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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든과 쉰 대장장이 부자의 오래된 작업장

불광대장간 박상범, 박경원 부자

김세진

2018-11-09


두 사람 호흡 맞추는 데는 한마디 말도 필요 없다. 빛깔도 고운 주황색을 띤 쇠를 박경원 씨가 풀무에서 꺼내 모루 위에 얹어 놓으면 박상범 씨가 쇠메로 내리쳤다. 몇 번 메질이 오가고 박경원 씨가 집게로 살짝 쇠의 방향을 돌리자 메는 정확히 쳐야 할 곳을 내리쳤다. 그러는 사이 망치 모양이 잡혔다.


좌) 대장장이 부자의 작업 모습, 우) 불광대장간 내부 망치들


뜨거운 풀무불과 시끄러운 소리, 풀풀 날리는 쇠 먼지를 예상했는데 불광대장간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오래된 물건들이 단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주소를 보고 찾아가다가 대장간 존재를 몰라보고 그저 지나칠 뻔했다. 어디선가 ‘탕, 탕’ 소리가 들렸지만 거슬릴 만큼 거칠거나 크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경쾌한 망치질 소리를 귀 기울여 듣다 보니 어느새 다음 장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층간 소음으로 문제가 많은 시대에도 불광대장간이 초등학교와 아파트가 있는 작은 골목을 지키고 있는 이유려니 싶었다.


“연장은 손으로 만들어야 오래 써요. 쓸 때도 사람 손에 꼭 맞고 고쳐 쓸 수도 있고. 여기서 만든 건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이야.”


메질하고 쇠가 모양을 잡는 오래된 모루를 ‘밥상’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아들과 둘이 함께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게 박경원 씨는 좋다.


“국수 한 그릇 얻어먹으려고 시작했어요. 한국전쟁 때 철원에서 피난 왔는데 미국에서 주는 배급으로는 부족한 거야.

동네 동대문 대장간에서 허드렛일하면 국수 준다고 해서 시작했어요.”


열세 살 소년 박경원은 그렇게 대장간 일에 발을 들였다. 휴전하고 철원으로 돌아갔지만 고향 선배의 부름으로 2년 만에 다시 서울 미아리고개에 있는 대장간에서 일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새벽부터 종일 몸 써가며 뜨거운 불 앞에서 일하는 게 버거웠는지 한번은 졸다가 화덕에 있는 칼이 녹는지도 몰라 호되게 혼이 났다. 쇠를 내리칠 때 불똥이 튀어서 솜털이 타며 난 상처들을 곳곳에 새기며 대장간 일을 배웠다.


“미아리 대장간에서 3년 있다가 을지로7가 대장간에 가서 8년을 배웠어요. 당시에 을지로7가가 세상에서 제일 클지도 모른다고 우리끼리 이야기할 정도로 대장간이 몰려 있었어요. 더 배우려고 선배들에게 술 사며 묻기도 하고, 19살부터 25살까지 거기 있으면서 결혼도 했어요.”


풀무질하고 쇠 달구기만 3년, 빨갛게 달군 쇠를 두드려 단련하는 메질만 4~5년을 거쳐 집게 잡는 일을 맡아 쇠에 모양도 내게 되었다. 서른도 되지 않은 때, 젊은 기술자가 되었다.


아버지 대장장이 박경원


“내가 손이 빠른 편이에요. 눈썰미가 있는지 빨리 배워요. 스무 살부터 마흔 살 넘는 사람까지 을지로에서 일했는데, 밥을 먹을 때는 기술자들끼리 앉았어요. 오래 일하고 나이가 많아도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기도 하는데 나는 운이 좋았어요. 어린 나이에 기술자가 되어 가지고 밥을 먹을 때면 나이 많은 아저씨가 ‘저쪽에 앉아 먹으라’고 기술자들에게 떠밀곤 했어요.”


백 원이면 쌀 서너 말을 살 수 있는 때에 그는 하루 품값으로 3만 원을 받았다. 수제 구두 한 켤레 값이었다. 하루 만 이천 원 받는 메질꾼보다 두 배도 더 벌었다. 적당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독립했다.


“리어카 하나 사서 진흙으로 화덕을 만들어서 이동 대장간을 했어요. 불광초등학교 앞 개천가에서 했는데 비 오는 날은 공치고,

그렇게 3년 했는데 개천이 철거된 거야. 그래서 1973년 터미널 근처 여기 대조동에 가게를 얻어서 시작한 거야.”


