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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 102주년 오늘, ‘나’에게 ‘이 나라’,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 이달의 질문 -

홍윤기

2021-04-06

인문쟁점은?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인문학적 과제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깊은 사색, 허심탄회한 대화 등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더 깊은 고민을 나누고자 만든 코너입니다. 매월 국내 인문 분야 전문가 두 사람이 우리들이 한번쯤 짚어봐야 할 만한 인문적인 질문(고민)을 던지고 여기에 진지한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몇 주민들이 보건소에 전화를 해서 무슨 일로 사람을 응급으로 이송했냐고 득달같이 물은 모양이다. 근데 보건소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싣고 간 사람이 코로나에 걸려서 그랬는지 아닌지를 줄줄이 물을 수 있단 말인가? 보건소 직원이 ‘나’와 일면식도 없는데……. 그리고 병에 걸린 사람을 왜 국가가 나서 일일이 찾아내어 어디 어디 갔냐고 캐묻고 그것도 모자라 어디 어디 가서 몇 주씩 격리해 있으라 하고, 심지어 먹여 주고 치료해 주는가? ‘병’은 ‘내’가 걸리고 앓는데, 왜 ‘국가’가 ‘나’의 일에 그렇게…….

 


태극기

태극기



내가 태어나기 전 나는 어떤 경우에도 내가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에 동의한 바가 없다. 심지어 나는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에도 동의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사람으로 태어나 보니 나는 누구누구의 자식이 되어 있었고, 한국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부하러 독일에 갔더니 나는 ‘홍윤기’이기 이전에 “한국 사람(Koreaner)”이었다.


이렇게 내가 그렇게 태어나기 전에 단 한 번도 누구의 자식이기로, 어느 나라 사람이기로 동의한 바가 없는데, 그 누구의 자식으로 또 한국 사람으로 끊임없이 무엇인가 되기를 요구받고,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한 번도 직접 만난 적도 없는)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사람의 명령으로 수감당하기도 하였다. 대통령이라는 저 사람이 무엇인데, 한 번도 얼굴 마주친 적이 없는 ‘나’를 끌어다 2년이나 넘게 가두다가 4년 넘게 학교도 못 다니게 하는가? 내가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겠다고 동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멋대로 만든 헌법으로 나를 데려다가 학교도 못 다니게 해?


이런 일은 44년 전 ‘나’, ‘홍윤기’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 그런 시기가 끝나고 난 1987년에서 한 세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또 당혹스럽게, 하지만 이번에는 거꾸로, ‘나’에게 다가온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마다 ‘나’를 잘 살게 해주겠다고 사방에 대고 목청을 높인다. 지금 대통령의 앞에 앞에 대통령이 된 사람은 전 국민더러 “부자 되세요!”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부풀렸다. 물론 그는, 자기가 부자 되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 남을 부자로 만드는 재주는 없다는, 씁쓰레한 실망을 안겼지만, 사실 되돌아 생각해 보라. 그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데, 그런 수많은 ‘나’들에게 부자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할 이유가 없잖은가? 그런데 그가 약속을 어겼다고 실망한다면 그렇게 실망하는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볼 일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부자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면, 사실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 아닌가?


그 사람 다음 대한민국 역사 1백 년에서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된 분은 후보 시절 스스로 4대 중증 질병(암, 심장, 뇌혈관, 희귀난치성 질환)에 대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를 포함해 선택 진료비, 상급 병실료는 물론 간병료까지 이른바 “3대 비급여” 부분 등 총 진료비 모두를 건강보험으로 국가가 100% 책임지겠다고 수차례 단언했고 대선 당시 후보 캠프가 낸 공식 공약집에도 명시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당시 이 분야 주무장관은 대통령의 이런 공약이 선거 캠페인용이었다는 발언을 내놓아 물의를 빚었는데 여론이 악화되자, 보건복지부는 개선안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필자 주 : 홍여진 기자. 「박근혜 대선공약 후퇴, 폐기 잇달아 신뢰와 원칙 어디갔나?」;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 (2013.03.22 12:55.)) 결국 박 대통령 재임 내내 구체적인 안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벌떼처럼 나서서, 도대체 대통령 후보가 약속한 신뢰와 원칙은 어디 갔냐고 항의하는 등 난리였다.


