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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전투, 영화와 역사 사이

-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빛나는 업적은 맞으나 냉엄한 국제정세를 뒤집지는 못한

기경량

2020-09-25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은?

 

 

태종은 안시성 전투 이후 약 3년 반 정도 뒤인 649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영화 <안시성>에서는 영화 막바지에 나레이션과 자막을 통해 “자기의 나라로 쫓겨간 지 3년 후 당황제 이세민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숨졌다. 그는 유언으로 다시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며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영화를 관람하는 한국인들의 자부심을 한껏 자극하는 문구이다. 하지만 이 역시 실상과는 매우......



540만 관객을 끌어들인 블록버스터 영화 ‘안시성’



안시성 신화로 기억될 위대한 승리 THE GREAT BATTLE 9월 19일 대개봉

▲ 영화 안시성 포스터(이미지 출처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2018년에 영화 <안시성>이 개봉하였다. <안시성>의 총 제작비는 200억 원을 상회하는 규모로 알려졌는데, 영화진흥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2018년 제작된 한국 상업영화의 평균 총 제작비는 그 절반인 102.5억 원이었다. 동 보고서에 따르면 그해에 제작된 영화 40편 중 제작비가 150억 원 이상이었던 작품은 4편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안시성」은 한국 영화판에서 ‘블록버스터’ 급에 해당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고 이해된다.


<안시성>이 대규모 투자를 받을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소재에 대한 기대감 역시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안시성 전투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상의 대승리이다. 이를 장대하면서도 화려한 영상으로 재현한다면 관객들의 관심을 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법하다. 2014년에 개봉하여 관객 수 1,700만 명을 넘기며 대성공을 거둔 영화 「명량」의 사례가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안시성>은 최종적으로 540만 명 가량의 관객 수를 동원하며, 기대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는 성적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해외 판매와 2차 판권 등을 감안하면 손익분기점을 넘는 데는 성공하였다고 한다.


<안시성>은 영화의 상업적 성과와 별개로 갑옷의 형태 등 고증 면에서 지적을 많이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고증에 대한 논란은 역사를 소재로 한 콘텐츠에서 항상 발생하는 일이며, 어떤 이들은 고증에 문제가 있는 작품에 대해 ‘역사 왜곡’이라며 강한 톤으로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필자의 경우 ‘역사는 역사이고, 창작물은 창작물’이라는 입장이다. 창작물의 고유 영역을 인정해 줄 필요가 있으며, 작품을 평가할 때 고증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사람들이 ‘역사 재현물’을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신뢰할 정보로 수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 그리고 많은 ‘역사 재현물’이 역사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나 존중 없이 마치 레토르트 음식 조리하듯 얄팍한 소재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영화 <안시성>에서 연출된 몇몇 장면들을 선별해 실제 역사에서의 안시성 전투와 비교해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에서의 묘사와 실제 역사가 어떻게 다른 지를 되짚어 보며 음미하는 것은 역사 콘텐츠를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다.



영화 속 안시성vs 실제 안시성



요하 신성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비사성 국내성 오골성 압록강 평양성

▲ 안시성을 비롯한 고구려의 주요 성들(이미지 출처 : 기경량)



고구려 당시의 안시성이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많은 학자들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지목하는 곳이 중국 요녕성 하이청시(海城市)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잉청쯔 산성(英城子山城)이다. 잉청쯔 산성은 산능선을 따라 조성된 둘레 약 4km의 성이다. 성벽 대부분은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이며, 부분적으로 흙과 돌을 섞어 성벽을 만들었다고 한다. 위성사진을 이용해 그 형태를 살펴보면 말굽 모양, 혹은 키 모양과 흡사하다.


