담을 쌓아 제월당 뒤쪽까지 이어진다. 담장 아래로 흐르는 계류가 멋스러울 뿐만 아니라 닫힌 듯 열린 경계와 공간이 절묘하다.


계곡의 큰 돌로 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흙담을 쌓았다

▲계곡에 큰 돌들을 괴어서 놓은 다리와 그 위로 쌓은 담 ⓒ김지원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처럼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제월당(霽月堂)은 주인이 공부하고 휴식을 하던 공간이며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광풍각(光風閣)은 손님이 머무는 곳이다. 두 건물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규모다. 겨울에 난방할 수 있는 함실 아궁이가 있고 키 작은 굴뚝이 있다.


소쇄원은 계곡의 경사면을 따라 조성됐기 때문에 전체적인 지형은 왼쪽이 더 높은 V자 형태다. 제일 높은 곳에 세워진 제월당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이다. 돌로 기단을 쌓아 건물을 지었고 정면에 넓은 마당을 만들었다. 객을 맞으러 광풍각으로 가려면 좁고도 낮은 문을 고개를 수그리고 지나야 한다. 저절로 자세가 낮춰진다. 광풍각은 마당이 없는 대신 바로 앞으로 계곡물이 흐른다. 소쇄원에서 ‘뷰’가 가장 좋은 곳이다. 오랜만에 들른 시인 묵객이 속세의 시름을 잊고 학문과 문학을 논하며 기거하기에 더없이 좋았겠다.


제월당 전경. 옛 사람이 공부했던 그 곳에서 지금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며 잠시 쉰다.

▲주인이 공부하고 휴식을 하던 공간인 제월당 ⓒ김지원

 

광풍각과 계곡, 자연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손님이 묵어가는 광풍각과 계곡의 절경 ⓒ김지원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처럼



바람이 쉬 드나드는 마루에 걸터앉으면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어느 곳에도 구속되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다. 오래 머물고 싶다.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더 머물고 싶은 마음도 이곳에서는 욕심일 것 같다. 섬돌을 딛고 대나무 숲 사이로 난 다리를 건너며 선계(仙界)를 벗어난다.


소쇄원을 떠나는 다리. 아득한 아름다움을 두고 가기에 발걸음이 무겁다.

▲소쇄원이라는 선경을 나가는 다리 ⓒ김지원


여러 번 소쇄원을 방문하지만 올 때마다 새롭다. 로버트 사부다의 팝업북 <오즈의 마법사>를 펼칠 때처럼 다양함과 정교함에 놀란다. 평면 위로 솟아난 건축물은 입체에 입체를 더한 것 같다. 구조가 단순한 것 같은데 경사면에 여러 개의 단을 만들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몇 겹으로 숨은 공간을 발견한다. 나오거나 들어갈 때 매표소에서 안내 팸플릿을 챙기면 좋다. 눈과 마음으로 보았던 소쇄원에 대한 설명이 꼼꼼하다. 1755년에 제작된 소쇄원 목판 탁본도인 <소쇄원도>에 지금은 없는 고암정사(鼓岩精舍)와 부훤당(浮喧堂)이 있고, 원림에 심었던 나무와 인근의 지명도 상세하게 나왔다.



홀로 절개를 지키리라, 독수정(獨守亭)



독수정 전경. 원림을 배경으로 고독하게 서 있다.

▲북쪽을 향해 홀로 선 독수정 ⓒ김지원


소쇄원에서 지근거리, 무등산 둘레길 무돌5길 초입에 외롭게 선 원림이 있다. 고려 말, 지금의 국방장관인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全新民 생몰연도 미상)은 고려가 망하자 두 나라를 섬기지 않겠다며 담양으로 내려왔다. 그는 이곳에 독수정을 짓고 매일 아침 조복을 입고 북쪽에 있는 송도를 향해 곡배(曲拜)를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정자가 볕바른 남향인 것에 비해 독수정이 북향인 건 그 때문이다. 독수정의 이름이 충의를 상징하는 백이와 숙제를 기린 이백(李白 701~762)의 시 <소년자>에서 비롯됐다고 하니 고려에 대한 그의 절개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광주와 담양의 다른 누정에 비해 독수정은 덜 알려졌고 발길도 뜸하다. 이름처럼 외롭고 쓸쓸하다. 누군가는 그를 보고 구시대를 답습하는 답답한 인물이라 평하겠지만 그의 단심은 정자 옆에 핀 배롱꽃처럼 붉고 아름답다.


○ 참고 문헌

천득염, 『광주문화재단 누정총서-소쇄원』, 심미안, 2018.

국윤주, 『광주문화재단 누정총서-독수정, 명옥헌』, 심미안, 2018.

담양군, <소쇄원 안내 팸플릿>


○ 공간 정보

명옥헌 : 전남 담양군 고서면 후산길 103

소쇄원 : 전남 담양군 가사문학면 소쇄원길 17 / 입장료(성인) 2,000 / 입장시간 9:00~19:00(7~8월)

독수정 : 전남 담양군 가사문학면 연천리 


○ 관련 링크

소쇄원 : www.soswaewon.co.kr


○ 사진 촬영 _ ⓒ김지원, 담양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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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쟁이 김지원

2019 [인문쟁이 5기]


쓰는 사람이다. 소설의 언어로 세상에 말을 건네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살고 싶은 마음과 길가 돌멩이처럼 살고픈 바람 사이에서 매일을 기꺼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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