그런데 돌이켜 잘 생각해 보자! 그 대통령이 누구인데 왜 그 사람이 ‘내’가 걸린 ‘병’의 치료비를 몽땅 내주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돈이 많아? 사실 그 사람이 ‘나’에게 그런 약속을 할 이유가 없잖은가?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실제로 정부의 이름으로 해내려고 바쁜 사람이 요즘은 한두 명이 아니다. 작년 연말 동네 아파트 같은 동(棟)에 사는 노인네 한 분이 한밤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앰뷸런스에 실려 가면서 드디어 우리 동에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난리 난 적이 있었다. 마침 휴일이라 관리 사무소는 문을 닫고 있는데 몇몇 주민들이 보건소에 전화를 해서 무슨 일로 사람을 응급으로 이송했냐고 득달같이 물은 모양이다. 근데 보건소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싣고 간 사람이 코로나에 걸려서 그랬는지 아닌지를 줄줄이 물을 수 있단 말인가? 보건소 직원이 ‘나’와 일면식도 없는데……. 그리고 병에 걸린 사람을 왜 국가가 나서 일일이 찾아내어 어디 어디 갔냐고 캐묻고 그것도 모자라 어디 어디 가서 몇 주씩 격리해 있으라 하고, 심지어 먹여 주고 치료해 주는가? ‘병’은 ‘내’가 걸리고 앓는데, 왜 ‘국가’가 ‘나’의 일에 그렇게 관심과 참견이 심한가?



덕수궁 앞에서 벌어진 3.1운동 시위

덕수궁 앞에서 벌어진 3.1운동 시위



오늘, 2021년 3월 1일, 빗줄기가 뿌리는데 천막 친 탑골 공원에서는 3·1 독립 선언 10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 선열들 몇 분에게 뒤늦은 서훈이 있었다. 빗줄기 소리가 어려 흔들리는 대통령의 목소리는, 어쩌다가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될지도 모를 나라 하나 세우려고 목숨까지 버리고 그 후손은 대대로 고생스러운 세월을 살게 만들었던 그분들의 위업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나’는 묻는다. 태어나기 전 한 번도 대한민국 국민이기를 동의한 적이 없는데도…… 라는 의문을 여전히 지니면서…….



[이달의 질문] “저분들은 왜 나라 하나 세우려고 그렇게 목숨까지 내놓았을까?”  / 질문자 - 홍윤기(동국대 철학과 교수)

 

Q.  “저분들은 왜 나라 하나 세우려고 그렇게 목숨까지 내놓았을까?”

“저분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그리고 “왜 ‘나’는 그런 ‘대한민국’의 ‘국민’, 즉 ‘국가 시민’으로, 계속 살아야 할까?”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김용택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 이사장),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교수) 이 두 선생님에게 어리석은 물음에 대한 지혜로운 응답을 구합니다.

 


4월 [이달의 질문] 3·1혁명 102주년 오늘, ‘나’에게 ‘이 나라’,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⑮

3월 [이달의 답변] 설사 시간의 흐름이 환상일지라도 ⑭

3월 [이달의 질문] 계절에 시작과 끝이 있을까요? 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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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
홍윤기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부 및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후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박사 취득. 1999년 이래 동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사회와철학연구회 및 ’한국철학교육학회‘ 회장, ’한국철학회‘ 연구위원장, 서울시/경기도/성남시 민주시민교육자문위원회 위원장 및 파주시 민주시민교육센터 학술자문지원단장 역임. 철학, 인문학, 사회과학 및 학문정책 관련 다수의 저서(공저 포함), 역서, 논문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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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021-06-12