사람들이 주로 찾는 것은 호미며 낫 같은 농기구였다. 수원성을 재보수할 때는 건설 공구 주문이 엄청나게 들어오기도 했다. 손님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더 많은 연탄을 집을 수 있게 제작한 연탄집게는 멀리서도 찾아올 정도로 인기였다. IMF 전에는 문을 열자마자 사람들이 오고,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였다.



대를 이어 대장장이가 된 아들


아들 대장장이 박상범


“사람 둘을 쓰셨는데 일이 힘드니까 일하던 사람들이 자꾸 잠적했대요. 막상 큰 주문을 받아놨는데 사람이 없어지니 할 수 없이 어머니가 같이 일했어요. 젊은 나도 힘든데 어머니는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안쓰러웠어요. 어떻게 군대를 가까운 데 배치를 받았고 휴가를 자주 나왔는데 휴가 나오면 종일 대장간 일을 도와드리다 들어가곤 했어요.”


박상범 씨는 부모님 일손을 덜어드리려는 마음에 발을 들였고 제대 후에는 “사람 구할 때까지”만 한 달 정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약주 한 잔 드시고 오셔서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아버지가 나는 너랑 하니까 마음이 참 편하고 좋은데 이 일 하는 게 어떠냐고. 그 자리에서 대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이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생각해 볼 테니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말씀드렸어요.”


주위 어른들과 삼촌을 찾아가 여쭤보니 아버지가 이미 기반을 닦아 놓았으니 할 만할 거라고 조언하셨고 박상범 씨는 대장간 일을 열심히 함께하기로 마음을 결정했다.


“친구들이랑 다 놀랐지. 그래도 하기로 했으니 열심히 했어요. 다들 안 하려는 대장간에 젊은 사람들이 있으니 손님들이 놀라며 격려해 줬어요. 어느 날은 스님이 찾아와서 ‘이 일이 덕 쌓는 일’이라고 말해 주고 대기업 다니는 어떤 분이 와서는 ‘남들이 안 하는 걸 선택하는 게 경쟁력이 있다’며 ‘잘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말 듣고 몇 년 뒤에 ‘블루오션’이라는 말이 뜬 거야.”


쉬이 많이 찍어내서 쉬이 쓰고 버리는 게 대세인 시대에 불과 물을 오가며 단련하고 메질을 해대 다독여 물건을 만들고 고쳐 쓰는 일은 그야말로 블루오션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의 진가는 써 본 사람들은 안다. 이 시대에도 대장간 일은 “큰돈은 아니어도 먹고살 만한 일”이다. 오십 줄에 접어들자 박경원 씨 친구들은 서서히 은퇴를 걱정하며 이제 자기만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박경원 씨를 부러워한다.


“물론 몸이 힘들긴 하죠. 하지만 일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아요. 그럼요. 정말 감사하죠. 일을 할 수 있어 감사하고 또 멀리서 우리 물건 찾아오시는 분들 보면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한번은 어느 할머니가 오셔서 자기가 병이 걸려서 곧 죽을 건데 마지막으로 대장간 모습을 보고 싶어 왔다며 한참을 보시다 가셨어요. 그런 거 보면 찡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죠.”


불광대장간 외부


3대를 꿈꾸는 대장간


이제 고3인 아들도 얼핏 대장간 일에 관심을 보인다. 다른 경험을 쌓고 와도 나쁘지 않겠다 싶고, 때가 되어 막상 해야만 진짜 하는 것이라 강요하진 않지만 같이 메질을 하는 상상을 하면 기분이 좋다.


“아까 아버지 건강 물으셨죠? 여든이신데 지금도 아침저녁 체력 단련하세요. 대단하죠?

제가 한 20년 전에 안마의자를 사드렸는데 그거 매일 쓰시고, 얼마 전엔 낡아서 새 걸로 사드렸어요. 아들놈도 본 게 있으면 알아서 잘하겠지.”


미소에 자신감이 묻어 있다. 그래, 본 게 있으면 알아서 잘할 테고, 써 본 게 있으면 또 찾게 되어 있는 게다. 그 당당함으로 박경원 박상범 씨 부자는 오늘도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을 만들어 ‘불광’이라고 불도장을 박아 내놓는다.


  • 불광대장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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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루
  • 장인
  • 대장간
필자 김세진
김세진

숨어 있는 소소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일상을 이야기와 음악으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 덕분에 눈이 맑아지는 행운을 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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