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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대화

『테크노폴리』의 저자 닐 포스트먼은 기술의 발달이 언어에 미치는 효과를 걱정스럽게 관찰한다. 새로운 기술이나 장치의 등장으로 없었던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는 것만이 아니다.

이성민

2017-10-12

기억과 대화

기억의 의미

 

『테크노폴리』의 저자 닐 포스트먼은 기술의 발달이 언어에 미치는 효과를 걱정스럽게 관찰한다. 새로운 기술이나 장치의 등장으로 없었던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는 것만이 아니다. 기술은 기존 단어의 의미를 부지불식간에 바꾸어놓기도 한다. 가령 미국에서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정치토론의 의미가 바뀌었듯 말이다. 그렇게 의미가 변경되는 단어들 중에는 우리의 신조나 원리가 되는 중요한 단어도 있다. 포스트먼은 그런 단어들로 이런 예를 든다. '자유' '진리' '지성' '사실' '지혜' '기억' '역사'.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기억'의 의미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 단어는 알다시피 영어로 '메모리'다. 우리는 메모리를 갖는 것이 인간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이제 익숙하다. 컴퓨터도 메모리를 갖는다. 그래서 영어사전에는 메모리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었다. 이 경우 한국인은 통상 '기억'이라는 말보다는 영어 '메모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기억'이라는 한국어의 기존 의미는 컴퓨터의 등장으로 영어보다 영향을 덜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어사전 역시 기억 항목에 컴퓨터와 관련된 새로운 의미를 이미 등록해 놓았다. 또한 우리는 '기억장치'라는 말을 이미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플라톤의 저서 『파이드로스』에서 인용된 테우트 신화에서 글자를 발명한 테우트는 글자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타무스는 글자를 부정적으로 보고 거부하는 모습

▲ 플라톤의 저서 『파이드로스』에서 인용된 테우트 신화에서 글자를 발명한 테우트는 글자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타무스는 글자를 부정적으로 보고 거부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문해력과 검색능력

 

한편으로 기억의 새로운 의미 등장은 기억이라는 말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는 글자의 발명과 관련하여 테우트와 타무스의 흥미로운 대화가 나온다. 글자의 발명자 테우트는 글자를 “기억의 약”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신중한 타무스는 생각이 달랐다. 타무스는 글자가 오히려 “기억에 대한 연습을 게을리 하게 함으로써 배운 사람들의 혼에 망각을 제공할 것”이라고 보았다. 타무스가 계속해서 말하기를, “기억이 아니라 기억 환기의 약을 그대가 발견한 것이오”라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 컴퓨터의 등장과 관련해서 타무스 같은 신중론자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사람들은 '기억장치'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아무런 저항감도 없다. 그러는 동안 기억의 의미는 부지불식간에 변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컴퓨터가 인간 같은 기억을 갖는 게 아니라 인간이 컴퓨터 같은 기억용량을 갖는다고 말하는 게 흔한 일이 되었다.

 

Google 인터넷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공적 기억의 발달은 분명 인간으로 하여금 개인의 유한한 인간 기억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준다. 오늘날 인터넷에는 개인의 한계로는 접근할 수 없었던 수많은 정보가 축적되어 있으며, 우리는 검색을 통해 그 엄청난 정보에 무한히 접근할 수 있다. 테우트의 말처럼 글자도 일종의 기억이라면, 이제 기억은 글자가 없을 때는 필요하지 않았던 새로운 능력, 즉 문해력(Literacy)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듯 기억장치도 기억이라면, 이제 기억은 검색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요구한다. 얼마 전 일본의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는 『약한 연결』에서 이 검색능력을 향상시킬 방법으로 세계여행을 제안한 바 있다. 또한 최근에 영어에서는 이 새로운 능력을 지칭하기 위해 'Search Literacy'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대화, 궁극적 승화

 

이제 기억장치에 의해 확장된 기억은 인류 기억의 보고다. 하지만 인류가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기억의 원천에 접근할 수 있는 지금,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그 기억의 원천은 정말로 인류 개개인의 것인가?

 

시어도어 젤딘과 그의 저서 『인생의 발견』

▲ 시어도어 젤딘과 그의 저서 『인생의 발견』

 

인류의 수많은 기억들이 난무하는 지금, 영국의 역사학자 시어도어 젤딘은 『인생의 발견』에서 인류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다. 그는 “우리가 기억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할 때, 그 기억들이 미래에 대한 취향을 변경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라고 말한다. 젤딘에 따르면, 미래를 새롭게 보려면 과거를 새롭게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기억 속에 자신의 기억만이 아니라 타인들의 기억을, 인류의 기억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물론 전통적인 문해력과 새로운 검색능력을 동원하여 타인들의 기억을 우리의 기억에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젤딘은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능력을 그런 이름들로 부르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오히려 “대화”라고 부른다. 물론 문해력의 발휘인 독서도 대화라면 대화다.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보자. 문해력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 검색능력은 공허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화의 능력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 문해력 역시 공허한 것 아닐까? 읽은 것이 대화의 주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게 다 인생에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노트북 그리고 스마트폰 사진

 

오늘날 우리는 어쩌면 두 가지 종류의 기억의 곤경에 직면하고 있다. 하나는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기억의 무한한 보고 앞에서 직면하는 무력감이다. 다른 하나는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인의 사적인 기억이 우리에게 가하는 전통적인 곤경이다. 이러한 기억의 곤경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제 진정 처음으로 대화의 방법을 발명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왠지 나는 “대화는 궁극적 승화다”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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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성민
이성민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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