2017년 초, 박근혜 게이트를 규탄하는 집회가 한창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저 역시 집회에 참석해 같은 구호를 외쳤지만, 마음 한 켠이 편치 않았습니다. “맞아, 이런 비정상적인 사태는 나라가 아니야.”라는 생각과 “사실 이 비정상이 국가 개념의 본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동시에 공존했던 것입니다. /// 후자의 생각은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 국가를 지배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기구로 바라본 맑스주의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반대로 전자는 개인이 사회를 구성하기에 앞서 사회가 사회적 개인을 생산한다는 믿음, 타자와의 공존을 보장할 정당한 법체계의 필요성 등에서 연원한 것이었습니다. /// 저는 그때의 혼란이, 제가 국가 개념을 모호하게 인식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국가는 ‘① 구성원들에게 강제력을 가지는 공동체의 최상위 심급’으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② 민족/언어/역사를 공유하는 배타적 공동체(또는 그 질서)’로서 존재하기도 합니다. ①의 의미에서의 국가는 ‘공동체’ 개념이 존재하는 한 소멸할 수 없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입니다. 반면 ②의 의미에서 국가, 곧 ‘대의민주주의 국민국가 모델’은 언젠가 지양될 수 있는, ①국가가 지금-여기서 자신을 드러내는 구체적 양태입니다. ②의 모델이 현 세계에서 실제로 공동체의 ‘최상위 심급’을 담당하기에 국가에는 두 의미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의미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합니다. /// 개념의 혼용은 부작용을 낳습니다. 어떤 이들은 단지 일시적 상태일 뿐인 ②국가를 ①국가의 유일하게 가능한 상태로 바라보며, 배타적 민족주의와 자국 이기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합니다. 반면 다른 이들은 ②국가에 대한 비판을 ①국가에 대한 비판으로 인식하고 대안 없는 반-공동체주의를 채택합니다. 혹은 2017년의 저처럼, 개념의 양의성을 정확히 해명하지 않은 채 ‘불편한 채로 놔두기’도 합니다. 셋 모두 일종의 ‘범주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 이 모든 생각을 정리한 후 비로소 “이게 나라냐?”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루소가 『불평등 기원론』에서 그린 고립된 자유인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어쨌든 지금의 우리는 타인과 관계 맺고 사는 사회인입니다. “나라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②국가의 진정한 본모습을 밝혀내고 그것을 지양하기에는 아직 배움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때의 외침이 “적어도 이런 공동체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는 일종의 절규였다는 것입니다. /// 6월 항쟁 34주년이 이틀 지난 오늘, 국가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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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2021-06-12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산업공학과 학생 채진수입니다. 오래전에 접한 문구라 그 출처가 어디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만, 아마 홍세화님의 <생각의 좌표> 라는 책에 나온 문구였던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의 의의는 선한 사람을 뽑아 선한 정치를 시키는 데에 있지 않고, 오히려 악한 사람이 뽑혀 악한 정치를 하더라도 언제든지 끌어내릴 수 있음에 있다.' 제가 해석하기로는, 어쩌다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을 때에 언제든지 바로잡을 수 있음이 민주주의의 의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이 문구가 내포하는 내용이 그저 '만연하게 퍼져있는 진부한 아는 척' 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서도, 저는 이것이 모든 사회적인 장치, 제도, 단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 글 앞부분에서 툭 던지신,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마다 ‘나’를 잘 살게 해주겠다고 사방에 대고 목청을 높인다.'는 사례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회에 대한 본질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진정 염두 해야 할 것은 최악의 방지임에도 불구하고, 최선에 포커싱을 했기 때문입니다. 교수님께서 쟁점으로 던지신 질문들을 살펴보면 더욱 확실해지는 듯 합니다.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 무언가가 상실된 상황에서는 이미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있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최악의 상황일테고, 또한 최악의 상황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 빠져있으면서도 동시에 깨어있을 수 있을 만큼 윤리적 우월성을 지닌 자들은 그들이 처한 모든 최악의 상황이 결국 본인이 몸담은 사회가 본질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사회집단, 바로 국가를 위해 그렇게 투쟁한 것입니다. ///// 국가에 관련한 생각은 평소에 깊게 해본 적이 없어 너무 부족한 접근인 것 같습니다. 헤헤 ////// 한 학기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번 학기에 교수님 수업을 들을 때는 교수님께서 지니고 계신 열정을 많이 배웠습니다. 제 역량이 부족하여 철학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학기는 시작 전에 스스로에게 '이번에는 열정 말고 철학을 쫌 배워보자!'라고 다짐을 했었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 항상 좋은 수업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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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2021-06-14

