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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쿠스 : 중산층의 정체성

박문국

2017-01-10

중산층의 정체성


1969년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의외의 인물을 선정했다. 엄밀히 따지면 하나의 개인은 아니었다.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은 ‘미국의 중산층’이었다. 그 이유인즉슨 미국의 중산층이 사회 및 정치, 경제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미국의 중산층은 히피 문화, 록 장르, 더 나아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 등을 이끌며 자신들의 외연을 넓혔다. 이들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직접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소리 없는 다수’로서 미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었다.

 

1969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미국의 중산층

▲ 1969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미국의 중산층

 

이보다 더 과거인 19세기 영국에서도 중산층이 자신들의 저력을 증명한 바 있다.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로 통칭되는, 흔히 영국 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를 영위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극도로 확장된 제국주의와 식민지에 대한 가혹한 수탈이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영국 내부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변화가 존재했다. 바로 귀족적 의회정치가 근대적 대의민주제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1838년부터 약 20년간 지속된 차티스트 운동이었다. 성인 남성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차티스트 운동은 결과적으로 분쇄되었지만, 그 시대적 흐름 자체는 중산층을 통해 쭉 이어졌다. 이후 영국의 중산층은 진보적이고 급진적 성격을 지닌 휘그당과 손을 잡았는데, 이에 따라 휘그당은 중산층의 특징인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온건한 변화를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867년과 1884년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 보통선거가 정착되는 것이다(물론 어디까지나 남성들만의 보통선거였다). 미국과 영국의 사례는 중산층의 특징을 상징한다. 그들은 상류층처럼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다. 동시에 당장 먹고 살기에 급급해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현재의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중산층은 온건한 방식을 유지하며 또한 개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중산층의 움직임이 극대화될 때, 그들은 민주주의 사회의 발전을 가속화시킨다.

그렇다면 한국의 중산층은 어떨까? 한국 중산층의 등장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집권한 박정희의 군사정권은 국가 주도의 불균형 성장 전략을 채택했는데, 이로 인해 폭발적인 이촌향도 현상이 야기되고 서울 곳곳에서는 무허가 판자촌이 난립하게 된다. 빈민들이 가득한 서울의 실상은 대한민국의 수도를 조국 근대화의 상징으로 만들려던 당초의 목표와 괴리되는 것이었다. 이에 군사정권은 서울을 ‘중산층의 도시’로 만들기 위한 거대한 외과수술을 단행한다. 그리고 이때 실무 작업을 맡은 것이 ‘불도저’란 별명으로 유명한 김현옥 시장이었다.

군인 출신으로 박정희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던 김현옥이 서울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방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2,000동의 시민아파트를 건립하여 서울 내부에서 주거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현옥은 취임 직후부터 이미 여의도 개발, 세운상가 건설, 강변북로 개발 등 굵직한 대공사를 여러 차례 벌였고 서울시의 재정은 매년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하라면 하고, 안 되면 되게 하는’ 군사정권의 가장 모범적인 행정가였던 김현옥은 시민아파트 사업을 밀어붙였고, 그 결과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라는 대형 참사가 발생한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김현옥은 사임했지만(그럼에도 박정희는 그를 계속 신임했고, 김현옥은 이듬해 내무부 장관에 취임한다), 그가 기획한 또 하나의 방안은 계속 진행되었다. 바로 서울 근교인 경기도 광주에 대단지를 구성해 서울 내의 빈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것이었다.
도시 외부로 인구를 분산시킨다는 기본 전략은 분명 타당한 면이 있었으나, 그 방식 또한 시민아파트와 마찬가지로 폭압적인 게 문제였다. 서울시는 청계천과 서울역 근처에 사는 약 10만 명의 빈민들에게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하고 그들을 이주시킨다. 그러나 그 이주민이 광주에서 마주한 것은 자신들이 살 집이 아닌 허허벌판이었다. 땅바닥에 20~30평의 금만 그어놓고 알아서 집을 지어서 살라는 수준이었던 것이었다. 물론 10만의 인구가 살만한 생계·생존 수단은 전혀 마련된 게 없었다.

 

1970년대의 광주대단지

▲ 1970년대의 광주대단지

 

 

    “광주대단지에 대장염이 발생하여 2백80명이 집단적으로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중략) 사람만 옮겨놓았을 뿐 시설을 제대로 해놓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부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들어보면 이곳 주민들은 개천바닥에 깊이 50cm쯤의 우물을 파서 식용에 쓰고 있는데, 지난번의 비로 개천의 시궁창물이 우물에 스며들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벌레가 들끓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되어 있어야 한다.”
    -<경향신문> 1970.6.4.

    치안 문제는 더욱 심각해 밤마다 폭행 사건이 일어난다는 보고가 대통령 비서실까지 올라갔으나 이에 대한 해결책 또한 전혀 마련되지 못했다. 애초에 김현옥이 목표로 한 것은 도시 빈민들을 어떻게든 서울에서 분리시키겠다는 것이었지, 광주를 정상적인 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10만이라는 인구였지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개인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은 빈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이듬해 광주대단지 사건이라는 이주민들의 대규모 소요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 쭉 유지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중산층은 빈민에 대한 구축(驅逐)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것은 자생적이라기보다는 권위주의적 설계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유신이라는 폭압적 정치가 이어지며 개인의 자유는 억압되었고 중산층이 가진 내재적 잠재성, 이른바 온건한 개혁의 정신도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1987년 6월 항쟁 때 수많은 화이트칼라가 항쟁에 참여하며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하기도 했으나, 약 10년 뒤에 발생한 외환위기로 한국의 중산층은 대부분 몰락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서민이란 용어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다 2016년 현재 다시 중산층이 대두했다. 상층과 하층의 이념적 갈등을 수렴하고 보완하는 중심적 존재로서의 가치가 중요시되는 담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못 살겠다 갈아엎자’가 아닌, 대의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 의지는 매주 주말마다 곳곳의 광장에서 증명되고 있다.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온건한 변화. 한국의 중산층은 드디어 중산층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훗날의 역사는 분명 이 사실을 기록할 것이다.


    한국전통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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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문국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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