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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대한 생각 : 태어날 자의 심정과 마을의 문제

이성민

2017-06-07

태어날 자의 심정과 마을의 문제


빌딩 사진

 

오래 전 일이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경험이 있다. 그날 나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다. 약속 장소는 평소에 내가 가지 않는 곳이었는데, 그곳에는 다른 상가건물들 사이에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거대하게 서 있었다. 나는 책가방을 멘 한 어린아이가 그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초고속 승강기를 타고 내려와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지금도 나는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자족적으로 보이는 거대한 초고층 건물 안에는 아이를 위한 무엇이 있을까?’ 내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 건물 바깥에 아이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있는 것이라곤 온통 상가건물뿐이었다. 아이를 위한 무엇이 없는 것일까? 아이에게는 분명 부모와 가족이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는 분명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니는 학교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언가가 결핍되었다는 나의 느낌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런 느낌은 서울 같은 대도시에 무언가 없다기보다 있다고 보는 관점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대학 시절 서울에 사는 나는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에게 63빌딩 구경을 시켜달라는 요청을 받고 함께 여의도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친구들은 분명 자기가 태어나서 자라난 시골 마을에는 없는 것이 서울에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시골 마을에서 서울로 수학여행 온 아이들도 바로 그렇게 느낄 테지만 말이다. 그 아이들은 시골 마을에는 없는 63빌딩도 구경하고, 안에 있는 수족관도 구경할 것이다. 서울에는 시골 마을에는 없는 거대하고 신기한 것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서울의 거대한 초고층 아파트 앞에서 내게 찾아온 정반대의 느낌, ‘있음’이 아닌 ‘없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곳에 무언가 없다고 할 때,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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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 이성민, 바다출판사 / 책표지 : 『내 이름은 공동체입니다』, 장성익 글 · 신병근 그림, 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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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것들의 철학』, 이성민, 바다출판사 / 『내 이름은 공동체입니다』, 장성익 글 · 신병근 그림, 풀빛

 

“한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이전에 나는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에서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이 마을을 ‘공동체’라고 불렀다. 공동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정의된다. 『내 이름은 공동체입니다』에서 장성익은 공동체가 갖추어야 하는 세 가지 차원을 명시하는 방식으로 개념을 정의하려고 한다. 그 세 가지란 물리적 공간, 사회적 상호작용, 유대감이다.

“공동체란 결국 ‘생활을 비롯해 공통의 활동이나 일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면서 유대감을 공유하는 집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는 ‘아이’를 간접적으로만 내포하고 있으며, 직접적으로 발견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저 ‘공통의 활동’에 육아와 교육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장성익이 예로 들고 있는 대표적인 공동체인 성미산 마을은 공동육아 협동조합 ‘우리 어린이집’에서 시작되었다. 공동체와 아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나는 이전에 아이들이 자라나는 세계를 ‘공동체’라고 불렀다. 따라서 나는 그 외연을 매우 축소시켰다. 장성익은 가정이나 학교만이 아니라 일터, 종교단체, 시민단체, 노동조합, 협동조합, 나아가 SNS, 동호회, 동문회, 향우회, 취미 모임, 스포츠클럽, 친목 모임, 계도 공동체에 포함시킨다. 하지만 나의 관점에 따르면 아이의 성장과 관련이 없는 단체들은 공동체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나에게 이론적 탈출구를 제공하는 것은 앞서 말한 아프리카 속담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이 필요하다.” 이 속담은 아이와 마을의 관계를 본질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예전에 ‘공동체’라고 불렀던 것을 이제 ‘마을’이라고 부르려 한다. 마을은 아이들이 자라나는 세계를 지칭하며, 따라서 아이들이 없는 곳은 정의상 마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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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층 아파트나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전통적인 마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르다. 아이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말이다. 반면에 전통적인 마을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시골 마을에는 이제 예전처럼 아이들이 많이 살지 않으며, 문을 닫는 학교가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도시와 시골의 어디에서도 좋았던 옛 시절의 마을을 찾기 힘들다. 물론 장성익이 소개하는 것처럼 다양한 실험적 마을들이 생겨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

 

마을이 사라지면서 생겨난 가장 결정적인 현상은 알다시피 인구의 감소, 즉 아이들의 감소다. 아이들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생태계가 마을이라고 했을 때, 즉 마을과 아이의 관계가 본질적인 관계라고 했을 때, 아이들의 감소는 마을의 소멸로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하지만 오늘날 아이들이 태어나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는 않는다. 물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아직 현존하지도 않는 아이가 자신의 탄생과 현존을 꺼린다는 말은 이상한 말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환경에서 누가 태어나고 싶겠어!”라는 말에 깊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태어날 자의 심정을 말하고 있는 이말은 적어도 우리가 이미 죽은 자의 심정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정도로 자연스럽다.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가 태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궁극적으로 ‘마을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마을의 문제란 마을 안에서 생겨나는 이런저런 크고 작은 문제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마을의 존립 그 자체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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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성민
이성민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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