잉청쯔 산성의 모습을 보면 그 대단한 당태종의 군대를 막아낸 곳이라 하기에는 성의 규모가 큰 편이 아니고, 지세도 험준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 성을 안시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보는 이유는 입지 때문이다. 요동성이나 백암성처럼 위치가 명확하게 확인된 다른 고구려 성들과의 상대적 위치와 전쟁 당시 당나라군의 이동 루트 등을 감안했을 때 이곳이야말로 안시성의 후보지로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안시성안시성으로 추정되는 잉청쯔 산성 위성사진(이미지 출처 : 구글 어스)

▲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잉청쯔 산성 위성사진(이미지 출처 : 구글 어스)



잉청쯔 산성의 모습은 영화상에서 묘사된 안시성 모습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 감독이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영화 제작진은 잉청쯔 산성을 사전 답사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잉청쯔 산성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외양에 다소 실망을 한 것 같다. 그 결과 영화에서의 안시성은 잉청쯔 산성을 모델로 하되, 뒤쪽 산 능선에 험준한 돌산을 추가해 훨씬 웅장해 보이는 외양으로 변형되어 묘사되었다.



<안시성>의 주인공 양만춘은 실존 인물이었나



영화에서 주인공인 안시성주 ‘양만춘’은 인기 배우 조인성이 연기하였다. 그런데 널리 알려진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당대 기록에서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단지 ‘안시성주’라고만 되어 있을 뿐이다. 때문에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도 “호걸이며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고 평가하면서도 그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 것이 “매우 애석하다”고 아쉬워했던 것이다.



안시성 영화속 조인성 배우가 연기한 양만춘의 모습

▲ 안시성 영화속 조인성 배우가 연기한 양만춘의 모습(이미지 출처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16세기 중국 명대(明代)의 소설인 『당서연의(唐書演義)』에 처음 등장한다. 이것이 임진왜란 후 조선인들에게 알려지며, 비로소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그 유명세를 타고 우리나라 해군에서는 1998년에 건조된 한국형 구축함에 ‘양만춘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양만춘’이라는 이름의 출처가 소설인 이상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서연의』는 당태종(당나라의 두 번째 황제. 재위기간 626-649) 이세민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양만춘이 고구려 초에나 존재하였던 절노부(絶奴部)1) 소속의 장수로 묘사되는 등 고대의 역사 복원을 위한 자료로서의 가치는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양만춘의 동생으로 등장하는 백하를 비롯해 태학2)을 다니던 사물, 부관 추수지, 기마부대장 파소, 부월수장 활보, 환도수장 풍 등도 모두 시나리오 작가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다. 다만 스토리 상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신녀(神女)의 경우 실제 모델이 있다.

1) 고구려 초기의 정치체인 5부 중 하나.

2) 고구려 시대 국립교육기관.


당태종이 전쟁을 일으킬 당시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로 설정했던 곳은 사실 안시성이 아니었다. 바로 요동성이었다. 요동성은 지금의 랴오양시(遼陽市)에 있었던 성이다. 많은 고구려성이 산성인 것과 달리 평지에 돌을 이용해 쌓은 평지성이다. 과거 수양제(수나라의 제2대 황제. 재위기간 604-618)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그의 100만 대군을 막아내며 발을 묶었던 요동의 거성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요동성에는 사당이 있었다. 이 사당에서 고구려의 시조신 주몽을 모셨는데, 요동성이 중국 5호 16국 중 하나였던 전연(前燕, 337~370)에 속해 있던 시절 하늘에서 내려주었다고 전하는 갑옷과 창이 신물(神物)로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645년 당나라 대군이 몰려와 요동성을 공격하자, 고구려인들은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을 여신처럼 단장시켜 주몽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때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시니 성은 분명 안전할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 하지만 무당의 말과 달리 요동성은 당나라 군대의 집요한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영화 <안시성>에 등장하는 신녀와 그가 들고 다니는 ‘주몽의 활’은 아마도 요동성의 주몽 사당과 무당, 그리고 그곳에 모셔져 있었던 신물 전승 등에 관한 이야기를 적당히 다듬고 살을 붙여 만든 설정으로 보인다. 요동성의 무당이 안시성을 찾아왔다거나 하는 역사 기록은 전혀 없으므로, 이 역시 영화적 상상의 산물이다.



