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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청춘들을 ‘혐(嫌)’ 하게 하는가

혐(嫌): 싫어하는 대상에 붙는 접사

정덕현

2016-03-24

무엇이 청춘들을 ‘혐(嫌)’ 하게 하는가 - 혐(嫌): 싫어하는 대상에 붙는 접사


‘혐주의’ 광고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게임 ‘서든 어택’
▲ ‘혐주의’ 광고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게임 ‘서든 어택’ ⓒ넥슨지티(주)

 

작년 11월 넥슨의 1인칭 슈팅 게임 ‘서든 어택’의 한 광고에는 ‘혐주의’라는 수식어가 달라붙었다. 그 광고 속에는 <개그콘서트> ‘니글니글’ 코너에 출연하는 송영길과 이상훈이 양 옆에 서 있고, 가운데 개그우먼 박나래가 얼굴을 새까맣게 칠한 채 흑인 분장을 하고 있었다. ‘흑형나래’라는 캐릭터 소개에는 ‘모두를 경악케 할 새로운 흑형 캐릭터!’라는 문구도 달려 있었다. 방송인 샘 해밍턴은 페이스북에 이 광고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제 그만 하자.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할 거야? 흑인 분장 왜 하는 거냐고? 창피하지도 않나 보네.”


광고 내용은 ‘서든 어택’의 새 캐릭터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 흑인 캐릭터의 이름은 ‘나래니글’. 박나래의 나래와 ‘니글니글’ 코너의 니글을 붙인 합성어라고 설명했지만 ‘니글’이란 표현이 흑인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Nigger’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면서 논란은 일파만파 커졌다. 결국 넥슨은 해당광고를 모두 내리고 사과문을 게재했다.

 

이 사건에서 주목을 끄는 한 단어가 있다. 바로 ‘혐주의’라는 수식어에 사용된 ‘혐’이란 단어다. ‘혐오’의 단순한 줄임말처럼 보이지만 사실 ‘혐’으로 줄여진 이 접사는 여러 단어들의 앞뒤로 달라붙어 다양하게 활용되는 인터넷 일상 용어가 되어버렸다. ‘혐한’, ‘혐일’처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혐주의(혐오스러운 장면이 있으니 주의)’, ‘극혐(극도로 혐오함)’, ‘혐짤(혐오스러운 짤방)’처럼 단어들이 합쳐져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인터넷 상에서 혐오스러운 사람의 이름이나 지칭에 앞 글자를 떼고 ‘혐’을 붙여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혐줌마(혐+아줌마)’, ‘혐저씨(혐+아저씨)’, ‘혐산당(혐+공산당)’ 같은.


‘혐’에서 보이는 언어 유희


‘혐’이라는 신조어의 등장 과정의 배경이 된 게임, ‘스타크래프트’

▲ ‘혐’이라는 신조어의 등장 과정의 배경이 된 게임, ‘스타크래프트’
ⓒBlizzard Entertainment


  

대부분의 인터넷 신조어들이 ‘축약’의 특징을 갖는 건 그것이 쓰기 편하기 때문이다. ‘혐오’ 혹은 ‘혐오스럽다’라고 다 쓰기보다 그저 ‘혐’이라는 한 자를 붙여놓는 게 더 간편하다. 하지만 편의성만큼 그 안에는 ‘언어유희’의 재미가 포함된다. 디시인사이드 ‘스타크래프트’ 갤러리에서 ‘혐’이 붙은 신조어들이 처음 등장했던 그 과정을 보면 이 ‘언어 유희’의 양상을 읽어낼 수 있다. 최근 알파고 스타크래프트와의 대결에서 자신 있다고 밝힌 전 스타 프로게이머 이영호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 벌어졌던 일. 이영호의 팬들이 스타크래프트 갤러리에 당시 상대였던 이제동, 김택용, 송병구 등을 비판하는 글과 사진 등은 개념 글에 올리고, 이영호를 비판하는 글은 삭제 처리해버리자 이에 반발한 다른 선수들의 팬들이 이를 “공산당 같다.”고 해서 ‘꼼산당’이라 불렀고 여기에 이영호의 외모를 비하하는 의미로 ‘혐’을 덧붙여 ‘혐산당’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게 됐다는 것이다.


무수한 ‘혐’ 조어의 탄생을 보여준 프로그램 <더 지니어스>

▲ 무수한 ‘혐’ 조어의 탄생을 보여준 프로그램
<더 지니어스> ⓒtvN

 

이후 ‘혐’이라는 조어는 다양하게 만들어져 사용됐다. tvN에서 방영됐던 <더 지니어스>라는 게임 프로그램은 ‘혐’ 조어들을 무수하게 탄생시켰다. 게임 속에서 다양한 꼼수들까지 활용해서 승리해야 하는 프로그램의 성격상 그 적나라한 모습들이 등장했고 그럴 때마다 인터넷에서는 혐경란, 혐은지, 혐구라 같은 조어들이 탄생했다. 이것은 실제로 혐오스럽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어떤 행동에 대한 불쾌감이나 불편함을 ‘혐’이라는 단어 하나를 덧붙이는 언어 유희로 탄생했다고 봐야 한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같은 인터넷 방송을 지상파화한 프로그램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인터넷에서 조어는 하나의 언어 표현 방법이 되어 있다. 누가 재밌고 간편하며 임팩트 있게 조어를 만들어내느냐는,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간에 자신의 존재를 잘 드러내느냐 아니냐 하는 인정 욕구와 맞닿아 있다.