1. 우선 '나'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홍윤기 교수님이 질문에서 언급하신 것과 같이 나는 이 국가에 소속되기를 결코 동의한 적이 없다. 내가 이 국가에서 태어난 후에 나는 비가역적으로 국가에 소속된다. 국가에 소속된 이상 의지와 상관없이 국민들은 이 국가의 (특정 나라 고유의) 통제,보호를 받게 되거나, 의무를 지거나 권리를 얻는다. 한편, 윤평중 교수님의 답변에서 본 바, 사회 계약론 이후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권리와 의무를 상호 교환하는 계약 관계" 로 전환되었다. 내가 국가에 의해 불이익을 당할 수 있지만, 그것은 나의 의무이거나 의무를 위반한 경우일 것이다. 나는 분명 그러한 의무들을 통해 이익을 얻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나는 납세의 의무로 유지되는 사회, 국가 속에서 자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거의 없이 안전하게 살아간다. 국가가 없었다면 나는 자연에서의 위험에 노출된 채로 원시적으로 살았을 것이다. 나에게 국가는 "어쩔 수 없이 속하게 되었지만, 그렇게 되어서 다소 불편하면서도 안전하고 편리한 거대 공동체"이다. 2. '저분들'은 왜 나라 하나 세우려고 그렇게 목숨까지 내놓았을까? 나를 포함해서 내가 소속된 국가의 사람들은 그 국가의 고유의 분위기나 전통, 교육방식에 따라 의식(consciousness)이 성장한다. 그리고 그 공동체 내에서는 비슷한 의식들을 기반으로 유대감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러한 유대감이 형성되고 나면, 유대감을 형성하게 해준 그러한 의식들을 귀중하게 여긴다. 그렇게 그것들을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들로 민족과 그 정체성이 탄생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무단 통치, 문화 통치, 민족 말살통치를 통해 우리 민족과 그 정체성을 훼손시켰다. '저분들'은 아마, 추정컨대, 그러한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민족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을 한 곳으로 모아주는 민족의 유대감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까지 바처가면서 투쟁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3. '나'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왜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국가 시민)으로 계속 살아야 할까?) 저는 앞선 1,2의 질문을 토대로 이에 답합니다. 대한민국은 때로는 나에게 의무를 부여하거나 통제를 가해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나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거나 내가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나는 그러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단순하게 의무의 이행과 권리의 보장으로만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존재하여 유대감, 소속감 등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내가 한국에서 계속 살아간다면 오로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저는 이 질문을 보기 전까지는 국가의 통제나 폭력, 그리고 국가가 우리에게 의무를 부담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이제는 사회 유지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연히 정의롭지 않은 폭력,의무,통제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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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2021-06-15

‘5인 이상 집합 금지’ 조치가 지난 12월 처음 시작되었을 때, 나는 사실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내가 타인과 만날 자유, 소통할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민 정신에 기대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것은 좋지만, 다중 모임을 하면 벌금 처벌을 내릴 것이라는 식의 조치는 다소 과한 것 아닌가 생각했다. 아무리 팬데믹의 예외 상황이라고는 하나, 예외란 만들기 나름 아닌가. 이처럼 국민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를 빼앗는 것이 ‘예외’라는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여겨지도록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바로 국가가 나의 자유를 빼앗을 권리가 있는가 하는 논의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빽빽한 도심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개개의 자유를 전적으로 누릴 수 없고, 각 개인의 자유를 종합해 그 중심점, 타협점을 찾아야만 한다. 타인의 속에 섞여 살아가고자 하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자유의 제약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 자유가 마뜩잖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제약을 뿌리치고 산에 들어가서 홀로 살아가면 될 일이다. 이렇게 할 자유도 우리에게는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택하지 않았고, 타인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했다. 인간은 모두 자유를 추구할 권리를 지니는데, 이 권리에는 하나의 단서가 붙는다. 바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국가에 나의 자유를 요구할 수 있는데, 최대한 많은 국민의 자유를 고취할 수 있도록 국가는 자유의 타협점을 찾는다. 이러한 쟁점을 바탕으로 주어진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저분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는가? 왜 나라 하나 세우자고 그렇게 목숨까지 내놓았을까? 지금의 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형의 그 ‘무언가’, 심금을 울리는 ‘정신’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자유를 추구할 권리를 빼앗겼기에 목숨까지 내놓은 투쟁을 한 것이다. 자유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고, 빼앗겨서는 안 되는 천부인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그런 ‘대한민국’의 ‘국민’, 즉 ‘국가 시민’으로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는 자유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자유를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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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2021-06-20

