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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총체성, 책의 총체성

감각적 총체성으로 바라본, 책에 관한 단상들

백민석

2019-08-26

 

두루마리 형태의 서적

▲ 두루마리 형태의 성경, 이탈리아 ⓒMagnesMuseum


*조르조 아감벤의 『불과 글』(윤병언 옮김, 책세상, 2016)에는 책이 서양인의 정신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4~5세기 유럽에서, 책은 두루마리에서 좌우로 페이지를 넘기는 지금의 형태로 바뀌었다. 


*두루마리는 파피루스나 양피지 한 장으로 된, 둥글게 말아놓은 형태의 책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보통 30m 길이였고, 그리스의 두루마리는 11m 길이였다. 폭은 성인 손의 한 뼘 길이인 23~25cm 정도였다. 두루마리 하나에는 「신약」의 복음서 한 편 정도를 실을 수 있었다고 한다(출처 / 다음백과, 고대의 책 항목). 

고대의 독자는 그런 두루마리를 책상이나 팔뚝에 걸치고는, 말아놓은 부분을 아래로 조금씩 펼쳐가며 읽었을 것이다. 두루마리는 책 한 권이 한 장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두루마리를 읽으면서 책 속의 세계를 조각조각 끊어 읽을 필요가 없었다. 

이감벤은 이렇게 말한다. “두루마리를 읽는 독서의 시간은 어떻게 보면 인간이 경험하는 삶과 우주의 시간을 재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167쪽) 실제 세계에서 우리는 시간을 연속적으로 감각한다. 우리가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서도 시간에 대해 좀처럼 혼란을 겪지 않는 것은, 시간의 흐름은 어김없고 연속성은 절대 깨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루마리는 실제 세계의 총체성에 대한 감각을 그럭저럭 보존했다. 두루마리를 통한 독서는, 인간이 책 바깥에서 실제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을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아즈텍 코덱스 유물

▲ 아즈텍 유물 중 코덱스 ⓒXuan Che


*그러다 책은 좌우로 페이지를 넘기는 지금의 형태로 발전한다. 좌우로 넘겨가며 읽을 수 있도록 낱장을 묶어 만든 형태다. 아직 종이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4~5세기의 유럽인들은 양피지를 네모반듯하게 잘라 여러 장을 묶어 책을 만들었다. 아감벤은 이런 새로운 형태의 책을, 이전 형태의 '볼루멘volumen'과 대비시켜 '코덱스codex'라고 불렀다고 소개한다.

코덱스의 등장을 두고 아감벤은 혁명이라고 부른다.


*코덱스의 혁명은 ‘페이지’의 등장으로 가능해졌다. 페이지는 두루마리 독서로 가능했던, '세계에 대한 연속적인 감각'을 실질적으로 파괴했다. 세계는 좌와 우의 페이지로 잘려지고, 읽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 페이지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독자는 시간의 흐름이 끊기는 것을 감각한다. 

이는 우리가 느끼는 세계의 총체성에 대한 감각에도 변이를 가져온다. 페이지로 나누어 읽은 독서에서는 세계는 “일련의 불연속적이면서 분명하게 구분된 단위”(165쪽), 그러니까 페이지로 편편이 나뉜다. 이 편편이 나뉜 세계에서는 시간도 불연속적으로 흐르며, 세계를 한 눈에 조망하는 일도 불가능해진다. 


*이는 책의 총체성 문제이기도 하다. 두루마리와는 달리 코덱스는 자신의 전체를, 책이 가진 총체성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책을 읽을 수는 있어도, 책의 전체를 한눈에,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는, 그러니까 독서는, 세계를 감각하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문제이다.


*책이라는 매체는 물질적이면서 정신적인 매체다. 내가 보기에, 인간이 발명한 문명의 이기 가운데 인간과 가장 닮은 매체다. 종이책은 묶은 종이라는 ‘물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언어라는 추상적인 매질을 통해 구현된 ‘정신성’을 담고 있다. 정신성은 우리가 독서라는 정신의 행위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추상적인 세계다.

물성과 정신성은 우리 인간이 우리 자신을 인식할 때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책을 인식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에서 온기를 가진 부정할 수 없는 물성을 느낀다. 동시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육체의 물성을 넘어서는 또 다른 우리 자신을 느낀다. 정신, 영혼, 혹은 자아라고 불리는 이러한 정신성은 육체와 분리될 수 없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드러낸다. 

인간은 인간의 정신성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성을 부정하려는 생각 자체가 정신성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육체라는 물성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체를 부정하는 동시에 우리의 정신도 멈출 것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물성과 정신성으로 느끼는 책


*책과 인간은 닮았다. 책이 종이라는 물성만으로 이뤄졌다면 우리에게 책은 종이를 묶어놓은 더미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학문 혹은 예술이라는, 언어로 구현된 추상적인 세계는 종이 같은 물성을 가진 매체를 통하지 않으면 결코 판독 가능한 세계로 구현되지 않는다. 

책은 인간처럼 물성과 정신성을 동시에 가진다. 그리고 책이 두루마리에서 종이책으로 발전하는 궤를 따라, 학문과 예술이라는 인간의 정신도 함께 발전되어 왔다. 때문에 코덱스의 발명을 두고 아감벤이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덱스 이후 전자책이 주류가 되어가는 세상을 마주하고 있다. 전자책은 이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매체가 되고 있다. 종이책 계약을 할 때면 전자책 계약서도 함께 쓰고, 종이책으로 나오고 보통 두어 달 후면 전자책이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다.

