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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마을 터줏대감 이승호 씨

우리 동네 토박이와 걷다

전상진

2016-01-07


“모든 인생은, 참으며 살면 세상사 모두 편할 수 있다.”고 삶의 좌우명처럼 말하는 사람. 홍천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 평생을 살아온(물론 10여 년 간 서울 생활 한 적이 있지만) 터줏대감 이승호(76) 씨를 만나 마을 곳곳을 돌면서 그가 살아온 삶과 마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이응노마을 토박이 이승호씨

    이응노마을 토박이 이승호씨

고암 이응노와 먼 친척, 고암 생가 삼대 째 살다가 내놓고 이사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홍천마을의 터줏대감을 자처하는 이승호 씨는 2011년 11월 개관한 ‘이응노의 집·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이하 이응노의 집)’과 인연이 깊다. 이 씨 자신의 집이 바로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 백월산과 용봉산을 보고 자라며, 더 큰 화가의 꿈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었기에 그렇다.

바쁜 농사일을 잠시 쉬노라면 여지없이 ‘이응노의 집’으로 달려오는 그는 고암이 살았고, 자신이 평생을 살려고 터전으로 삼은 생가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이응노의 집’ 사람들과 두런두런 한두 마디 이야기를 건네다 다시 이사를 한 홍천 1차 문화마을 집으로 돌아가기 일쑤다.

그는 복원된 고암 생가 툇마루에 앉아 고암과 생가에 얽힌 이야기의 실타래를 본격적으로 풀어놓기 시작했다. “고암 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집을 개축해 예전 고암 생가는 어렴풋 기억만 날 뿐.”이라며 “그래도 고암 생가를 복원하고 ‘이응노의 집’으로 만드니 뿌듯해요.”라며 고암 생가를 넌지시 바라보며 회상에 젖는다.

그는 “비록 낡은 초가집이었어도 삼대가 모여사니 다복하고 정겨웠어요. 60여 년을 살아온 집인데 떠나려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그래도 홍성군에서 대대적으로 우리 친척 일가 가운데 한 분인 고암을 기념한다고 하니 좋은 일이라 여겨 정든 집을 내주었어요. 아쉬운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랫동안 고암을 기릴 수 있어 개인적으로 참 뿌듯해요.”라고 말하며 툇마루에서 일어섰다.

‘이응노의 집’ 찾을 때 마다 고암 이응노와의 깊은 인연 생각

이 씨는 지난 2007년 고암 이응노의 출생지를 놓고 홍성군과 인근 예산군 사이에 벌어졌던 공방을 종식시킨 사람이다. 당시 그가 98년 전 만들어진 고암 이응노 일가의 족보를 공개하며, “고암이 홍성 동막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전의 이 씨 족보’가 공개되자 논란은 순식간에 수그러들고, “고암 이응노 화백의 고향이 홍성”이라는 결론이 나며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고암 이응노와 같은 전의 이 씨로 먼 친척뻘이 된다는 그가 기억하는 고암 생가는 홍성군의 구 토지대장에 홍천면 중리 386번지(현재 이응노로 67)로 기록되었고, 고암의 아버지인 이근상이 1914년 10월 24일(고암의 나이 11세 때) 일본인에게 팔아 생가의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다시 한국인 정영손 씨 등에게 매매되었다가 마지막으로는 그의 조부인 이광세 씨가 소유하게 되었다.

  • 2014년 이응노 화백 생가 이엉작업

    2014년 이응노 화백 생가 이엉작업

  • 이응노 화백 생가 전경

    이응노 화백 생가 전경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는 고암 생가의 예전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어릴 적 기억이라 어렴풋하지만, 그때는 방 두 칸, 부엌 한 칸, 툇마루가 있는 초가집이었어요. 토방 높이가 어린아이 허리 정도였고, 그 위에 마루도 허리만큼 높았어요. 당시에는 살만한 집이긴 했는데, 새마을운동 당시 집을 새로 개축해 ‘이응노의 집’이 들어서기 전에는 옛날 모습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어요. 본래 생가에 대해 알고 싶으면 고암 이응노의 작품인 「고향집」과 「어머니」를 참고하면 좋아요. 예전 생가의 모습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죠” 하며 고암 생가를 한 바퀴 삥 돈다.