국가는 무엇인가? 나는 왜 태어나자 마자 아무런 동의 없이 이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야하는가? 국가는 우리에게 왜 이렇게 간섭하고 무언가를 제한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고 답을 내기에는 나는 아직 부족하고 지식이 많지도 않다. 그래서 나는 몇몇 사상가들의 주장에서 도움을 받으려고 하였다. 사회계약설에 대해 말한 사상가들이다. 많은 사상가들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아는 사회계약설과 관련된 사상가는 약 3명 정도가 있다. 바로 홉스, 로크, 루소이다. 3명의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지만 내가 가장 동의하는 주장을 한 사상가는 홉스이다. 그는 자연상태를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말한다. 이런 자연상태를 위해 국가가 생겨 났고 국가에게 리바이어던, 즉 절대권력에 모든 권한을 위임하면서 국민들은 자기보존과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국민들이 그렇게 불만을 갖는 국가의 역할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전염병이 창궐 할 것 이다. 국가의 역할이 단 하루만 없어져도 아마 이 사회는 망가지고 무너지고, 즉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홉스의 주장을 설명하느라 말이 길어졌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국가란 국민들의 안전한 삶, 그리고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물론 홉스에 따르면 국가의 능력이 상실될시 그 권위 또한 상실 된다고 말한다. 국민은 국가 없이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두 존재는 서로가 필요한 존재이다. 독립운동가분들이 고작 나라 하나 세우고 되찾으려고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다. 그분들이 되찾으려던 나라는 우리 국민들이 비로소 존재하게 해주고 지켜주고 위해주는 주체이다. 독립운동가분들은 그러한 나라의 역할과 진짜 의미를 깨달으신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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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2021-06-24

국가 혹은 나라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일단 ‘국가’의 사전적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네이버 사전에 의하면 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의 삼요소가 필요로 한다. 하지만 국가에 대해 말할때 영토와 정치제도, 구성원들로 이루어져있다고만 말하기에는, 완결성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구성원들간의 공유하는 하나의 정체성 및 근간이 더해져야 국가 정의에 대한 부족함이 채워진다고 생각한다. 각 국가마다가 오랜 역사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뤄진 근본 정신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조선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담은 ‘유교’이고, 프랑스의 경우는 혁명에 의해 쟁취한 ‘자유’가 그 예이다. 각 나라마다 지닌 각각의 근본을 품고 움직이는 국가의 개인은, 모이고 흩어짐의 상황에서 국민간의 일종의 통일성과 일치성을 느낄 수 있으며 이는 유대감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본인의 목숨을 걸고 앞장서 나아가 행동한 선열들은 국가는 영토를 되찾으려는 것 뿐만아니라 본인의 주변과 다수에게 있는 집단의 정체성을 소중히 여겨, 이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국가 시민’으로 살아야 할까? 나의 입장은 롤스가 주장하는 평등한 자유주의와 유사하다. 그는 인간의 기본권과 자유를 최우선으로 삼는 철학을 논하며 국가나 사회 공동체는 개인의 재산과 자유,권리를 보호해야함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국가와 국민간에 상호교환관계가 성립된다. 나는 국가에 소속됨으로써 나에게 발생할 수 있는 안좋은 경우에 대비하여 국가에게 일정한 권리를 양보하고, 국가는 나의 기본권을 보호해준다. 결국 믿음이라는 단단한 기반 위에 쌓아진 교환관계로, 나는 국가시민임을 자처한다.