전자책은 사실 생김새만 보면 여전히 종이책이다. 표지와 내지와 목차와 본문, 판권장까지 종이책과 똑같다. 읽는 방법도 같다. 전자책 리더기나 컴퓨터의 모니터를 통해 좌우로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는 방식이다. 종이책과 다른 점은 매질이 종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독서 방법이 같으니, 책을 통해 세계를 감각하고 인식하는 수준도 엇비슷하지 않을까.


*전자책이 미래의 책의 유일한 형태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소설가로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받았던 제안 하나가 웹소설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웹소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름뿐이었다. 대충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인세도 원고료도 없고 종이책으로도 나오지 않는 소설은 상상할 수 없었고,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웹소설은 그만큼이나 낯선 장르였다.

2013년 겨울의 일이었다. 그리고 2019년 봄에 내가 들은 소식은, 2018년 웹소설 시장 규모가 4000억 원(추정치)으로 2013년 100억 원에 비해 40배 성장했다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발표였다. 


*웹툰도 책의 새로운 세대로 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어렸을 때 보던 종이로 된 만화잡지가 책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과거의 책들을 기준으로 보면, 웹툰이나 웹소설은 한 번에 열람하게 되는 분량은 두루마리의 형식에 가깝다. 화면 조작 방식인 스크롤scoll이라는 단어 자체가 ‘두루마리’를 뜻한다. 웹상의 책들은 두루마리를 펼치듯 상하로, 이론상으로는 거의 무한대로 내려 볼 수 있는 형식을 가진다. 그렇다면 책의 정의가 옛 두루마리를 읽던 시기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웹툰이나 웹소설의 특징은 두루마리와의 유사성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작품은 여러 회(편)으로 이뤄진 연재 방식이 대부분이고, 따라서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듯 다음 회를 클릭해 열어야 한다. 두루마리의 형식은 사라지고, 연재 페이지를 열면 서점의 가판대처럼 각 회의 표지들이 화면 가득 정렬되어 나타난다. 독자는 마음 내키는 대로 이 회 저 회를 열어 볼 수도 있다. 접해본 경험이 많지 않아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지만, 웹상에서 책들의 정렬 형식은, 종이책의 좌우로 넘겨보는 페이지보다 더한 자유도를 독자에게 제공한다.

 

sns도 일종의 책이다

 

*이 새로운 책의 형식에서, 세계가 총체적으로 구현되지 않는다거나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웹상에서 세계는 실제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구성된다. 

종이책은 세계를 불연속적이고 단위별로 나누지만 여전히 실제 세계의 감각을 지향했다. 종이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려 했다. 따라서 앞뒤 표지 디자인과 내지의 색상, 본문 내용과 본문의 활자체, 판권장까지 책의 모든 요소가 조화로워야 했다. 조화를 통해 이뤄지는 책의 완성도는, 책의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종이책은 실제 세계처럼 되기를 원했고 흉내 냈다. 한 권의 책이 곧 하나의 완성된 세계라는 지향은, 종이책의 이념이었다.

하지만 아이콘으로 정렬되어 아무 순서로나 클릭해도 되는 웹소설이나 웹툰은 무엇을 완성도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혹시 종이책의 이념은 웹상의 이 새로운 책들에게는 고려할 만한 가치가 없는 기준은 아닐까.

"왜 굳이 '하나의 세계'를 구현해야 하지? 지금으로도 충분한데, 왜 우리가 진짜 세계를 흉내 내야 하지?" 반문하고 있지는 않을까.


*독서 방식만큼이나 가격이 흥미를 끈다. 싸다는 것은 책의 소비 심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 책은 사람이 직접 손으로 써내려가 만들었다. 책이라고 하면 필사본이 전부인 줄 알았던 중세 유럽의 독자들에게, 대량 생산된 인쇄본 책이 얼마나 값어치 없어 보였겠는가. 그건 거의 책이라고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와 비슷한 느낌을 나는 웹상의 책들에게서 느낀다. 회(편)당 100원이라면 몇 줄 읽다버려도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소비 심리가 미치는 영향도 새로운 책들의 형성에 반영될 것이다.


*여기서 그저 읽는다는 행위만을 놓고 본다면 sns 매체도 책의 일종임이 틀림없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형식은 저마다 달라서 어느 것이 sns의 대표성을 띤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미래의 우리는, 미래의 책에서 sns 매체가 물려준 유전자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계의 감각적 총체성은 두루마리에서 종이책과 전자책으로 넘어가며 깨졌고, 다시 전자책에서 웹상의 책들로 넘어오며 전과는 상당히 다른, 무관해보이기까지 하는 총체성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갈수록 더 많은,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나타나 책의 변화를 이끌 것이다. 책이 또 얼마나, 어떻게 달라질지는 감히 예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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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 작가
백민석

단편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혀끝의 남자』 『수림』,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공포의 세기』, 『교양과 광기의 일기』, 에세이 『리플릿』 『아바나의 시민들』 『헤밍웨이』가 있다. 이미지_ⓒ백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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