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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사월 문학 속을 걷다

4·3 문학 속 유적지 탐방

인문쟁이 양혜영

2018-04-02

사월, 제주                              

따뜻해진 바람 끝에 벚꽃이 눈처럼 날린다. 해안을 두른 밭담 가에서 유채꽃이 노랗게 출렁인다. 4월이 되면 제주는 앞다투어 피는 봄꽃의 향연으로 분주하다. 봄여름 가을겨울. 사계절 어느 한 철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지만, 유독 이맘때의 쪽빛 바다와 돌담 새로 핀 화사한 꽃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뭐라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다.

 

봄꽃이 아름다운 건 지난한 겨우내 얼어붙은 생가지를 찢고 틔운 몽우리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는 제주의 봄꽃은 그런 생채기를 딛고 올라온다.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 미미해 몸을 낮추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다.

 

작고 가냘픈 풀꽃의 소리를 듣기 위해 숨을 죽이고 땅바닥에 몸을 숙이는 일, 우리는 그것을 ‘문학’이라고 한다. 70년 전, 제주는 4·3이란 거대한 광풍 앞에 쓰러져야 했다. 수많은 제주의 꽃 같은 목숨이 미처 피지도 못한 채 꺾이고 밟히고 잘려나갔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선혈을 흘리는 제주의 아픈  4·3 문학 속으로 들어가 보자.

 

4·3문학의 시작 '순이삼촌' 현기영 소설가의 작품들

▲ 4·3문학의 시작 '순이삼촌' 현기영 소설가의 작품들



뼈의 기억, '정뜨르 비행장'

제주도를 말할 때 흔히 따뜻한 남쪽나라, 빡빡한 일상을 벗어나 한 달만 살고 싶은 여행지란 수식어가 붙는다. 숨 가쁜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인의 가슴엔 배낭 하나 둘러메고 훌쩍 비행기에 오르고 싶은 소망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설렘을 안고 제주로 향하면 가장 먼저 닿는 곳이 제주국제공항이다. 낯선 만남과 떠남을 의미하는 장소이자 특별한 기억이 묻혀 있는 곳.


하루에도 수백의 시조새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할퀴며 차오르고
찢어지는 굉음으로 바닥을 짓누르며 내려앉는다
차오르고 내려앉을 때마다
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직 
- 김수열 시 '정뜨르 비행장' 中 1연


제주국제공항의 원래 이름은 '정뜨르 비행장'이었다. 우물이 있는 넓은 들이란 뜻을 지닌 정뜨르 비행장은 일제강점기 말 강제 동원으로 만들어졌다. 1948년 4·3 발발 직후부터 1950년 *예비검속에 이르기까지 제주 주민들을 일상처럼 끌고 가 처형한 제주 최대의 학살터였다.
*예비검속: 범죄 예방을 이유로 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미리 구금하는 것

 

4·3 당시 제주 정뜨르 비행장에 도착한 미47수송기

▲ 4·3 당시 제주 정뜨르 비행장에 도착한 미47수송기(사진 출처=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


이따금 나를 태운 시조새
하늘과 땅으로 오르내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잠시 두 발 들어올리는 것
눈 감고 잠든 척하며 창밖을 외면하는 것
 
- 김수열 시 '정뜨르 비행장' 中 4연


하루에도 수백기의 비행기가 오르내리는 활주로 아래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못한 유해들이 가득하다. 그러니 비행기를 탈 때마다 우리는 발아래서 들리는 빠지직 비명 소리에 눈을 감지 않을 수가 없다.


옛 정뜨르비행장 터(현 제주국제공항)용담레포츠공원에 세워진 예비검속희생자원혼위령비

▲ 옛 정뜨르비행장 터(현 제주국제공항,좌)와 용담레포츠공원에 세워진 예비검속희생자원혼위령비(우)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제주국제공항에서 동쪽으로 차를 타고 30여 분 가면, 물 맑고 산세 고운 ‘곤을동’이 보인다. 예부터 물이 맑아 '곤을동'이라 불렸다는, 이름마저 맑은 그곳에 닿으면 제일 먼저 사연 많은 쪽빛 바다와 바람결 따라 우거진 수풀 새에 듬성듬성한 검은 돌담이 반긴다. 시원한 바람과 쉼 없이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귓가에서 지절대는 곳.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과 달리 텅 빈 마을에선 생명의 온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돌담만 남아 있는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1돌담만 남아 있는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2