윤** 사진 이미지

윤**

2021-06-24

국가와 나의 관계를 사유하기 전에 먼저 ‘이 나라’ ‘대한민국’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수만년의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형태의 국가가 있어 왔다. 하지만 지금 지구상에 있는 거의 모든 국가는 국민국가이면서 민주주의를 그 정치체제로 갖는다. 대한민국은 그러한 국가들 중 하나다. 인간에게 어떠한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끊임없이 다른 집단을 규정하고 그와 구별되는 나의 집단을 정의해 왔다. 하지만 수많은 형태의 국가를 만들어 오면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다르게 정의해왔기 때문에 대한민국과 나의 관계는 지금 대한민국이 어떤 국가인지에 따라서 다르게 사유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는 법 아래 국민을 복종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일한 권력이 마음대로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권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모든 권력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서 행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법치주의는 나의 행위를 제한하여 타인의 자유를 보호한다. 즉, 법은 모두의 욕망을 차별없이 발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제한은 평등을 추구할 때만 가능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 권력의 분리 및 견제는 하나의 거대권력의 집권을 막고 그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데 의의가 있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체제는 모든 시민의 욕망이 발현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이는 과거 단일한 권력의 욕망에 따라서 국가와 국민의 운명이 좌우되며 발생한 수만은 고통에서 나온 하나의 대안이며, 선열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얻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에서는 국가의 운명은 시민이 어떤 욕망을 갖는지에 달렸다. 민주주의는 그에 따라 나치즘을 만들어 괴물이 될 수도 있고,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 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운명은 나의 욕망의 실천에 달렸고, 나는 ‘이 나라’의 보호 속에서 나의 욕망을 실천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치적인 실천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정** 사진 이미지

정**

2021-06-24

어떤 것이 나에게 ‘무엇’이라는 것은 일단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에게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그 무엇이 나에게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 또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실재하는 물체는 우리가 감각으로 접할 수 있으므로 ‘무엇’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이 존재하므로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이러한 질문이 더욱더 의미를 가지기가 힘들 것이다. ‘국가’라는 개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가 만약 지금부터 ‘대한민국’이 제시하는 여러 법과 토지제도 등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 모든 것을 무시하고 소속감 없이 산다면 나에게 ‘대한민국’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글자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대한민국’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대한민국’을 의미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에게 ‘대한민국’을 의미있게 하는가? 3.1 혁명 때와 비교 했을 때 국가의 주권이 뚜렷한 현재, 나에게 가장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국가의 기능적인 면이다. 범죄자로부터 개인을 지키기 위한 법, 국민이 최소한의 생활을 누리게 하기 위한 복지 정책 등, 나에게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기능적인 면은 현 상황에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대한민국’의 의미의 전부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3.1운동 당시 일제의 침략을 받았던 우리나라는 당연히 앞서 설명한 기능적인 면에서 우리보다 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 등의 여러 독립운동을 통해 ‘우리나라’라는 단어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에는 기능적인 면 외의 이런 소속감을 느끼기 어렵지만, 스포츠 경기의 국가 대항전 등 간접적으로 느끼게 되는 때가 가끔 있다. 이처럼 기능적인 면 외에도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소속감 또한 나에게 ‘대한민국’을 의미있게 하는 것 중 하나라고 본다. 이러한 두 요소가 ‘대한민국’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하고, 또한 나에게 ‘대한민국’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준다. 두 요소는 모두 필수적인 것으로, 하나만 없어도 ‘대한민국’은 나에게 의미를 잃을 것이다. 애초에 소속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나에게 의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이 나에게 별 이유 없이 형편없는 기능(형편없는 복지, 불공정한 법 등)을 제공한다면 나는 국적을 포기하는 것을 선택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나에게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대한민국’은 ‘기능적 요소’와 소속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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