그는 고암 이응노와 먼 친척 관계이지만 나이 차가 많아 직접 뵌 적은 없다고 했다. 다만 “고암은 이미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라 직접 뵌 적은 없고, 당숙과 함께 나무를 하러 산을 올라 다녔다는 이야기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바 있다”고 말을 잇는다.

하지만 고암의 두 번째 부인인 박귀희 여사와는 몇 차례 왕래를 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매년 설 명절이 되면 할아버지께서 수덕사에 계신 박귀희 여사께 설 인사드리러 가라고 시키셨어요. 몇 년을 그렇게 다녔던 것 같은데, 갈 때마다 자상하게 챙겨주셨어요. 얼굴도 미인이셨고.” 하며 그는 허허 웃었다.

젊은 시절 타지에서 고생한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 눈시울 붉어져

이 씨는 ‘이응노의 집’이 들어서기 전까지 지금 복원된 생가 인근에 위치한 본래 고암 생가에서 살다가 ‘이응노의 집’ 건립이 시작된 2009년에 지금의 홍천 1차 문화마을로 이주해 살고 있다. 부모, 형제들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집인데다 느지막이 귀향해서 새롭게 터전을 일군 시점이어서 홍천마을로 이주를 결정하기까지 오랜 시간 망설였단다. 옛 기억을 더듬어 내려가던 그는 고단한 지난 삶을 회상하며 먹먹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바로 밑에 동생이 고등학교 시절 서울로 도망을 간 적이 있었어요. 2년 만에 다시 돌아왔는데 집에 돈을 벌 사람이 저 밖에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과 동생을 남겨두고 무일푼으로 서울행을 택했습니다. 사진관, 구멍가게, 과자공장, 제약회사 수금사원을 하면서 힘들게 돈을 벌었어요. 서울 생활이 쉽지는 않았어요.”라며 눈시울을 붉힌다.

“고생하는 아내가 어느 순간 너무 안쓰러운 거예요. 마침 아버지도 연로하셔서 고향서 같이 살자 하기에 10여 년 간의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홍성으로 내려왔어요.” 그는 서울 생활 중에 아내 김정수를 만나 결혼을 했다. 고향에서 농사짓고 아들딸 키우는 낙으로 사는 게 큰 행복이라고 한다.

“다시 고향에 내려와 평생 머무를 요량으로 집과 주변을 가꾸고 농사도 크게 짓기 시작했다.”는 그는 지난 1997년 마을에 홍성군위생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서자 “고암 이응노 화백이 태어나신 곳 바로 뒤에 쓰레기매립장을 만들면 되겠느냐.”며 마을 사람들을 모아 홍성군청, 대전 충남도청까지 가서 저지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가 당시 마을이장인 까닭도 있었지만, 딸기작목반장으로 쓰레기매립장 옆에서 나는 딸기를 소비자들이 반길 리 만무했던 게 그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지금도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서 마을이 둘로 나눠지고, 마을 사람들도 서로 불신하고 서먹해졌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 이응노 생가기념관 야경

    이응노 생가기념관 야경

‘이응노의 집’ 건립 후 마을 위한 일 언제나 누구보다 먼저 참여

하지만 이후 ‘이응노의 집’ 건립계획이 세워지자 고암 생가에 살고 있던 이 씨는 반가움과 아쉬움의 교차 속에서 어렵게 이주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는 “그때 담당 공무원인 공필재 씨가 삼고초려하며 부탁하는 데 감동해 결정을 내린 거라고 보면 되요.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은 처음 봤어요. 어쨌든 이응노의 집이 건립되어 명소로 인정받고 있으니 후회는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돌고 돌아 ‘이응노의 집’으로 온 공필재 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농사일 틈틈이 ‘이응노의 집’ 주변 환경미화를 위한 공공근로에 참여하며 소일거리를 돕고 있다. 복원된 생가 툇마루에 앉아 볕을 쬐는 시간도 이 씨에게는 옛날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이응노의 집을 통해 마을이 발전되는 일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참여하고 싶어요. 또 농사꾼으로 살아왔으니 열심히 농사도 짓고.” 허허 하며 웃음 짓는다.