▲ 돌담만 남아 있는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안드렁물 용천수는 말 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별도천 따라 흘러가 버렸네
별도봉 아래 산과 바다가 만나 모여 살던 사람들
원담에 붉은 핏물 그득한 그날 이후
이제 슬픈 옛날이 되었네
- 현택훈 시 '곤을동' 中


4·3사건 진압 과정 중 군경의 초토화작전으로 크고 작은 마을들이 불에 태워져 폐허가 되거나 농경지로 전락했다. 제주4·3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그렇게 제주에서 4·3사건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108군데가 넘는다고 한다. 그 후 70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금방이라도 물가에서 방망이로 이불을 두들기며 빠는 아낙네들의 웃음이 들릴 것만 같은 곤을동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먹이를 찾는 까마귀의 황망한 날갯짓과 바짝 메마른 연자방아의 서글픈 울음뿐이다. 물이 있어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맑은 물이 고여 곤을동이라 불린 그곳은 그렇게 슬픈 옛날,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 버렸다.


곤을동 마을에 남아있는 무너진 집터와 연자방아

▲ 곤을동 마을에 남아있는 무너진 집터와 연자방아



제주 4월 문학의 시작, '순이삼촌'

곤을동 해안가를 따라 동쪽으로 30분쯤 가면 북촌마을이 나온다. 1978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4·3을 알린 소설, '순이삼촌'이 나온 곳이다. '순이삼촌'은 1949년 1월 17일에 벌어진 북촌리 양민학살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같은 날 아침 북촌 마을 어귀에서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숨지자 군인 2소대가 들이닥쳐 마을주민 400여 명을 북촌국민학교 옆 옴팡밭에서 학살했다. 이 중에는 젖을 떼지 못한 갓난아기와 걸음을 걷지 못하는 아이도 여럿 끼었다. 지금도 그날이 되면 북촌마을 집집에선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다.


 "아,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에서 터져나오던 곡성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5백 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 현기영 소설 '순이삼촌' 中


북촌 주민 참사가 있었던 북촌초등학교와 인근 밭에 남아 있는 무덤

▲ 북촌 주민 참사가 있었던 북촌초등학교와 인근 밭에 남아 있는 무덤


북촌 그곳. 에메랄드빛 바다를 등진 하얀 기와들이 이마를 맞대고, 샛노란 유채꽃이 검은 돌담을 환하게 밝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 어귀에 그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은 '너븐숭이 4·3기념관'이 있다. 마을주민들이 무참히 쓰러져간 옴팡밭과 비석 없이 돌로 적당히 쌓아올린 '애기무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을 생생히 전하는 순이삼촌 문학비가 그곳에서 서글픈 모습으로 기다린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변한 듯 변하지 않았고 아물지 못해 여전히 아픈 상처들.


"순이삼촌의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죽음이라 생각한다. 다만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다. 고샅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아마 두어 집째 제사를 끝내고 마지막 집으로 옮아가는 사람들이리라."  - 현기영 소설 '순이삼촌' 中

 

너븐숭이 4·3기념관에 있는 너븐숭이 옴팡밭순이삼촌 문학비

▲ 너븐숭이 4·3기념관에 있는 너븐숭이 옴팡밭과 순이삼촌 문학비



봄, 다시 4·3

다시 봄이 왔다. '봄'이란 말은 '보다'에서 왔다고 한다. 겨우내 단단히 얼어붙은 대지에 파릇한 새움이 돋고, 바짝 마른 초목에 싱그런 물이 차오르고, 만물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활발히 움직이는 새 계절이 보인다는 뜻일 것이다.


제주의 봄은 4·3을 지나야 비로소 보인다. 제주의 사월문학이 북촌의 '순이 삼촌'에서 시작된 것처럼. 북촌을 거쳐 남도의 어느 방향을 향해 걸어도 우리는 또 다른 순이삼촌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아직도 정뜨르비행장과 곤을동처럼 아물지 않은 4·3 이야기들이 제주 곳곳에 남아 있다. 70년을 부지런히 걸어 오늘에 닿았지만, 앞으로 70년 아니 700년을 더 걸어야 하는 이유다.

 

사진= 양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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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소개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
주소: 제주 조천읍 북촌3길 3
안내전화: 064-783-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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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쟁이 양혜영

2017,2018 [인문쟁이 3,4기]


양혜영은 제주시 용담동에 살고 거리를 기웃거리며 이야기를 수집한다.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희귀병을 앓고 있어 매일 책을 읽고 뭔가를 쓰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에만 집중된 편독에서 벗어나 인문의 세계를 배우려고 인문쟁이에 지원했고, 여러 인문공간을 통해 많은 경험과 추억을 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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