실제와 달랐던 안시성 전투 묘사



당태종은 중국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군사적 역량이 뛰어난 군주였다. 그가 수나라 말 군웅들이 각지에서 난립하였던 혼란기에 보인 무위와 군공은 눈이 부실 정도이다. 당태종이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원정을 결심한 데는 이러한 경험에 근거한 자신감과 수양제가 국력을 총동원했음에도 이루지 못한 일을 자기 손으로 성공시켜 만천하에 과시하고픈 싶은 호승심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당태종은 수양제가 그토록 애를 먹었던 요동성을 비교적 수월하게 함락하였고, 백암성과 개모성, 비사성 등을 차례차례 함락하는 등 전쟁 초기에 상당한 성과를 얻어냈다. 그리고 평양으로 향하는 길을 열기 위하여 문제의 안시성 앞에 이르렀다.


영화 <안시성>에서는 시작과 함께 고구려와 당나라의 대규모 전투 장면을 보여 준다. 영화상 고구려군 15만 명과 당나라군 ‘20만 명’3)이 충돌하였다고 하는 주필산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하게 된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 다만 몇 가지 묘사와 설정은 실제와 어긋나 있다.

3) 645년 고구려·당나라 전쟁에서 동원된 당나라군대 규모에 대해서는 10만~100만까지 다양한 이견이 있다.


우선 주필산 전투를 이끌었던 고구려군의 지휘관은 연개소문이 아니었다. 당시 연개소문은 국가 최고 권력자로서 왕도인 평양에서 전체 전쟁을 지휘하였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지휘하였던 장수는 북부 욕살4)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라는 인물이었다. 또 영화에서는 양만춘이 주필산 전투에 참전하라는 연개소문의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주필산 전투에서 소중한 벗을 잃은 태학의 리더 사물이 양만춘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 계기로 상정되기도 한다.

4) 고구려 시대 지방관직중 하나. 


하지만 주필산 전투는 위기에 처한 안시성을 지키려고 고구려 중앙에서 파견된 구원병이 당나라군과 벌인 싸움이었다. 고연수가 이끌던 고구려군 15만 명은 안시성 동쪽 40리 지점에 이르렀는데, 당태종은 안시성에서 8리 가량 떨어진 주필산 부근까지 고구려군을 유인하여 전투를 벌였다. 당나라 때의 8리를 지금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4.3km 가량. 걸어도 한 시간 정도면 이동할 수 있는 거리니, 전투가 벌어진 곳이 사실상 안시성 코앞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주필산 전투와 안시성 전투를 매우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각각 발생한 별개의 사건인 양 그려낸 영화상의 묘사는 사실과 크게 다르다. 주필산 전투가 벌어질 당시 안시성 앞에는 이미 당나라 대군이 주둔한 상태였고, 안시성 병력은 당연히 주필산 전투에도 참전할 수 없었다.



영화 안시성 촬영현장

▲ 영화 안시성 촬영현장(이미지 출처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안시성 전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역시 토산(土山)을 매개로 한 공방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당나라군은 성을 공격하려고 다양한 병기를 사용했다. 먼 거리에서 돌을 날리는 포차(抛車)와 성벽이나 성문에 접근해 직접 충격을 주는 당차(撞車)가 대표적이다. 요동성 전투 때도 포차와 당차는 큰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군은 안시성 전투에서도 어김없이 이를 활용하였다. 하지만 요동성 때와 달리 안시성 수비군이 성벽이 무너진 자리에 곧바로 목책을 세우는 등 기민하게 대응을 하는 바람에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이러한 차이는 요동성이 평지에 세운 석성인 데 반해, 안시성은 산성인 데다 성벽 또한 주로 흙으로 쌓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에 당나라군이 고안해 낸 공격 방식이 성벽에 붙어 토산을 쌓는 것이었다.



‘양만춘의 화살에 당태종이 실명’은 야사



영화에서는 당나라군이 압도적인 병력을 활용해 ‘산을 만들어내는’ 비현실적인 모습에 안시성 측에서 기가 막혀 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군은 나무를 엮고 흙을 쌓아 토산을 만들었는데, 『신당서』5)에서는 토산을 ‘거인(距闉)’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거인’이란 공격하는 측이 성을 내려다보면서 성 내부의 허실을 관찰하고 공격을 가하기 위해 만드는 시설로서, 사실 『손자병법』에도 나올 만큼 그 연원이 오래된 성을 공격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5) 중국 송나라때 편찬한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책록.