올해부터 문화특화지역 이응노마을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 씨가 갖는 기대감도 크다. “아직 마을 사람들은 이응노마을 사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요. 이익이 생기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위생쓰레기매립장 건립 반대처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 일을 계기로 화합했으면 해요. 이응노마을 사업이 성공적으로 잘 되길 바랍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이제 이응노의 집에서 이응노마을 사업이 한창인 홍천마을로 향한다. 그는 마을로 가는 도중에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매달 첫 번째 월요일에 열리는 힐링반상회에 꼭 참여했고, 1년여 간 진행된 ‘생활예술화 교육 프로그램’에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노라고. ‘목수 양성과정’, ‘DIY·정크아트 작품 만들기’, ‘우리 동네 사진사’, ‘산야초 달지 않은 명품효소’, ‘내가 만든 밥그릇’ 등 교육 프로그램에서 언제나 그는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었고, 나는 거기서 그의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를 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간 곳은 마을복지회관. 1년에 한두 차례 마을총회 때만 사용된 신 회관이 예술센터로 바뀌고, 마을창고로 사용된 구 회관은 이제 북카페와 도예공방로 탈바꿈했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적막하기만 했던 곳에 이응노의 집이 들어서면서 활력이 생겼고, 이젠 마을 사람들 모두가 홍천마을이 예술마을로 바뀌고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는 이런 일을 큰 변화로 체감하는 듯했다.

  • 이응노의집 연밭 전경

    이응노의집 연밭 전경

이응노마을, 옛 마을의 복원 이루어지길 이 씨는 새롭게 이주해 말끔히 정비된 1, 2차 문화마을 곳곳을 들러보며, “경관도 아름답고 말끔히 정비된 마을이지만, 조금은 적막한 느낌이 들어요. 오히려 낡고 오래되었지만, 옛 풍경을 간직한 마을복지회관과 주변 풍경이 그리워요. 이응노마을 조성사업을 통해 그 아련한 옛날 정겨웠던 마을로 되돌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며 조심스레 바람을 얘기한다.

그는 또 “연밭이 이응노의 집에만 있지만, 마을 곳곳에 확대되어 마을 사람들 소득에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모두가 지치지 않고 이응노마을 사업이 잘 이루어지길 저부터 나서 열심히 돕겠어요. 아주 작은 소망이지만 잘 사는 마을보다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마을에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며 그는 다시 이응노의 집 연밭을 지나 집으로 향했다.

“책이 애인이야, 애인.” 이승호 씨는 틈만 나면 책을 펼쳐 든다. “공부를 짧게 한 것이 두고두고 원이예요. 내가 하고 싶었던 거 못한 거.” 이렇게 말하는 그는 한때 고암 이응노 화백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지금은 소박한 농사꾼으로 남아 밤하늘에 빛나는 잔잔한 별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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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전상진
전상진

1990년 충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홍성·대전·서울 등 극단에서 연극배우·연출가로 활동했다. 1996년 지역신문으로는 전국 최초로 창간(1988년 12월)된 홍성신문에 입사, 3년 6개월 동안 편집국 취재부 기자로 일했다. 그후 9년여 간 연극계에서 활동하다 2009년 홍주신문을 거쳐 2010년 홍성신문 편집국 취재부 부장으로 재입사했다. 현재 홍성역사인물축제 추진위원, 홍주문화연구회 회장, 극단 치우미르 공동대표로 활동하는 한편, 이응노마을 사업 거버넌스 위원 겸 이응노마을신문 편집인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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