점점 강해지고 자극적으로 변하는 조어들


인터넷을 통한 생중계, 실시간 채팅 등을 통해 수많은 신조어를 여과없이 드러낸 방송 <마이리틀텔레비전>
인터넷을 통한 생중계, 실시간 채팅 등을 통해 수많은 신조어를

여과없이 드러낸 방송 <마이리틀텔레비전> ⓒMBC

 

그런데 언어 유희가 만들어낸 다양한 조어들 중 왜 하필 다른 단어도 아니고 ‘혐’이었을까. ‘혐한’이나 ‘혐일’에서 그 탄생 과정을 유추해보면 ‘혐’이란 불쾌감에 대한 더 강한 표현으로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 ‘혐일’보다 많이 사용됐던 건 ‘반일’ 같은 단어였다. 한때 그토록 많았던 ‘반일 감정’이라는 표현을 떠올려보라. 즉 한때 그렇게 우리네 감정을 들끓게 했어도 우리가 사용했던 ‘반일’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건 지금의 ‘혐일’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순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반대한다’라는 표현에는 그나마 이성적인 면이 어른거리지만, ‘혐오한다’에는 감정들이 넘쳐난다.

 

최근에는 ‘혐’이라는 표현보다 ‘극혐(極嫌, 극도로 혐오)’이라는 표현이 더 자주 쓰인다. 물론 다른 단어와 덧붙여져 쓰일 때는 그 조어의 편의성 때문에 ‘혐’이 쓰이지만, 독자적으로 쓰일 때는 ‘극혐’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되어 있다. 어떤 면으로 보면 ‘혐’은 ‘혐오’의 준말에서 비롯됐지만 지금은 ‘극혐’의 준말처럼 여겨지는 면이 있다. ‘반’에서 ‘혐’으로 ‘혐’에서 ‘극혐’으로. 그리고 여기서 나아가 ‘개극혐’, ‘핵극혐’처럼 조어들은 더 강하고 자극적인 표현으로 변해간다.


‘혐’에 투영된 청춘들의 일상화된 분노


이처럼 ‘혐’이라는 수식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다양한 조어들로 만들어지고 좀 더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현상은 당연하게도 ‘혐오스런 상황’들이 많은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혐’이란 ‘반’ 같은 단어와 달리 감정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이 표현이 일상화된 지금의 청춘들의 정서를 잘 드러내준다. 이 표현이 인터넷, 그 중에서도 게임 갤러리 같은 곳에서 많이 생겨나고 사용된다는 건 게임 같은 현실 바깥의 공간에서 터져 나오는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을 읽게 해준다. 현재 현실을 살아가는 청춘들은 무한 경쟁 속에 내던져져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이 취업 같은 미래의 보장으로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절망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이 사회가 청춘들에 투자해 미래를 그려나가기보다는 당장 생존하기 위해 그들을 저당 잡고 대신 그 위에 아슬아슬한 기성세대들의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는데 분노한다. 그들에게 ‘혐’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정서이자 감정이다.


http://comic.naver.com/webtoon/weekday.nhn 웹에 일정한 주기별로 업로드되는 웹툰 역시 신조어의 탄생 배경에 있다. 게임으로 제작 중에 있다고 알려진 인기 웹툰 작가 조석의 <마음의 소리>

▲ http://comic.naver.com/webtoon/weekday.nhn 
웹에 일정한 주기별로 업로드되는 웹툰 역시 신조어의 탄생 배경에 있다. 
게임으로 제작 중에 있다고 알려진 인기 웹툰 작가 조석의 <마음의 소리> 
ⓒNEOWIZ ABLE STUDIO CORP., NAVER webtoon


그래서 처음에는 실제로 혐오스런 일로 인해 생겨난 ‘혐’이라는 조어가 차츰 그 자극을 잃어가고 그래서 ‘극혐’으로 강화되지만 그 역시 때로는 그저 일상적인 일에도 ‘싫다’는 표현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는 일이 무시로 발생한다. 게다가 부정적으로 사용되던 ‘혐’이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갓’으로 대치되는 상황도 생겨난다. 어떤 극도로 증오하게 되는 대상을 ‘혐○○’라고 표현하다가 어느 이상이 되어버리면 ‘갓○○’로 격상시키는 일이다. 즉 애초부터 ‘혐’의 감정에는 그만한 관심과 애정의 의미까지(그것이 뒤집어졌을 때 혐이 된다)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혐’에 대한 세대 간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그런데 만일 어른들이 어느 날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 일에 청춘들이 마구 던지는 ‘극혐’이라는 단어를 듣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그 표현 그대로의 의미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며 놀람과 우려와 걱정과 화가 뒤섞인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어른들은 그 표현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겨나 지금처럼 일상화 되었는지 그 과정을 잘 모른다. 따라서 말 그대로의 의미로만 받아들인다면 커다란 세대 간의 격차와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혐’의 언어 유희는 어찌 보면 청춘들의 그들만의 언어로 뼈 있는 이야기를 던져보고 또 그것을 통해 잠시 간의 감정적 토로를 하려는 안간힘처럼 보인다. 물론 그 언어가 지나치게 공격적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현상이라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그 표피적인 언어의 자극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담겨진 청춘들의 현실에 대한 불편한 정서를 읽어내는 일은 중요할 듯 싶다. 모든 것에 ‘혐’이라는 수식어가 달라붙는 세상이 결코 바람직하다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우리 사회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청춘들의 언어에서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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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덕현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이자 방송 칼럼니스트. TV나 영화, 대중음악 같은 대중문화 속에 담겨진 현실을 분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현재 SBS 열린TV ‘정덕현의 TV뒤집기’, KBS 라디오 <팝스프리덤>과 YTN 라디오 <최영일의 정면승부>에서 고정 코너를 맡고 있다. 각종 방송, 강연 등을 통해 대중문화가 가진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소통하려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남자들의 숨은 마흔 찾기』, 『웃기는 레볼루션(공저)』,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가 있다. 더키앙(thekian.net)이라는 사이트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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