그러나 당나라군이 두 달 동안 공을 들여 쌓아 올린 토산은 뜻하지 않게 무너져 버렸다. 영화에서는 안시성 수비군이 토산 밑으로 땅굴을 판 다음 지탱하는 나무를 불태워 무너뜨린 것으로 묘사했지만, 이는 극적인 상황을 부여하기 위한 상상의 산물이다. 실제로는 우연히 발생한 사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을 공격하기 위해 애써 만든 토산이 무너져 버리고, 급기야 이를 고구려군에 빼앗기는 추태가 연출되면서 당나라군의 전의가 크게 꺾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당나라군이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도한 모든 수단이 실패로 돌아간 가운데, 싸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안시성에 두 달여간 발이 묶인 사이 매서운 요동의 겨울이 다가온 것이다. 645년 9월 당태종은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퇴군을 명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는 이때 양만춘이 쏜 화살이 당태종의 한쪽 눈을 꿰뚫은 것으로 묘사했으나 이는 검증되지 않은 야사를 빌려 쓴 것일 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귀환하는 길에도 자신의 부재를 틈타 침입한 유목 세력인 설연타(薛延陀)를 정벌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하였으니까 말이다.



‘고구려 공격 말라’ 당태종 유언, 실제 뜻은?



논하여 말하다 당태종은 총명하고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기 드문 임금이다. 난을 평정함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 비할 만하고, 다스리는 것은 성왕(成王)·강왕(康王)에 가깝다. 병력을 운용함에 이르러서는 기묘한 계책을 냄이 끝이 없고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동방을 정벌하는 일에서는 안시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가히 호걸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 그 성명이 전하지 않으니 양자(楊子)가 말하기를 “제(薺)와 노(魯)의 대신에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매우 애석하다고 할 것이다.

▲ 삼국사기에 기록된 당태종과 양만춘에 관한 기록(내용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당태종은 안시성 전투 이후 약 3년 반 정도 뒤인 649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영화 <안시성>에서는 안시성 출신 태학도 사물의 내레이션과 자막을 통해 “자기의 나라로 쫓겨간 지 3년 후 당황제 이세민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숨졌다. 그는 유언으로 다시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고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영화를 관람한 한국인들의 자부심을 한껏 자극하는 문구이다. 하지만 이 역시 실상과는 매우 다르다. 


앞서 언급하였듯 당태종은 안시성 전투에서 화살에 눈을 잃지 않았고, 당연히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지도 않았다. 당태종은 실패에 위축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위대한 경력에 유일한 오점이 되고 만 패배에 분개했고 이를 설욕하고자 하였다. 당태종은 사망하기 불과 1년 전인 648년에도 3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고구려 재침공을 기획하였다. 전투선을 건조하고 군량을 준비하는 등 전쟁 준비도 시켜 놓았다. ‘고구려를 쳐들어가지 말라’는 당태종의 유언은 자신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천수를 다해 죽게 되었으니, 그동안 진행하고 있던 고구려 원정 준비를 그만 취소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에서처럼 ‘고구려는 너무 강한 나라이니 다시는 공격할 꿈조차 꾸지 말라’는 식의 뉘앙스가 아니다.


안시성 전투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영웅인 황제 당태종을 좌절시킨 사건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때 고구려가 획득한 강국으로서의 이미지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하지만 안시성 전투에서의 승리와 별개로, 고구려는 불과 23년이 지난 668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안시성 전투가 빛나는 업적임에는 분명하나, 이러한 군사적 승리 하나만으로 당나라라는 거대 통일 제국의 팽창 욕망과 국제정세의 격변을 막아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안시성 전투, 영화와 역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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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조교수
한국 고대사를 전공하였고, 『고구려 왕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 연구에는 시간성뿐 아니라 공간성도 중요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고여 있는 역사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과 널리 공유하는 역사를 지향하며,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역사 콘텐츠 제작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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