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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넓이

이문재

2021-07-19


혼자의 넓이 이문재 시집 창비시선459 창비

이문재 지음/창비/2021년/9,000원



해가 뜨면

나무가 자기 그늘로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종일 반원을 그리듯이

혼자도 자기 넓이를 가늠하곤 한다

해 질 무렵이면 나무가 제 그늘을

낮게 깔려오는 어둠의 맨 앞에 갖다놓듯이

그리하여 밤새 어둠과 하나가 되듯이

우리 혼자도 서편 하늘이 붉어질 때면

누군가의 안쪽으로 스며들고 싶어한다

너무 어두우면 어둠이 집을 찾지 못할까 싶어

밤새도록 외등을 켜놓기도 한다

어떤 날은 어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유리창을 열고 달빛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러다가 혼자는 자기 영토를 벗어나기도 한다

혼자가 혼자를 잃어버린 가설무대 같은 밤이 지나면

우리 혼자는 밖으로 나가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제 그림자를 찾아오는 키 큰 나무를 바라보곤 한다


『혼자의 넓이』 중 「혼자의 넓이」 전문



팬데믹 시대를 살면서 어쩌면 이런 시집을 기다려왔던 것도 같다.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여행을 가지 못해도 이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체념이 커질 때. 누군가와 무엇을 같이 했던 기억들이 사라지려고 한다. 혼자인 게 자연스럽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데 이토록 익숙해진 적이 있었나.


오랜만에 서점에 갔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한참을 서 있다가 책을 한 권 샀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시집을 펼쳐 든다. “나를 잊지 마세요/ 꽃말을 처음 만든 마음을 생각한다/ 꽃을 전했으되 꽃말은 전해지지 않은/ 꽃조차 전하지 못한 수많은 마음/ 마음들 사이에서 시든 꽃도 생각한다” 시집을 조용히 덮었다. 조금씩 천천히 아껴서 읽어야 하는 시집이구나, 싶은 마음에. 그리고 차창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마음들 사이에서 시든 꽃, 꽃조차 전하지 못한 수많은 마음에 대해서. 나를 잊지 말라는 그 말에 대해서.


팬데믹 시대에 시인은 혼자 지내야 하는 이들을 ‘혼자’라고 명명(命名)했다. <우리의 혼자>라는 시의 전문을 소개하지 못해 아쉽다. “혼자는 바쁩니다/ 친구를 만나지 않는 것도 혼자/ 그러면서도 혼자는 자기가 혼자라는 걸 누구한테 들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혼자 주변에는 온통 혼자입니다/ 혼자는 늘 혼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혼자들도 다 알고 있지만/ 서로 다들 혼자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않습니다(중략)”. 이 수많은 혼자들이 모여 사는 공동주택 입구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그리고 존이구동(存異求同)이라고 쓴 붓글씨가 걸려 있다고 한다.


『혼자의 넓이』는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로 그 뛰어난 시적 감각을 인정받은 이문재 시인이 칠 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다. “혼자서는 깨닫기 힘든 혼자의 팬데믹”의 세계를 깨끗하고 다정한 시어로 구축해 보여준다. 시집을 다 읽고 나자 이런 바람이 생긴다. 시인이 이제 ‘혼자’가 아닌 ‘우리’라는 명명법으로 시를 써주었으면 좋겠다고. ‘더불어 사는 혼자’에 대한 대화가 필요한 때가 돌아온 듯하니.


이 시집의 맨 끝에는 이런 시가 수록돼 있다. <혼자가 연락했다>. 누구에게든 연락 한번 해야겠다. 혼자 있을 혼자에게. 안부를 묻고 밥이나 한 끼 같이 먹는 게 어떠냐고. 


여름에는 시(詩)를 읽는다. 뜨거움과 차가움, 태양과 그늘에 대해 생각하듯이. 


추천사: 조경란(소설가)




○ 출 처 : 책나눔위원회 2021년 <7월의 추천도서> 문학 https://www.readin.or.kr/home/bbs/20049/bbsPostDetail.do?currentPageNo=1&tabNo=0&childPageNo=1&postIdx=1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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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이문재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지금 여기가 맨 앞』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미지 출처: 창비/훤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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