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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쿠스 : 한계를 뛰어넘은 구휼 – 김만덕

박문국

2017-06-21

한계를 뛰어넘은 구휼 – 김만덕

 

서양 사회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란 개념이 존재한다. 직역하자면 ‘귀족의 의무’란 뜻으로 상류층은 그들이 가진 부와 권력에 걸맞은 책임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이 순수한 봉사의 정신에서 발현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진심이든 가식이든 간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이름으로 수많은 나눔문화가 현재까지 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은 서양에만 있었던 것일까? 사실 상류층의 책임이란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적용되는 미덕이다. 전통 사회의 양반만 하더라도 통념적으로는 자신들의 사리사욕만 채우는 부패한 상류층의 이미지가 강하나, 실제로는 향촌 사회의 지도자로서 사회 유지를 위한 나름의 노력을 수행했다.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는 가르침이 대대로 내려오는 경주 최부자 집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1795년 제주도에서는 좀 더 인상적인 사례가 있었다. 제주도에는 ‘갭인년 숭년에두 먹다 남은 게 물이여(갑인년 흉년 때도 물은 마실 수 있었다)’란 속담이 있는데 이때 말하는 갑인년이 1795년이다. 1794년에 거대한 태풍이 제주도를 덮쳤는데 가뜩이나 식량 생산량이 적었던 만큼 그 피해가 해를 넘겨서까지 이어진 것이다. 조정에서는 피해를 보고받자마자 구휼미를 보냈으나 식량을 실은 배 다섯 척이 모두 침몰해버려 구휼작업조차 여의치 못했다. 이때 한 여인이 사비를 털어 육지에서 쌀 500여 섬을 사오고 이를 모두 도민들에게 나눠준다. 그녀 덕분에 굶어 죽어가던 제주도민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만덕. 남존여비의 관념이 짙어져 가던 조선 후기 사회에서 나눔의 미덕을 실천한 위대한 여성이다.

 

김만덕 표준영정

▲ 김만덕 표준영정

 

사실 그녀가 처음부터 부유했던 것은 아니다. 제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만덕은 설상가상으로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기생의 몸종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출신이 변변치 않은 자가 으레 그렇듯 상세한 과정은 알 수 없으나 나이가 차고 본인이 억울하게 기녀가 됐음을 탄원하여 신분을 회복한 김만덕은 제주도와 육지 사이의 물류 유통 사업을 시작해 거부가 되었다 전해진다. 그녀는 돈을 모은 뒤에도 검소한 생활을 이어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갑인년 흉년 때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쾌척할 수 있던 건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김만덕의 선행은 제주목사 유사모에 의해 조정에도 알려지는데, 이를 들은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김만덕에게 의녀반수의 벼슬을 내리고 소원인 금강산 유람까지 허락해준다. 이는 당대 기준으로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였는데 제주도민은 섬 밖으로 나가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정조는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초계문신들을 대상으로 김만덕의 업적을 기리는 글을 쓰라는 시험 문제까지 내고 이 내용을 체제공과 이면승이 정리하니 그것이 바로 <만덕전>이다.

 

사해(四海)가 모두 내 형제다. 하물며 같은 섬사람 아닌가! 재물이란 외물(外物)이다. 모이고 흩어지는 때가 있다. 내가 어떻게 수전노가 되어 굶어 죽는 사람을 뻣뻣하게 보기만 하고 구휼하지 않겠나. —체제공, <만덕전> 중

 

제주 모충사의 김만덕 묘지 풍경

▲ 제주 모충사의 김만덕 묘지

 

김만덕의 부는 가난한 태생, 기녀 경력을 가진 여성, 제주도 출신이라는 여러 한계를 딛고 이뤄낸 결과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남다르다. 무엇보다 자신의 재산을 개인의 안락함이 아닌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그녀의 태도는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제주도로 돌아온 뒤에도 변하지 않아 쭉 ‘만덕할망’이라 불리며 존경받았고, 죽을 때도 재산 일부분만을 양아들에게 나눠줬을 뿐 나머지 재산은 모두 가난한 자들을 위해 썼다고 전해진다.

 

탐라에 큰 흉년이 들자 여인 만덕은 곡식을 내놓아 백성을 진휼하였다. (중략) 여자라는 운명에 항거하여 창명을 건너 서울의 궁궐에 가서 임금님을 알현하고 명산을 구경하였으니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나는 동안 넉넉하게 멋쟁이로 살다간 사람으로 귀하다 할 만한 사람이다. —박제가, <정유각집> 중

 

한국 전통 문양

 

  • 6월
  • 나눔
  • 역사
  • 김만덕
  • 구휼
  • 만덕전
필자 박문국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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